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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히 만난 행복

샌프란시스코(San Francisco), 캘리포니아주

by 고라니

나는 자칭 샌프란시스코 전문가다. 수 년 전, 매 해마다 샌프란시스코로 출장을 간 경험 덕에 도시의 특징과 분위기가 익숙하다.


심지어 마지막 출장 때는 입국심사에서 왜 이렇게 샌프란시스코에 자주 오냐는 질문을 받은 후 세컨더리 룸에서 추가 조사를 받기도 했다. 약 1시간여 동안 안에서 눈물 콧물 쏟으며 불법취업할 생각 없다고 설명한 끝에야 겨우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발생한 웃기는 상황들은 아직도 내 술자리용 무용담으로 활용되고 있다.)


샌프란시스코 여행을 계획하면서 다른 어떤 여행보다 자칭 전문가의 활약이 필요할 때라고 확신했다. 이미 나에겐 남편과 샌프란시스코에서 함께 하고 싶었던 리스트가 있었다. 가령 자전거를 타고 해변가를 달린다든지, 금문교에서 노을을 본다든지, 미술관을 찬찬히 감상한다든지.


확신의 첫째 날


샌프란시스코 유니언 스퀘어 인근 호텔에 짐을 맡겨두고 자신만만하게 남편을 이끌었다. 첫 날엔 도심 인근을 걸어서 구경하는 일정을 짰다.


유니언 스퀘어를 구경한 뒤 방문한 곳은 차이나 타운. 미리 검색해 놓은 딤섬 맛집에서 점심을 먹은 뒤 여행 일정을 시작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시작부터 이게 무슨 일이람. 블로그에서 찾은 딤섬 맛집은 포장 맛집이었다. 결국 딤섬을 포장한 뒤 인근 공원에서 콘크리트 난간에 쪼그리고 앉아 비둘기를 견제하며 먹었다. 여유롭고 든든하게 식사를 하려던 계획은 일단 실패.


tempImageAPMTo7.heic 이 사진의 주인공은 사실 나무데크 위의 바다사자가 아니라 갈매기다.


다음은 피어 39로 가서 샌프란시스코 항구 산책과 바다사자를 보는 일정. 버스를 타고 피어 39로 이동하면서 남편에게 이곳에 바다사자가 얼마나 많은지 얘기했다. 나무 데크 위로 바다사자 수십마리가 서로 살을 부비고 누워있기도 하고 갑자기 싸우면서 바다로 서로 밀치기도 한다며 신나게 설명했다. 하지만 막상 도착하고 나니 바다사자보다는 이들을 보려 몰려든 인파가 훨씬 많았다. 바다사자끼리 나무 데크 위에서 자리싸움을 하는 모습보다는 사람들끼리 좋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눈치싸움 하는 모습을 더 흥미진진하게 볼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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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너무 많았던 탓에 2019년 방문 때 찍은 사진으로 아쉬움을 달래본다.


여행이 흥미진진하게 풀리는 느낌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괜찮았다. 나에겐 히든카드 ‘부에나 비스타’ 카페가 있었다. 이 곳은 미국에서 처음으로 아이리쉬 커피를 판매하기 시작한 곳이다. 새하얀 정장을 입고 한 번에 7~8개 잔에 위스키를 부어 아이리쉬 커피를 만드는 모습이 특히 인상적이다. 몇 년 전 선배와 함께 이 곳에 방문해 멋진 노신사가 만들어준 아이리쉬 커피를 마시며 조곤 조곤 대화를 나누던 추억의 장소다. 이 기억은 샌프란시스코를 나에게 더 특별한 도시로 만들어줬다.


남편과도 같은 기억을 공유하고 싶다는 일념 하나로 다시 찾은 부에나 비스타 카페는 발을 디딜 틈조차 없이 사람들로 붐볐다. 겨우 자리를 안내 받은 뒤 아이리쉬 커피 두 잔을 시켰지만 인파로 인해 위스키병을 한껏 치켜 올리며 넘치도록 잔에 붓는 모습은 보기 어려웠다. 사람들이 많은 탓에 목소리를 높이지 않으면 상대방 말소리를 듣기 어려웠다.


아이리쉬 커피의 맛은 여전히 훌륭했지만 이곳을 나에게 특별하게 만들어줬던 분위기는 사라져버렸다. 확신에 차 시작한 첫날 샌프란시스코는 예상을 벗어난 채 흘러갔다.


tempImageWh1cS2.heic 만국박람회를 위해 이런 건축물을 짓다니. 그 시절 만국박람회가 절로 궁금해진다.

우연의 둘째 날


둘째 날 일정이야말로 가장 기대하던 계획이었다. 자전거를 타고 해변가 길을 따라 ‘팰리스 오브 파인 아트’까지 가보는 것. 팰리스 오브 파인 아트는 1915년 샌프란시스코 만국박람회를 위해 지어진 건축물이다. 로마와 그리스 건축양식을 본따 만들어져 마치 신전에 들어와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예전 출장 때 비행기 출발까지 시간이 남아 혼자 자전거를 타고 이곳까지 내달렸다. 가는 길에 마주쳤던 아늑한 공원의 모습, 멀리 보이는 금문교 전경, 신비로웠던 건축물까지 생생하게 기억에 남는다. 남편도 분명 이 여정을 즐거워하리라 확신했다.


리프트 앱을 열고 인근에 있는 자전거 위치를 확인했다. 리프트 자전거는 첫 30분에 3.99 달러, 이후엔 1분에 0.3 달러씩 금액이 올라가는 구조다. 30분이면 내가 있는 위치에서 팰리스 오브 파인 아트까지 충분한 거리다.

이제 남편과 함께 페달을 밟기 시작했다. 오른쪽엔 바다가 펼쳐져 있었고 저 멀리 금문교가 보였다. 팰리스 오브 파인 아트 인근까지 신나게 달렸고 도착한 뒤에서야 인근에 자전거를 반납하는 곳이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앱으로 확인해보니 이 곳에서 조금만 더 떨어진 곳에 반납장소가 위치해 있었다. 일단 자전거를 반납하는 것이 우선이었기에 (1분에 0.3 달러씩 차곡 차곡 요금이 올라가고 있었다.) 팰리스 오브 파인 아트 구경을 후순위로 미루고 반납 장소로 찾아갔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절대 가지 않았을 길을 자전거를 끌고 올라가 (오르막길인데다 차도가 좁아서 내 담력으로는 도저히 탈 수 없었다.) 반납했다. 그 사이 처음에 3.99달러였던 자전거 대여 비용은 9.54달러까지 올라가버렸다.


tempImageZvMc8R.heic 그리스 로마 동상을 봤을 때보다 더 열광했던 요다 동상


이왕 계획이 살짝 어긋난 김에 팰리스 오브 파인 아트로 왔던 길을 되돌아가기 보다는 인근 산책을 하기로 했다. 거대한 나무 밑 그늘, 잔디밭에 누워서 책을 읽는 사람들, 그 사이를 뛰어 다니는 강아지를 지나 걸으니 갑자기 스타워즈 요다가 눈 앞에 나타났다. 정확히는 요다 동상으로 장식돼있는 분수였다.


상아빛의 낮은 건물이 요다 분수를 기역자 모양으로 둘러싸고 있었다. 그리고 건물 3층 즈음 창문에선 역시 스타워즈에 나오는 금빛 인간형 로봇인 C-3PO가 손을 흔드는 모습으로 서 있었다. 게다가 1층 로비엔 스타워즈 인기 캐릭터 R2D2까지. 이렇게 고요하고 신비로운 스타워즈 세상을 갑자기 맞닥뜨리다니. 남편과 나는 어느 때보다 들뜬 상태로 요다 주변을 빙글 빙글 돌았다.


May the Force be with you. 우리의 미국 여행에 포스가 함께하길. 이 우연을 끝까지 즐기고 싶어 당시엔 검색하지 않았지만 나중에 알고보니 이 곳은 루카스 필름의 본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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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가 천국인가요?

루카스 필름 본사를 지나 더 아래로 내려가자 이번엔 벚꽃이 살랑거렸다. 벚꽃잎 뒤로는 팰리스 오브 파인 아트의 돔 천장이 빼꼼히 올라와있었다. 다른 이들은 모르는 팰리스 오브 파인 아트의 새로운 측면이 나에게만 허락된 느낌이었다.

때마침 벚꽃나무 바로 옆, 기다렸다는 듯이 스타벅스가 있었고 남편과 나는 커피를 마시며 예상치 못한 일정이 우리의 여행을 얼마나 풍부하게 만들었는지에 대해 얘기를 나눴다.


뜻밖의 만남


샌프란시스코 여행 후반부에 접어들면서 이번엔 뜻밖의 만남이 뜻밖의 즐거움을 제공했다. 요세미티 국립공원에서 셔틀버스를 타고 이동하던 중 누군가가 갑자기 탄성을 내질렀다. 버스 창문 밖 너머로 곰 두 마리가 숲 속을 걷는 모습을 본 것이다. 순식간에 셔틀 내부가 소란스러워지며 아직 곰을 발견하지 못한 사람들의 아쉬움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그 때 갑자기 셔틀이 멈췄다. 운전기사는 승객들에게 안전하게 버스 안에서 천천히 곰을 찾아보라고 말했다. 다들 버스 오른쪽 창문에 옹기 종기 얼굴을 붙이고 곰을 찾기 시작했다. 엄마 곰(혹은 아빠 곰일 수도?)이 앞장서고 그 뒤를 아기 곰이 뒤따르며 천천히 길을 걷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눈 앞에서 곰을 마주쳤을 때 뭐라고 소리쳐야 하는지 다같이 외친 뒤 버스가 출발했다. 뭐라고 외쳐야 하냐고?

“Go away, Bear!”

버스 운전기사가 알려준 믿거나 말거나 주문이다.


tempImagetAItXf.heic 골든게이트 공원에는 동화 속 장면같은 공간들도 곳곳에 있다.


다시 샌프란시스코로 돌아온 뒤엔 비행기를 타기 전 남는 시간 동안 미처 못 갔던 곳들을 마지막으로 가보기로 했다. 샌프란시스코를 대표하는 곳 중 하나인 골든게이트 공원에서 라이브 연주도 듣고 산책도 하며 여유로운 시간을 보냈다.


이제 샌프란시스코 전망을 감상하러 트윈 픽스로 이동하려는 찰나, 공원 한쪽에 마련된 탁구대가 보였다. 샌프란시스코 공원에서 탁구를? 놓칠 수 없지.


처음엔 미처 못 봤지만 탁구대 옆에는 한 백인 아저씨가 마치 터줏대감처럼 앉아 있었다. 아저씨는 탁구공이 오가는 모습을 잠시 지켜보더니 내가 구멍이라는 것을 파악하자마자 나에게 걸어왔다. 탁구채 잡는 방법부터 자세, 서브를 넣는 방법까지 찬찬히 알려준 뒤 본인이 시범을 보여주겠다며 연습시키기 시작했다. 집중 가르침 덕분이었을까. 서브 실수를 자주 하긴 했지만 때때로 남편의 허를 찌르는 공격이 나올 때마다 아저씨와 함께 뛸듯이 기뻐했다.


한참 동안 탁구에 열중한 뒤 이제 가봐야 한다고 말하자 잠시 아쉬워하던 아저씨는 다시 터줏대감 모드로 자리에 앉아 다음 제자를 눈으로 좇기 시작했다. 골든게이트 공원에 갈 때는 탁구 터줏대감 아저씨를 찾아보세요.


촘촘하게 계획된 여행이 더 즐거울까 아니면 우연의 흐름에 맡긴 여행이 더 즐거울까.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확신의 J인 나에겐 전자가 무조건 우선이다. 여행 일정과 식당을 미리 짜 놓는 것은 물론이고 사전 예약까지 다 준비해놓는다.


만약 계획대로 풀리지 않는다면? 슬금 슬금 밀려 들어오는 실망감에 몸서리치기도 한다. 하지만 이번 여행은 계획에서 벗어난 여정이 더 깊이 기억에 남는다. 여행을 즐기는 방법을 조금 바꿔야 할지도 모르겠다. 계획과 다르더라도 실망하지 않고 나아가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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