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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세계에 들어간 여행자의 자세

마이애미부터 바하마까지

by 고라니

미처 생각하지 못한 난관이었다. 마이애미와 바하마를 왕복하는 크루즈 여행 첫 날, 저녁을 먹기 위해 레스토랑으로 향했다. 크루즈 여행에선 사전에 저녁식사 시간을 미리 예약한 뒤 매일 같은 시간에 같은 자리에서 식사를 한다.


영화 타이타닉 속 고풍스러운 드레스를 입고 식사하는 케이트 윈슬릿에 빙의해 나름 원피스를 차려 입고 우아한 걸음으로 자리를 안내 받았다. 하지만 이게 웬걸, 내 앞에 놓인 자리는 남편과 나만의 2인석이 아니라 6인석이었다. 그 말인 즉슨, 다른 이들과 함께 앉아야 한다는 의미다.


“Hi, How are you?”

자리에 앉은 뒤 2~3분 정도 지났을까. 등 뒤에서 밝게 인사를 건네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영화배우 라이언 레이놀즈를 닮은 남성과 나탈리 포트먼을 닮은 여성 커플이 활짝 웃으면서 내 옆에 나란히 앉았다. 그 순간부터 식사 자리는 타이타닉이 아니라 영어 듣기평가 시간으로 변신했다.


미국에서 적응하기 힘든 것 중 하나를 꼽자면 역시 ‘스몰톡(Small Talk)’이다. 마트에서 몇 가지 물건을 살 때도, 길을 걸을 때도 모르는 사람이 갑자기 인사를 하며 말을 걸 때마다 깜짝 놀라곤 한다.


특히 내가 1년살기를 했던 조지아주는 서던 호스피탈리티(Southern Hospitality, 남부의 환대) 문화를 가지고 있어서 낯선 이방인에게도 상냥하고 친절하다. 물론 서던 호스피탈리티는 과거 백인 주류 계층이 문화적, 도덕적 우위를 점하기 위해 형성한 문화다. 백인 농장주들의 서던 호스피탈리티를 뒷받침해주고 있던 것은 흑인 노예제다.


영화 '헬프'에서도 서던 호스피털리티의 양면성이 잘 드러난다. 노예제는 이미 폐지됐지만 여전히 흑인은 백인들과 분리된 채 차별받으며 살던 1960년대를 배경으로 한 영화다. 영화 속 백인 고용주들은 사람들을 초대해 파티를 열고 굶주린 아프리카 아이를 위한 자선 모금 활동을 한다. 하지만 정작 흑인 가사노동자의 차별에는 눈을 감을 뿐 아니라 오히려 적극적으로 차별을 부추긴다. 영화는 미국 남부 지역의 견고한 백인 우월주의가 일상 곳곳에 어떻게 드러나는지 여실히 드러낸다.


역사와 영화 얘기는 일단 미뤄두고 어쨌든 서던 호스피탈리티 덕분에? 조지아에선 모르는 사람과 인사를 나누는 상황이 일상이다. 심지어 차를 타고 이동할 때 밖에서 산책을 하는 사람과 가볍게 손을 들며 인사를 하고 마트에서 모르는 아주머니와 어떤 와인이 좋은지 의논을 하기도 한다.

다만 이 모든 순간은 낯을 가리는데다 영어로 말할 때 뚝딱거리는 나에겐 도전의 연속이라는 점이 문제다.


tempImagepoGHgs.heic 크루즈의 멋진 식사공간과 어울리지 않는 승객. 그건 바로 나.

피하고 싶다 아주 격렬하게


첫 날 저녁은 배우 부부(배우는 아니지만 배우를 닮았으므로 편의상 배우 부부라고 지칭하겠다.)와 간단한 자기 소개를 나눴다. 우리 부부는 1년간 방문 연구원 자격으로 조지아대(UGA)에 와있다고 소개했고 크루즈는 처음이라 기대가 크다는 소감을 말했다. 배우 부부는 오하이오에서 살고 있으며 크루즈 여행은 이번이 세 번째라고 했다.


라이언 레이놀즈 닮은꼴 남성은 에피타이저, 메인, 디저트를 1개씩만 고르지 말고 먹고 싶은 메뉴 여러 개를 골라 먹어도 된다는 엄청난 꿀팁을 전수해줬다. 나탈리 포트먼 닮은꼴 여성은 식사를 마친 뒤 테이블 담당 서버에게 자연스럽게 악수를 청하며 달러 지폐를 팁으로 건네는 손기술을 보여줬다. 미드 ‘프렌즈’에서 모니카의 옛 남자친구 리처드가 악수하며 팁을 건네는 모습을 미국 어른의 상징처럼 기억하고 있는데 눈 앞에서 보게 될 줄이야.


약 한 시간 동안 이어진 식사와 대화는 생각보다 꽤 괜찮았고 내일 저녁 식사 시간에 다시 만나자며 인사를 나눴다. 하지만 방으로 돌아와 긴장이 풀리자마자 어깨에 담이 오기 시작했다. 내일은 어색한 이 영어 대화를 반드시 피하겠다고 다짐했다.


tempImageDCdjLN.heic 크루즈를 탈 때는 무조건 발코니룸으로.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발코니룸으로!


다음 날 크루즈 발코니룸에서 맞이하는 아침은 경이로웠다. 7시 즈음 일어나서 두 눈을 비비며 발코니로 나가니 하늘과 바다를 가로지르는 경계 위로 태양이 조금씩 떠오르고 있었다. 하늘의 옅은 파란색과 바다의 검푸른색이 태양 주변 주황빛과 함께 부드럽게 뭉그러지며 어우러졌다.


이후엔 크루즈를 구석 구석 돌아다니며 수영을 하고 선베드에 누워 낮잠을 자고 보드게임룸에 가 체스를 두기도 했다. 눈 앞의 풍경도, 사람들의 표정도 그야말로 여유롭고 평화로웠다. 하지만 저녁 식사 시간이 다가올수록 슬슬 긴장감이 밀려들어왔다. 배우 부부의 말을 내가 이해하지 못해서 침묵이 흐르면 어쩌지. 내가 하는 영어를 배우 부부가 못 알아 들어서 침묵이 생기면 어쩌지.(낯을 가리는 주제에 말이 끊기는 것도 못 참는 이상한 성격이다.)


tempImageFIH3mj.heic 바다 한 가운데서 바라본 해넘이의 순간은 특별하다.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방에서 일몰을 충분히 감상한 뒤 식사 시작 시간보다 20여분 가량 늦게 도착하는 것. 그렇다면 6시 30분에 맞춰서 식사를 시작하는 배우 부부와 함께 테이블에 머무는 시간이 줄어들지 않을까.

발코니로 나가 일출만큼이나 황홀했던 일몰을 바라봤다. 마치 바다가 삼켜버리듯 수평선 밑으로 뚝 떨어져 사라진 태양을 보고 있자니 지구가 평평하다고 인식한 옛 사람들의 인식이 합리적인 것처럼 느껴졌다.


태양의 시간이 끝나고 이제 저녁 식사 시간이다. 20분이나 일부러 늦게 도착한 나를 발견하자마자 배우 부부는 활짝 웃으며 말했다.

“Hi, I was worried that you guys were avoiding us” (너희가 우리를 혹시 피하는건가 싶어서 걱정했어.)


아 망했다. 그렇게 티가 났나? 태연하게 웃으며 방에서 일몰을 보느라 조금 늦었을 뿐이라고 답했다. 이미 식사를 하고 있을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배우 부부와 우리 부부의 음식은 동시에 나왔다.


피할 수 없다면 즐겨라


낯을 가리는데 침묵은 못 참고 주변 사람들 눈치까지 보는 성격의 인간이 선택할 수 있는 마지막 옵션은 이 상황을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는 것이었다. 배우 부부가 상처받을까봐 저녁 식사 시간에 늦게 가지도, 자리를 바꿔 앉지도 못하겠으니 그냥 내 마음을 고쳐먹기로 했다.


신기하게도 받아들이기로 마음 먹으니 정말 훨씬 편해진 느낌이 들었다. 내 영어가 문법적으로 맞든 틀리든 신경쓰지 않은 채 미국 여행 주제를 꺼내며 여행할 곳들을 추천해달라고 먼저 말을 걸었다. 라이언 레이놀즈는 신이 나서 워싱턴주 ‘마운틴 레이니어’의 만년설을 꼭 봐야 한다고 알려줬다. 사실 마운틴 레이니어라는 곳을 그 당시엔 전혀 알아듣지 못했지만 나중에 워싱턴주와 만년설 두 가지 단어로 검색한 끝에 알게됐다.(물론 라이언 레이놀즈 앞에선 전부 알아 들은 척 했다.)


tempImagecjDSEV.heic 크루즈 승객들만 있는 한가로운 섬이라니. 이래서 크루즈 크루즈 하나보다.

다음 날은 크루즈 회사가 소유하고 있는 사유 섬인 ‘오션 케이’섬에 정박하는 날이었다. 적당한 해변에 자리를 잡고 파라솔을 펼치려 하니 도통 고정이 되지 않았다. 자리를 바꿔야 하나 고민하는 짧은 찰나, 분명 오른쪽 선베드에서 누워 있던 할아버지가 어느새 남편 옆에 서서 파라솔을 같이 살펴봐주기 시작했다. 할아버지는 이 파라솔은 고장났다며 본인이 직접 다른 파라솔과 바꿔서 설치를 해준 뒤에야 다시 선베드에 누워 잠을 청했다.


이제 신나게 스노클링을 할 차례! 가슴 아래까지 오는 얕은 물에 몸을 담그자마자 내 몸통만한 상어 한 마리가 유유히 옆을 스쳐 지나갔다. 내가 꿈을 꾸는건지 진짜 상어가 여기에 있는건지 어안이 벙벙해서 다시 자리로 돌아오자, 왼쪽 선베드에 있던 커플이 굉장한거 봤냐고 말을 건넸다. 아무래도 상어를 본 것 같다고 답을 하니 나보다 더 신이 나서 아까 저 할머니도 상어를 봤다고 했고 저쪽 있는 커플은 상어를 보고 싶어서 계속 찾아다니는 중이라고 알려줬다. 순식간에 선베드 양 옆 자리 사람들이 모르는 이에서 이웃으로 변신했다.


tempImageD3o4PU.heic 이구아나가 햇볕 쬐면서 조는 모습 보신 분?


오션케이 섬에서의 한나절은 특별한 순간의 연속이었다. 바닷 속에서 상어를 마주쳤고 가오리가 헤엄치는 모습을 봤다. 섬을 한 바퀴 둘러보기 위해 걷고 있을 때 한 아주머니가 다급한 일이라도 생긴 듯 마구 손짓했다. 가까이 다가가니 저쪽에 거대한 이구아나가 있다고 정말 멋지다고 얘기했다. 정말이었다. 오렌지빛의 이구아나가 투명한 옥빛의 바다를 바라보며 햇볕을 쬐고 있었다. 이구아나의 소중한 순간을 방해하지 않으려 다들 멀찍이서 숨을 죽인 채 가만히 바라봤다. 아주머니는 이 신비로운 순간에 한 명이라도 더 참여시키기 위해 산책하는 사람들을 끊임 없이 불러 세웠다.


신기한 일이었다. 섬에서 다시 크루즈로 돌아오는 길에 마주친 사람들은 이제 더 이상 낯설지 않았다. 아까 저쪽 해변에서 상어를 찾아다니던 커플이었고 파라솔을 열심히 함께 펴주던 옆자리 할아버지였다. 미국에서 내 존재는 이방인인데 한국에서 살 때 보다 오히려 이웃이 더 많아진 느낌이었다.


이날 저녁엔 배우 부부에게 신이 나서 스노클링을 하는 동안 어떤 바다 생물들을 마주쳤는지 늘어 놨다. 상어를 얘기했을 때 배우 부부는 정말이냐며 깜짝 놀랐고 나는 그 반응을 예상했다는 듯 크게 웃었다.


새로운 여행을 시작하며


크루즈 여행에서 용기가 좀 생겼다고 하더라도 영어 낯가림은 당연히 그 후에도 이어졌다. 재치 있게 말을 화답하고 싶은데 입 안에서 몇 가지 단어를 우물거리다 그냥 삼켜버리기도 한다. 하지만 이제 낯선 마주침을 피하진 않을 작정이다.


이런 작은 마주침들이 쌓여 나의 세계가 낯선 세계까지 점차 넓어지는 법이니까. 적어도 크루즈 여행에서 만난 이웃 덕분에 내가 가게 될 곳이 하나 더 늘어난 것만은 분명하다. 라이언 레이놀즈의 추천 덕분에 4월 여행지로 마운틴 레이니어에 가기로 정했으니까. 또 한 번 낯선 세계 속에 폭 빠져보련다.

(후기 - 4월 초 마운틴 레이니어는 눈으로 인해 접근이 어려워 안타깝게도 또 다른 워싱턴주의 유명한 국립공원인 올림픽 국립공원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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