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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킷리스트는 오로라입니다

옐로나이프(Yellowknife), 캐나다

by 고라니

영화 ‘버킷리스트:죽기 전에 꼭 하고 싶은 것들’에서 주인공 카터 체임버스(모건 프리먼)와 에드워드 콜(잭 니콜슨)은 폐암 말기를 진단받은 뒤 버킷리스트를 한 자 한 자 적는다.


이들은 함께 스카이 다이빙에 도전하고 카레이싱을 즐긴다. 아프리카 세렝게티에선 사자 사냥을 시도했고 이집트에선 피라미드 꼭대기에 오르기도 했다. 최고급 루왁 커피가 사실 사향 고양이 배설물을 통해 만들어진다는 쪽지를 읽은 뒤 ‘눈물날 때까지 웃기’를 경험했으며 외손녀를 처음 만나 뽀뽀를 해 ‘가장 아름다운 미녀와 키스하기’까지 이룬다. 마지막엔 함께 히말라야 어딘가 커피 캔 안에 봉안되며 ‘장엄한 광경 감상하기’로 모든 리스트를 완수한다.


영화처럼 엄청난 규모의 버킷리스트까지는 아니더라도 누구나 마음 속에 죽기 전 꼭 해보고 싶은, 혹은 가보고 싶은 무언가가 있을 것이다.

가령 일하면서 알게 된 한 과장님은 자신이 좋아하는 달리기를 주제로 책을 쓰겠다는 목표를 갖고 있었다.(많은 관계가 그렇듯 서서히 연락이 끊겨 버려 여전히 동일한 목표를 향해 달리고 있는지는 알 수 없다.) 관심사가 누구보다 잘 맞아 훌륭한 티키타카를 자랑하는 친구 커플은 늘 세계여행을 떠나고 싶어한다.


그렇다면 나는? 언젠가부터 막연하게 오로라를 보고싶다는, 아니 봐야만 한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북극이라는 미지의 대지가 연상시키는 신비로움 때문인지, 오로라의 다채로운 빛깔이 주는 황홀감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아마 어릴 적 덴마크 작가 안데르센의 동화 ‘눈의 여왕’을 읽으며 오로라로 둘러싸인 궁전을 상상해왔기 때문인 것 같다. 혹은 아무도 기억 못하지만 나 홀로 열광했던 2007년 영화 ‘황금 나침반’에서 북극의 오로라가 환상적인 비밀을 담고 있었기 때문인 것 같기도 하다.


이유가 무엇이든, 드디어 언제부터인지도 모를 때부터 꿈꿔 왔던 오로라를 보러 캐나다 옐로나이프로 떠났다.


tempImageZQZ1JC.heic 한 낮의 옐로나이프는 한적하고 고요하다

데네(Dene) 부족의 땅, 옐로나이프


오로라를 볼 수 있는 수많은 도시 중 캐나다 옐로나이프를 선택한 이유는 사실 간단했다. 아이슬란드 등 북유럽은 내가 1년살기를 하던 미국에서 멀었고, 같은 미국 땅인 알래스카는 비행기 표값이 비쌌다. 여기 저기 제하고 나니 오로라를 볼 수 있는 남은 도시는 옐로나이프 정도였다.


다행히도 옐로나이프는 무려 나사(NASA)가 인정한 세계 최고의 오로라 관측지라고 한다.(나사가 언제 그런 발표를 했는지는 알 수 없다. 나사가 인정한 세계 두 번째의 오로라 관측지는 어디인지도 알 수 없다.) 옐로나이프를 다녀온 이들의 블로그에도, 여행 기사에도, 캐나다관광청 블로그에도 3박 체류시 95%, 4박 체류시 98%의 확률로 오로라를 볼 수 있다고 한 목소리로 외쳤다.


아무리 세계 최고라고 하더라도 여행 경비 계산에 마음이 복잡해지던 찰나, 마침 왕복 30만원 가량의 저렴한 왕복 항공권까지 찾아버렸다. 온 세상이 나에게 어서 오로라를 보라고 비단길을 깔아 주는 건가?


tempImageS2QSw1.heic 옐로나이프 공항은 이게 전부다. 정말이다.

미국 애틀랜타에서 캐나다 토론토까지 3시간, 토론토 공항에서 대기 4시간, 다시 토론토에서 옐로나이프까지 3시간 도합 10시간의 이동 끝에 도착한 옐로나이프 공항은 한국 어느 소도시의 고속버스 터미널보다 작은 느낌이었다.


생각해보면 옐로나이프는 인구 2만명 남짓으로 전라북도 고창군보다 더 인구가 적은 소도시다. 공항 한 가운데 자리 잡은 새하얀 북극곰 모형만이 드디어 북극권에 발을 내딛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줬다. 다만 북위 62도로 북극’권’에 맞닿은 것일 뿐 북극은 아니어서 북극곰이 실제로 살진 않는데 왜 이를 옐로나이프 상징으로 내세우는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다.(옐로나이프에서 만난 사람들은 다들 이 곳에는 북극곰이 살진 않는다고 변명하듯 얘기하던데 그냥 옐로나이프에 실제 거주하는 생물을 상징으로 바꾸면 번거로움이 없어지지 않을까. 역시 알 수 없는 노릇이다.)


밤 12시를 갓 넘은 시각에 도착한 탓에 일단 숙소에 짐을 풀고 자는 것으로 첫 날을 마무리했다. 다음날 오전, 본격적인 옐로나이프 여행 시작이지만 낮 시간의 옐로나이프는 불행히도 특별히 할 일이 없다. 다운타운은 1시간, 올드타운은 30분 남짓이면 한 바퀴 빙 둘러 볼 수 있다.


겨울 옐로나이프에선 개썰매와 얼음 낚시 등이 가능하다고 한다. 하지만 영하 5도~영상 1도 사이의 따뜻한? 10월 초에 방문한 탓에 사내를 구경하고 프레임 호수 트레킹 코스를 걷고 책을 읽으며 체력을 비축했다. 그렇게 낮 시간을 느리고 고요하게 흘려 보내며 밤을 기다렸다.


tempImageq9FUPv.heic 옐로나이프 지역 원주민의 삶과 생태계가 궁금하다면 낮시간 동안 '프린스 오브 웨일즈 노던 헤리티지 센터' 방문을 추천한다.

낮의 옐로나이프에서 가장 관심이 갔던 부분은 지역 원주민인 데네(Dene)족의 삶이었다. 데네족은 캐나다 북부의 원주민으로 낚시와 사냥을 하며 살아왔다. 하지만 1990년대 옐로나이프에 금과 다이아몬드가 발견되면서 대규모 개발이 이뤄지자 그들의 자연 환경과 생활 방식에도 변화가 찾아올 수밖에 없었다.


현재 데네족은 자치권을 인정받아 자신들의 문화와 언어, 전통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실제로 다운타운에 위치한 프린스 오브 웨일즈 노던 헤리티지 센터(Prince of Wales Northern Heritage Centre)에선 데네족이 이 지역에서 어떻게 삶을 영위해왔는지 볼 수 있었다.

데네족의 전통 의복, 가죽으로 만든 거대한 배, 곱게 수놓아져 있는 신발은 무척 아름다웠지만 곳곳에 보이던 노숙인들은 아직도 풀어야 할 숙제가 많이 남아있다는 사실을 강제로 알려준다.


tempImageMamy6t.heic 급하게 예약한 터라 선택지가 많지 않았는데 결과적으로 만족스러운 투어였다.

밤의 시간이 시작되면


고요한 낮이 지나고 어둠이 내리 깔리면 이제 오로라의 시간이다. 처음 가보는 도시에서 빛 하나 없는 도로를 달려야 한다는 점이 걱정돼 오로라 투어를 미리 예약했다. 밤 10시~새벽 2시경까지 진행되는 오로라 투어는 옐로나이프를 지탱하는 큰 관광 산업이다.


밤 9시 40분에 호텔 1층으로 내려가자 각자의 투어를 기다리는 사람들로 이미 로비 전체가 가득 차 있었다. 투어 버스가 한 무리의 사람들을 우르르 태워 가고 또 다른 버스에서 몇몇을 데려가니 우리가 예약한 투어사의 버스도 어느새 도착해 있었다.


한국 여행사가 아닌 현지 여행 업체의 투어를 예약한 터라, 캐나다인 혹은 데네족 가이드가 나올 것이라는 예상을 뒤엎고 까만 단발 머리의 동양인 여성이 버스에서 내려 자신을 P라고 소개했다.

한국인인가? 잠시 어리둥절하자마자 내 이름을 제대로 발음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고 일본 혹은 중국인이겠구나 짐작했다. 대포같은 카메라를 짊어지고 있던 앞자리 여성과 중국어로 활짝 웃으며 대화하는 모습을 보고 일본인 선택지도 제외시켰다.


가만 보니 버스엔 이미 한중일 3개국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옐로나이프 공항에서 함께 내렸던 그 많은 세계 각국 사람들은 다 어디에 갔는지 모르겠지만 버스는 한중일 3개국 여행객의 버킷리스트를 위해 내달리기 시작했다.


버스가 이동하는 동안 P는 앞쪽에 서서 마이크를 들고 이 도시를 왜 옐로나이프라고 부르는지, 오로라는 왜 생기는지 등을 설명했다. 슬프게도 각자의 흥분에 휩싸인 한중일 여행객 중 P의 설명을 귀 담아 듣는 이는 거의 없는 듯 싶었다. (P의 설명에 따르면, 옐로나이프 지명은 원주민인 데네족이 사용하던 구리 칼에서 유래됐다. 오로라는 태양풍이 지구 자기장과 만나면서 빛을 발산하는 현상이라고 한다. 대기 중의 산소, 질소 등 분자가 방출하는 빛에 따라 녹색부터 분홍색, 보라색 등 다양한 색상으로 나타난다.)


능숙한 가이드인 P는 이 정도는 예상했다는 듯 가볍게 웃으며 한중일 3개국 여행자들의 미래를 예견?했다.

“오로라가 다채롭게 펼쳐져도 실제 사람 눈으로 볼 수 있는 범위에 한계가 있어서 제대로 색깔이 보이지 않을 수 있어요. 그래서 사진이 중요하답니다. 다들 이따가 제가 보일 때마다 사진을 찍어달라고 하게 될 거에요”


tempImagesiMLtx.heic 오로라가 처음 등장하는 순간의 경이로움을 잊지 못한다.

춤추는 오로라와 함께


빛 하나 없는 길을 20~30여분 간 달렸을까. 주변이 칠흑같이 어두워 숲으로 가는지, 호수로 가는지조차 짐작되지 않던 순간 버스가 멈추고 문이 열렸다. 기다렸다는 듯 다같이 일어나 바깥으로 나갔지만 짙은 어둠 탓에 하늘과 땅과 호수가 한 덩어리로 뭉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걸음마하듯 겨우 몇 걸음 내딛으며 어둠에 적응한 뒤에야 서서히 밤 하늘에 가득 찬 별무리가 보이기 시작했다. 별이 쏟아진다는 표현이 늘 진부하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경험해보니 이보다 더 정확한 표현은 없는 것 같았다.

몇 번이나 별똥별이 긴 꼬리를 드리우며 땅으로 떨어졌다. 이날 마주친 별똥별만 10개가 넘었지만 매번 아름다움을 감탄하느라 소원을 단 하나도 빌지 못했다. 아마 이 광경을 본 것만으로도 소원을 이미 이뤘다고 생각했던 듯도 하다.


영하 5도 가량의 추위에 두 손을 비벼가며 30분 가량 종종걸음으로 하늘만 쳐다보던 중 저 멀리 호수 끝자락에서 뽀얗고 연기같은 무언가가 점차 또렷해지기 시작했다. 핸드폰 카메라를 켜고 사진을 찍으니 희뿌연 연기가 바로 녹색 오로라였다. 오로라는 점점 거대해지며 하늘 일부를 뒤덮기 시작했고 신비스러운 움직임에 한중일 우리 모두는 소리도 내지 못 하고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tempImageKKDzWK.heic 자연에 압도당한다는 느낌이 이런 것일지도 모르겠다.

버스를 타고 이동한 두 번째 장소에선 이미 오로라가 하늘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다들 하늘을 쳐다보고 있을 때 누군가 “와!” 짧은 감탄사를 내뱉었다. 오로라가 물결 치듯, 춤을 추듯 굽이 굽이 흐르기 시작한 것이다.


점점 또렷해지는 오로라 빛은 이제 맨 눈으로도 옅은 초록빛과 분홍빛, 때때로 보라빛까지 구분이 가능했다.(라고 생각했는데 사진 속 또렷한 오로라를 보고 나니, 맨 눈으로 마주한 오로라는 다양한 색상이 아주 살짝 느껴지는 듯한 정도일 뿐이다.) 거대한 오로라 빛무리는 어떨 때는 파도처럼 퍼져나갔고 동물 꼬리처럼 동그랗게 말렸으며 비처럼 아래로 내리 흘렀다. 모든 순간 순간이 경이로울 수밖에 없었다. 이 공간에 있던 모두는 자연이 주는 황홀경에 압도당해버렸다.


바로 이 때 P가 등장했다.

“오로라와 함께 사진 찍으실 분?”

모두가 P에게로 달려들어 길게 줄을 섰다.


tempImagesAeHGY.heic 총천연색 커튼이 너풀거렸다.
tempImageCp3fTl.heic 호수 물빛에 반사된 오로라는 겨울에는 볼 수 없는 여름오로라만의 특징이라고 한다.

영혼의 빛 오로라


한중일 20여명이 북적이던 첫 번째 오로라 투어와 달리, 다음 날은 총 5명 소규모였다. 덕분에 P와 함께 무려 다섯 군데 장소에 방문해 다양한 풍경 속의 오로라를 볼 수 있었다. 그 중에서도 밤의 호수 표면에 오로라 빛이 닿아 거울처럼 반사되는 모습은 눈으로도, 사진으로도 잊을 수 없었다. 하늘의 오로라와 호수의 오로라가 서로를 바라보며 은은하게 빛을 흩뿌렸다.


나는 P에게 매일 새벽마다 오로라를 보면 서서히 지겨워지게 되냐고 물었고 P는 같은 오로라를 본 적이 한 번도 없기 때문에 매번 경이롭다고 답했다. 실제로 P는 그 전날도, 이날도 누구보다 오랫동안 하늘을 올려다 봤다. 그리고 오로라를 향해 나지막히 수많은 종류의 감탄사를 혼잣말로 내뱉었다.


tempImagex0lDzp.heic 천막 앞에서 오로라를 바라보는 우리 부부의 뒷모습을 홍콩에서 온 여행자가 찍어서 보내줬다.

이번엔 P가 내게 오로라에 담긴 전설을 알고 있냐고 물었다. 이제 겨우 옐로나이프에서 며칠 머문 내가 알 턱이 있나. P가 알려준 오로라와 연관된 전설은 두 가지다. 하나는 조상들의 영혼이 춤을 추고 있는 것이고 또 하나는 동물들의 영혼이 놀이를 하고 있는 것이다. P는 둘 중에서 조상의 영혼쪽이 더 마음에 든다고 했고 나는 동물의 영혼이 서로 장난치며 이리 저리 뛰어 다니는 쪽이 더 귀엽지 않냐고 했다.


어떤 원주민 부족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들의 전설에 따르면 고래, 물개와 같은 동물들의 영혼이 하늘에서 서로 놀이를 하고 춤을 추는 모습이 오로라로 보인다고 한다. 여우를 특별한 능력을 지닌 동물이라고 생각하는 어떤 부족은 여우가 바위에 꼬리를 부딪혀 불꽃을 만들어낸 뒤 하늘로 올라가 오로라를 빛나게 했다고 믿는다.


인간들은 오로라의 아름다움을 표현할 길이 없어 사람의 영혼, 고래, 여우 등 다른 아름다운 것에 빗댄 전설을 만들어 냈나 보다. 그제서야 오로라를 바라보는 이 마음의 한 끗이라도 겨우 설명할 수 있다고 생각했나보다.


어느덧 새벽 3시, 누적된 추위에 못 이겨 돌아가려는 때 눈 앞에 작은 여우 한 마리가 나타났다. 기껏해야 팔 길이를 조금 넘길 정도의 작은 여우는 3~4초 정도 가만히 쳐다보더니 한 걸음 껑충 뛰어 풀 숲으로 사라졌다.

역시 내 생각이 맞았던 거였어. 오로라는 동물들이 뛰어 놀면서 빛을 내뿜는 거였다니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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