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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정이 세상을 바꾼다

그레이트 스모키 마운틴 & 게틀린버그, 테네시주

by 고라니


등산로 입구에서 아직 한 걸음 조차 떼지도 못했는데 벌써부터 기분이 팍 상해버렸다.

시작부터 남의 하이킹을 망친 장본인은 입구쪽에 앉아서 등산객을 두리번 두리번 바라보던 한 미국 할아버지였다. 미국에서 마주치는 사람들과 “하이, 하와유”를 나누는게 어느덧 입버릇이 된 게 문제였을까. 할아버지의 레이더망에 어정쩡한 발음으로 인사하는 동양인 부부가 딱 걸려들어 버렸다.


할아버지는 밝은 목소리로 인사한 나를 가볍게 무시하고 옆에 서 있던 내 남편에게 “너 지금 규칙을 위반하고 있는거 아니?”라고 사뭇 진지하게 물었다. 이게 무슨 날벼락 같은 소리람. 돈까지 내고 검사한 MBTI에서 100%에 가까운 J를 자랑하는 내가 낯선 나라 여행지 검색을 소홀히 했을리가 없는데?

사전에 5달러를 주고 계산한 1일 주차권도 차 앞유리에 넣어놨고 쓰레기를 투기한 것도 아니고 무엇보다 아직 등산을 시작하지도 않았는데?


이미 등산을 다녀와서 힘이 빠져버린 건지 바들 바들 떨리던 할아버지 손가락 끝이 가리키는 곳을 쳐다보니 그 곳에는 ‘NO PETS’ 표지판이 붙어 있었다. 아 그렇다. 이 할아버지는 남편에게 반려동물 금지 구역에 왜 나?를 데려왔냐고 물었던 것이었다.


인종 차별인건지 성 차별인건지 그것도 아니면 동물 차별?인건지 3초 정도 고민하던 멍청한 내 얼굴을 앞에 둔 채 할아버지는 신나게 웃어제꼈다. ‘나 자신, 오늘도 찢었다. 아주 재치있었어’라며 속으로 얼마나 신이 났을까. 할아버지가 속으로 자신의 유머감각에 감탄하는 동안, 나는 이 무례한 인간에게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14,000,605개(어벤져스 엔드게임의 닥터 스트레인지에 빙의해 순식간에 각 나라의 욕부터 영상 촬영, 주변 등산객에 알리기 등의 방법들을 떠올렸다)의 시나리오를 돌렸다.


하지만 타노스를 상대로 한 가지 승리할 수 있는 방안을 찾은 닥터 스트레인지와는 달리, 남의 나라에서 영어를 유창하게 하지도 못 하는 동양인이 승리하는 시나리오는 없을 것 같았다. 결국 남편과 나는 “그거 재미 없어요”라고 짧게 말하고 등산로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tempImagegqMG5q.heic 동네 뒷산 아니다. 그레이트 스모키 마운틴이다.

그레이트 스모키 마운틴이 왜?


시작부터 꼬인 듯한 기분을 느낀 채 걸었던 이 곳은 ‘그레이트 스모키 마운틴(Great Smoky Mountaions)’이다. 그레이트 스모키 마운틴은 미국 동부 테네시주와 노스 캐롤라이나주의 경계에 걸쳐 있는 방대한 국립공원이다. 세계자연유산에 등재될 정도의 울창한 원시림은 물론 흑곰 등 다양한 야생동물(곰을 실제로 본 목격담이 가득한 이 곳에서 불행히도 나는 곰 그림자조차 못 보긴 했다.)을 직접 볼 수 있는 곳으로 유명하다.


덧붙여 그레이트 스모키 마운틴은 이상하게 유명한 게 한 가지가 있다. 바로 미국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이 방문한 국립공원이라는 타이틀! 실제로 미국 통계를 보면 지난 2023년 그레이트 스모키 마운틴 국립공원엔 약 1,329만명의 방문객이 다녀갔다. 2위인 그랜드 캐년 국립공원(473만명)보다 무려 3배 이상 많은 숫자다.


이쯤 되면 누구나 동일한 질문을 입 밖으로 꺼내게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랜드 캐년도 있고 옐로스톤도 있고 요세미티도 있는데 도대체 왜?”


다행히도? 이 질문은 한국인만의 궁금증은 아닌 것 같다. 등산을 하기 전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아 구글에 산 이름을 검색해보니 관련 질문에 ‘왜 그레이트 스모키 마운틴이 가장 많이 방문한 국립공원인가요’가 영어로 쓰여 있었다. 미국에서나 한국에서나 큰 대접은 못 받는 것 같은데 왜? 도대체 왜?


tempImagepsVKJx.heic 다시 말하지만 동네 뒷산 아니고 그레이트 스모키 마운틴이다.

다정함 그 기본적인 가치에 대하여


물론 이리 저리 검색해보면 몇 가지 이유를 찾을 수 있다. 먼저 그레이트 스모키 마운틴은 입장료가 무료다. 다른 국립공원들은 입장료를 받고 있기 때문에 서부 국립공원 투어를 계획하는 여행객들은 80달러가량의 국립공원 ‘애뉴얼 패스(Annual Pass)’를 끊고 여러 곳의 국립공원을 여행한다. 반면 그레이트 스모키 마운틴은 하루 5달러의 주차비만 있을 뿐 입장료는 따로 없어 누구나 편안하게 방문할 수 있다.


현지인에게 물어봤을 때 들었던 대답은 위치였다. 미국의 방대한 자연을 떠올리면 앞다투어 선순위로 꼽히는 국립공원들은 모두 서부에 있다. 하지만 동부쪽은 대규모의 국립공원이 상대적으로 적다. 동부쪽 사람들 입장에선 저 먼 곳까지 몇날 며칠을 이동할 필요 없이 단 몇 시간의 운전만으로 훌륭한 국립공원을 돌아볼 수 있는 위치인 셈이다.


이밖에도 미국 원주민들의 유적지를 볼 수 있다, 곰을 직접 볼 수 있다(다시 말하지만, 슬프게도 나만 못 봤다), 인근에 숙박하며 즐길 수 있는 관광도시가 있다 등 여러 이유들을 찾을 수 있다.


위의 모든 이유들은 그레이트 스모키 마운틴을 찾게 만드는 원동력이 맞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찾아낸 ‘1위 국립공원’이 될 수 있었던 이유는 조금 다르다.


그레이트 스모키 마운틴은 다른 어떤 국립공원보다 다정하고 친절하다. 이 곳은 수백개(All Trails 앱 검색 기준 363개)의 등산로가 있어 방문객들이 자신의 상황과 체력에 맞춰 자유롭게 자연을 만끽할 수 있다. 하이킹을 즐기는 등산객이든, 느긋한 산책을 원하는 연인이든, 아이와 소풍을 나온 가족이든 이 산은 자신을 원하는 모든 사람을 각자의 요구에 맞춰 품어준다.


가장 쉬운 등산로에 속하는 로렐 폭포 트레일(Laurel Falls Trail)을 걸으면서 이 생각은 더욱 확고해졌다. 로렐 폭포 트레일은 왕복 1시간 가량으로 짧은데다 거의 평지에 가까워 가장 다양한 사람들이 찾는 등산로 중 한 곳이다. 실제로 아이를 목마 태우거나 유아차에 태운 채 신나게 걸음을 옮기는 가족부터 지팡이를 짚고 조심스레 이동하는 노년의 부부까지 각자의 속도로 각자의 등산을 즐기는 사람들을 볼 수 있었다.(손이 바들 바들 떨릴만큼 힘이 없어 보였던 '노 펫 할아버지'를 이 트레일 초입에서 만났다.)

오며 가며 마주치는 사람들과 반갑게 인사하며 걷다보니 8월의 강렬한 햇빛보다 더 따갑게 내 마음을 찌르던 ‘노 펫 할아버지’를 향한 감정도 어느새 부드럽게 뭉그러졌다.


tempImageM6Bsqk.heic 게틀린버그는 금주법 시대에 탄생한 술인 '문샤인' 시음을 해볼 수 있는 지역으로 유명하다.

등산 후, 게틀린버그로


가벼운 등산 후 1박을 할 소도시인 게틀린버그로 이동했다. 게틀린버그는 그레이트 스모키 마운틴 북쪽에서 차로 약 15분이면 도착하는 곳으로, 그만큼 수많은 등산객과 관광객이 붐빈다. 작디 작은 마을은 무료 셔틀버스가 다니고 도보로도 한 시간 남짓이면 충분히 다 둘러볼 수 있다. 언뜻 별다른 매력이 없을 것만 같은 이 곳의 진가는 의외의 부분에서 빛을 발한다.


그건 바로 ‘문샤인(Moonshine)’

문샤인이란 무엇인가. 과거 미국 금주법 시대에 동부 아팔란치 산맥에 숨어들어 단속의 눈을 피해 달빛 아래 제조한 위스키다. 술의 암흑기라고 부를 수 있는 1920년대 금주법 시대는 문샤인을 만들어내고 스피크이지 바(Speakeasy Bar)라는 비밀 술집을 탄생시켰다. 시장이 음성화된 덕분에? 마피아의 전성기가 펼쳐지기도 했다. 1980년대 영화 '언터처블'의 주인공 알카포네도 금주법 시대가 만들어낸 전설적 마피아이지 않은가. (영화는 러닝타임 내내 밀주를 유통하는 알카포네와 이를 잡으려는 경찰의 대립을 보여준다. 마지막 순간 알카포네의 유죄가 인정되고 1년 후 금주법은 폐지된다.)


여하튼 금주법의 상징 문샤인은 지금은 아팔란치 산맥의 일부인 그레이트 스모키 마운틴 인근 소도시에서 당시를 엿볼 수 있는 효자 관광상품이 됐다. 실제로 게틀린버그엔 문샤인 제조뿐 아니라 직접 시음할 수 있는 가게들이 즐비해 있다. 낭만적인 이름에 취해, 금지된 술이라는 매력에 취해 사람들은 하나 둘 문샤인 가게로 몰려든다.


물론 술이라면 어딜 가도 빠지지 않는 나 역시 오직 문샤인을 마시기 위해 숙소 짐을 풀자마자 미리 점찍어 놨던 가게로 향했다. 이 곳은 5달러를 내면 10~15잔의 다양한 맛과 도수의 문샤인 시음을 해볼 수 있는 가게다. 그 후 마음에 드는 문샤인 종류가 있다면 홀린듯이 지갑을 열어 곧바로 살 수도 있다.


위풍 당당히 가게에 들어가서 5달러를 내미는 나에게 가게 직원은 일단 신분증을 요구했다. 이럴 때마다 사실 약간 당황스러운 감정을 지울 수 없다. 대마에 그렇게나 관대한 미국은 술에 관해서라면 꽤나 엄격하다. 할머니, 할아버지가 술을 구입할 때도 어디선가 득달같이 달려와 신분증을 꼭 확인하는 곳이 바로 미국이다.


미리 예상했다는듯 여권을 내밀고 이제 신나게 마실 생각에 부풀어 있는 찰나, 직원의 한 마디 “와, 당신 정말 OO살이에요? 정말 나보다 나이가 많다고요?” 이어서 남편의 여권을 펼친 뒤에도 “말도 안돼 당신들 이 나이가 정말 맞다고요? 우와”


나도 사람인지라 입꼬리가 슬슬 올라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해외여행을 하는 코리안의 필수품, 전통문양 책갈피 기념품을 나도 모르게 직원에게 건넸다. “어머 참 하하하. 이거 가질래요?”


tempImage5bwoFz.heic 20~60도 사이 다양한 알콜 도수에 다양한 맛의 문샤인을 모르는 사람들과 웃고 떠들며 시음할 수 있다.

낮에 등산로에서 만난 다정한 사람들 덕분에 부드럽게 뭉그러졌던 마음은 이제 완전히 사그라들었다. 생각해보면 낯선 땅 미국에서 모르는 이들의 선의에 기댄 적이 벌써 몇 번이나 있다.


길을 잘못 들어서서 난감해하고 있을 때 먼저 다가와 본인을 따라오라며 안내해 준 사람, 주유소 카드가 인식되지 않아 쩔쩔 매고 있을 때 괜찮냐고 도움이 필요하냐고 물어봐준 사람 등. 미국에서 보내는 시간 동안 많은 일들을 경험할테지만 이런 기억들이 계속 쌓여 나간다는 생각을 하니 기대감이 솜사탕처럼 부풀어올랐다.


그건 그렇고 이제 신나는 시음 시간! 초코커피맛, 호박맛, 바나나푸딩맛, 오렌지맛 등 거의 15잔 정도의 20~60에 달하는 도수의 문샤인을 연거푸 마시고 웃고 떠들었다.


하마터면 망칠뻔 했던 오늘 하루, 작은 다정함과 친절들이 조금씩 내 세상을, 적어도 내 하루를 결국 구해냈네.

캬아 술 잘 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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