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장 난 기분. 오늘은 정말이지 누군가 내 머릿속에 들어와 사고하는 능력을 정지시켜 놓은 기분이었다. 더 이상 화면이 송출되지 않아 지지직하는 소리와 잿빛으로 요동치는 채널과 같았다고 할까. 고장 난 텔레비전처럼 제 기능을 상실한 채 한참을 멍하니 서 있었다. 그러다 겨우 발걸음을 떼어 거리로 나왔다.
내겐 깨지지 않는 익숙한 습관이 있다. 무언가를 시도하기 전에 관성처럼 안될 이유를 찾고, 안될 조건을 붙인다. 이래서 못하고 또 저래서 안되고. 그렇게 '안돼'만 외치다가 접어둔 일들이 얼마나 많을까. 그 머뭇거림과 망설임들이 모여서 완성된 내 모습은 또 어떠한가.
자꾸만 시선이 아래로만 향하는 나와 달리 아이들의 눈동자는 용기로 넘실댔다. 이것도 궁금해요, 저것도 해보고 싶어요, 하며 마치 새벽을 깨우는 해처럼 반짝이는 두 눈들.
오늘은 이상하게도 가슴 뛰게 아름다운 눈길이 나를 따라온다. 내게 눈으로 말을 걸고 내 가슴을 힘차게 두드린다. 누가 말해주지 않아도, 굳이 알려주지 않아도 스스로 제 몫을 살아가는 그 눈'빛' 앞에서 내가 얼마나 초라하던지. 어찌나 부끄럽던지.
나도 그런 눈을 하고서 세상을 바라보던 때도 있었을까. 지난 세월 동안 세상에 나설 수 있는 한계를 빗금으로 그어두고 그 안에 가두고 갇혀 있었던 것 같다. 힘이 들고 버겁다는 이유로 뒤로 물러서는 연습에만 몰두하게 된 것인지 이제는 앞으로 나아가는 방법을 잃어버린 기분이 들었다.
'다시 빛을 찾아야 해.'
자신의 삶을 뜨겁게 사랑하며 살아가는 사람 곁에 있으면 그 기운이 자연스레 옮겨 온다. 그건 어른이나 아이나 마찬가지다.
고장 난 텔레비전도 때로는 툭툭 몇 대 얻어맞고서 곧장 컬러로 가득한 화면으로 돌아오기도 하니까. 다시 삶을 끌어안을 힘을 쉽게 얻을지도 모를 일이다. 앞으로 내 안을 어떤 빛깔로 채워볼까. 이번에는 내가 채운 빛이 아이들에게도 고스란히 전해지기를. 너희들에게 환함을 전해줄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