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장 교사를 발령 순으로 한다고?
학교는 매년 2월이 되면 묘한 긴장감이 돈다. 겨울 방학 중이라 학생도 거의 없는 고요한 학교에서 말이다. 2월 중순 경 각종 휴 복직 교사와 전입 전출 교사의 서류 처리가 마무리되면 새 학년과 업무 담당자 발표가 난다. 물론 발표 전 학년과 업무 희망서를 주어진 양식에 맞춰서 써낸다. 이건 모든 학교가 공통이다. 그런데 세부적인 방식은 학교마다 조금씩 다르다. 현재 내가 근무하고 있는 학교의 경우 학년 희망서에 4 지망까지 기재해 교감 선생님에게 제출한다. 더 자세히 말하자면 각 학년 군(1~2학년, 3~4학년, 5~6학년, 교과)에서 한 학년 씩 4개 학년을 써내야 한다. 예를 들어 1 지망: 4학년, 2 지망: 2학년, 3 지망: 6학년, 4 지망: 교과 이런 식으로 말이다. 이전 학교에서는 학년군 없이 6 지망까지 써내야 했는데 이와 같은 방식은, 결국 내 손으로 써냈기 때문에 어떤 학년에 배정받아도 수긍해야 한다는 걸 의미한다.
업무도 마찬가지다. 업무 난이도에 따라 A, B, C 업무로 나뉘는데 각 난이도마다 하나씩 선택할 수밖에 없도록 규칙을 정해놨다. 해마다 선호하는 학년과 업무로 선생님들의 지원이 몰리기 때문에 이와 같은 방법을 생각해 낸 것이다.
학생 수가 많아 근무하는 교사 수가 많은 학교의 경우에는 학년과 업무 배정에서 조금은 여유가 있는 편이다. 그러나 지금 내가 근무하는 학교처럼 소규모에 속하는 학교의 경우 부담이 되는 학년과 업무를 하게 될 확률이 높아진다. 특히나 부장과 같은 보직 교사 자리가 공석인 경우 울며 겨자 먹기로 보직을 맡을 수밖에 없다.
규모가 큰 학교건 작은 학교건 교육청에서 내려온 공문은 똑같이 처리해야 하기 때문에 단위 학교에 주어진 업무의 종류와 양은 같다. 그래서 지금 내가 근무하는 전교생 400명 정도의 학교에서는 업무 없는 담임교사를 꿈꾼다는 건 불가능하다.
더군다나 요즘은 승진을 원하는 교사가 많이 줄었다. 교장 교감으로의 승진을 원하는 교사에게는 보직교사와 같은 가산점이 필수다. 그런데 승진 자체를 원하지 않으니 굳이 자처해서 가시밭길을 선택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나만 해도 초임 시절 막연하게 품었던 교장 교감의 꿈은 사라진 지 오래다. 학급의 크고 작은 문제를 해결해 가며 일 년을 이끌어가는 것도 버거운데 학교 전체를 관할해야 한다니 생각만 해도 숨이 턱턱 막힌다.
결국 올해 일이 벌어졌다. 기존에 계시던 몇몇 부장님들이 전근을 가면서 비어 있는 교무, 연구, 생활(학폭 담당), 학습연구, 과학 정보, 문예 복지, 체육 부장 등의 자리는 공석으로 남았다. 주말없이 밤낮없이 일을 놓을 수 없는 그 자리를 아무도 자원하지 않았던 거다. 월 15만 원의 부장 수당도, 승진 가산점도 통하지 않았다.
"그러면 이제부터는 본교 발령 순서로 보직교사를 맡겠습니다. 이의 없으시죠?"
내 인생에 부장은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연차가 높아지면 학년부장까지는 어떻게든 해 보겠다고 다짐했지만 특수부장은 꿈에도 생각한 적이 없다. 특수부장을 하게 되면 쏟아지는 관련 공문과 업무가 모두 담당자에게 몰리기 때문에 다들 병을 얻어서 그만둔다고 한 선배교사의 말은 공포였다. 게다가 업무 전담팀(수업 없이 업무만 책임지는 교사 부서)이 있는 학교도 있다는데 이렇게 작은 학교에 발령 나서 담임교사에 특수부장까지 맡는다면 내가 과연 수업과 반 아이들에게 얼마나 열정을 쏟을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나는 1년 6개월 전 이 학교에 전근을 왔고 발령 순서로는 일곱 번 째였다. 1, 6학년 부장까지 총 9개의 자리니까 순서대로라면 나는 올해 부장이다. 이런. 어렵고 힘들다고 나만 피해 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내가 절대 못 하겠다고 끝까지 버티면 누군가는 나 대신 책임을 짊어져야 하는 것 아닌가.
2월의 교직원 회의. 이 날에는 새 학년과 업무가 발표가 난다. 떨리는 마음으로 자리에 앉았다. 다른 선생님들도 긴장된 모습으로 속속들이 과학실에 들어섰다. 곧이어 업무 발표가 이어졌다.
교무부장.. 김○○?
교육과정부장, 정○○?
생활안전부장, 박○○?
어라? 부장 명단에 내 이름은 보이지 않았다.
"막판에 세 분의 선생님이 자원을 하셔서 순번 중 세 분의 선생님은 다음 해로 밀리게 되었습니다."
살았다! 그 순간 부장 자리를 자원해 준 세 분의 선생님이 구세주처럼 느껴졌다.
내년엔 아마 틀림없이 특수부장을 맡게 될 것이다. 그 사실 자체가 부담이지만 그럼에도 올해 일 년은 유예가 된 것에 감사했다. 나는 부장 대신 학부모회 업무를 맡게 되었다. 3학년 담임에 학부모회 담당. 처음 맡는 업무지만 그것이 무엇인들 보직 교사보다는 낫겠다는 생각에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내년은 내년이고, 올해 새로 만나게 될 아이들과 행복한 일 년을 지내기 위한 준비를 시작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