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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슬 Jan 04. 2024

내 동생 탁구

반려견으로 찾아와 내 동생이 되어준 너

  탁구는 내가 중학생 때 갑작스럽게 집에 왔다.


가족은 부모님과 누나와 나밖에 없던 중학생에게는 질풍노도의 사춘기를 겪고 있던 터라 뭐든지 삐딱하고 뭐든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러다 아르바이트를 마친 누나가 집 현관문을 여는 순간 웬 하얀 생명체가 꼼지락꼼지락 거리며 내 눈앞에서 움직이고 있었다. 헐 강아지였다. 그것도 순백색의 얼굴에 검은콩만큼 까맣던 눈, 코, 입이 찍혀있는! 부모님은 물론 놀라서 까무러치셨다. 평상시에 애완동물을 키우고 싶다고 누누이 말씀드리면 당연하단 듯이 단호하게 거절하셨기에 더더욱 우리 집에서 애완동물은 상상치도 못했는데.


자초지종을 들어보니 누나가 아르바이트하던 곳에 같이 붙어 운영 중이던 동물병원에서 유독 귀여움이 많았던 아이가 누나만을 쳐다보며 짧은 다리를 이리저리 움직이며 애교를 부리고 있자니 그 모습이 눈에 선해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둥 마는 둥 했다고 한다.

물론 그 당시 이름은 말랑이었다. 새하얀 몸통에 앙-앙- 거리며 짖는 건지 옹알이를 하는 건지 모르겠는 애교를 부리는 모습이 누가 봐도 말랑이 그 자체였으나, 그 당시 텔레비전에 틀기만 하면 주야장천 방송하던 제빵왕 김탁구가 유행하던 때였기에 어머니께서 맘대로 탁구로 개명해 버렸고 그 이름은 지금까지 그렇게 불리고 있다(사실 탁구라는 이름이 처음에는 마음에 들지 않아 어머니를 제외한 모든 가족들은 말랑이로 불렀으나 이는 점점 탁구의 정체성을 혼란시킬 것이라 판단해서 어쩔 수 없이(?) 탁구라고 부르고 있다..)


탁구라는 이름으로 개명 아닌 개명을 한 이후 탁구는 우리 집의 귀염둥이가 되었다. 그 계기를 들려주자면 새벽 일찍 출근하셔야 하는 아버지를 중학생 아들, 대학생 딸이 과연 거들떠볼 기미가 있을까? 하지만 탁구는 새벽에 출근하는 아버지 앞에 그 앙증맞은 다리를 부랴부랴 달려가서 온갖 애교를 부리며 마중인사를 했고, 하교 후 친구들과 어디 가서 놀 까만을 고민하던 중학생 아들을 집으로 곧장 오게 만드는 것도 모자라, 대학교 친구들과 한창 술자리를 가져야 하는 대학생 딸도 이른 시간에 집으로 돌아오게 만드는 마성의 귀여움을 가졌던 것이다. 어머니는 앞서 말했다시피 탁구라는 이름을 본인이 붙여주셨기에 마치 아들, 딸보다 더욱 애정을 가지고 항상 팔에 아기처럼 감싸 안고 거실을 돌아다니셨다(그 당시 사진을 보면 사진첩에는 탁구밖에 없었다.)


시간은 정말 빨리 흘렀다. 분명 집에 처음 왔을 땐 탁구는 TV 리모컨보다 조금 더 큰 사이즈였는데, 혹여나 움직이다가 밟힐까 노심초사하며 집을 돌아다녔고 또 이거 먹이랴 저거 먹이랴 간식을 주면 자기 입보다 큰 간식을 낑낑대며 케이지로 가져가 아르르 소리를 내며 먹는 그 모습이 눈에 선했는데

1년이 지나니 탁구는 웬만한 강아지 크기만큼 커버렸다. 이게 바로 부모님이 말씀하시는 순식간에 아이들이 커가는 모습을 보는 것인가 싶었다.


탁구는 정말 영리했다. 주위에서 들어보니 배변훈련이 안되어서 성견이 될 때까지도 고생한다던데, 탁구는 어릴 때부터 화장실에 몇 번 들락날락 훈련하고나서부터는 볼일을 보고 싶을 땐 화장실문을 박박 긁어대며 빨리 문 열어달라고 안달이었던 녀석이었다. 그 모습이 얼마나 귀엽고 대견하던지.


하지만 탁구는 그만큼 영리해서 본인의 실속도 제대로 챙기는 녀석이었다. 탁구는 희한하게 잔짖음이 많았는데 밖에서 조금만 소리가 들리면 집이 떠나갈 듯이 짖곤 했다. 단독주택이었다면 탁구가 어떻게 짖 말든 그냥 두었을 텐데, 여기는 공동주택이었기 때문에 우리는 그럴 때마다 탁구 입에 간식을 가져다 대며 다른 관심으로 짖음을 긴급히 종료시킬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물론 이는 우리 가족이 반려견을 처음 키웠으므로 대처방법을 잘못 알았던 것이 가장 크다.) 탁구는 이걸 통해 간식을 먹으려면 짖어야 한다고 학습해 버렸고.. 탁구가 웬만큼 나이가 들어 짖음 소리가 예전보다는 커지지 않을 시점까지 주야장천 짖어댔었다.(다시 한번 주위 이웃들에게 죄송했다는 말씀을 꼭 전하고 싶다.)


탁구는 우리 가족이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어려운 일이 있을 때 항상 내 곁에서 똬리를 튼 채 앉아 사슴 같은 눈망울로 날 쳐다봤다. 그래서 탁구의 눈을 바라보고 있자면 내 모습이 선명하게 비쳐 내가 하고 있는 표정이나 마음속 감정을 거울처럼 바라볼 수 있었다. 고등학생 때 서투른 연애를 하다가 여자친구에게 차여 심란하던 나의 모습, 대학교에 합격해서 세상이 떠나가라 소리를 지르며 기뻐하던 나의 모습, 부모님이 심하게 다투셔서 방문을 닫고 조용히 눈물 흘리던 나의 모습, 공무원 시험을 공부하다가 도저히 안될 것 같아 머리를 쥐어뜯으며 다 포기하고 싶어 하던 나의 모습, 공무원 시험에 결국 합격해서 기쁨의 눈물을 흘리던 나의 모습들....


그렇게 탁구는 항상 내 곁에서 나를 바라봐 주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그냥 내 곁에서 똬리를 틀어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봐 주었다.

탁구에게 다가가 코를 박고 있으면 세상에 이렇게나 폭신하고 고소한 향기가 있을까 싶을 정도로 마음이 편안해지는 순간이 있다. 그럴 때마다 나는 항상 편안함을 느꼈고, 가족들한테는 못하던 내 속마음도 털어놓을 수 있을 만큼 아늑하기도 했다.


그렇게 그렇게 탁구는 나와 함께, 아니 우리 가족과 함께 삶의 동반자 역할을 톡톡히 해주었다.



그리고 2024년 지금, 탁구는 이제 15살이다. 15년의 시간 동안 한 번도 우리를 떠난 적도 없이 묵묵히 가족 곁에서 살아가고 있다.


강아지 나이는 사람나이에 7배 해당된다는데, 계산해 보자면 15년 X 7년이니 약 100살이 넘겨버린 할아버지와 다름없는 것이다.

 

항상 나를 바라봐주던 그 총명하고 새카맣던 눈동자는 이제 하얗게 탁해지고, 내 볼을 건드리며 놀아달라고 앙탈부리던 촉촉하기 그지없었던 코도 각질이 생길 정도로 건조해지고, 한번 시작한 기침은 멈출 생각도 없이 하며, 타지에서 생활 중인 내 사정으로 인해 오랜만에 집에 찾아가면 현관문에서부터 꼬리를  흔들며 맞이해 주는 인사도 이제는 30초면 과분할 지경이다.


아, 시간이 이렇게나 흘렀구나 탁구야. 형한테는 항상 묵묵히 곁에 있어줄 것만 같았던 내 동생 탁구가 이제 할아버지가 다 되었구나.


옛날엔 항상 옆에 있을 줄 알았는데, 이번에 집에 가서 맞이한 탁구에게서 이별할 때가 점점 다가옴을 느꼈다. 조용한 거실에 이부자리를 피고 누워있다가 갑자기 마음이 싱숭생숭해져서 탁구를 조용히 불렀는데 이불속에서 얼굴만 쏙 나와서 저렇게 날 바라봐주었다. 그 순간 말할 수 없는 아련함이 내 몸을 휘감아 나도 적적해지고 말았다. 난 말없이 탁구의 얼굴에 얼굴을 가져다 대고 서로의 온기만을 나누었다.


언젠가, 언젠가 그날이 온다면 탁구에게 못해준 일들이 너무 많은데 지금까지 나와 함께 있어주어서 너무나도 고마웠다고. 그리고 다음에는 더 넓은 집, 더 행복한 가족, 더 나은 형편의 가정에서 널 맞이해서 보살펴주었으면. 바쁘다고 못 챙겨주고, 힘들다고 못 챙겨주고 했던 것들이 생각나 너무 가슴이 아파졌다.


남은 시간이 점점 유한하게 다가오는 시점에서 나는 펫로스 증후군에 걸리면 어떡하지라는 걱정을 해대곤 했는데, 내가 가진 이 감정이 혹여나 탁구를 힘들게 하진 않을까 싶어 모른척하며 눈물을 닦았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탁구는.

하얗게 탁해져 버린 눈을 하고 마른기침을 해대며도 내 다리 맡에서 똬리를 틀고 누워 나만을 바라보며 쓰다듬어 달라고 머리를 내미는 탁구는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형이랑 오래오래 같이 있어주면 좋겠어. 내 사랑하는 동생 탁구야.
사진첩을 켜 탁구를 보며 이렇게 또 그리움에 사무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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