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도 어김없이 대학병원을 들러 기나긴 진료대기 시간을 거친 뒤 교수님과 면담을 하던 날이었다. 교수님께서는 나의 몸 상태 근황을 찬찬히 확인하시더니 어머니께 대구에서 소아당뇨캠프라는 것을 개최하게 됐는데 아이를 한번 보내보는 것은 어떻냐고 물어보셨다. 어머니는 그런 캠프가 존재하는지도 몰랐을뿐더러 어떻게 환자들만 모아놓고 캠프가 진행될 수 있느냐고 반문하셨다.
소아당뇨캠프는 말 그대로 소아당뇨 환자들에게 당뇨지식을 교육할 뿐만 아니라 올바른 식단관리법, 주사방법 등을 가르쳐주고 아이들이 사회에 나갈 준비를 할 수 있는 데에 의의가 있는 캠프였다.
어머니는 주저하셨다. 이때까지 온실 속 화초처럼 눈앞 바운더리 내에 있어야 안심할 수 있었는데 9살짜리 아이를 처음으로 가족과 떨어진 장소로 보내야 함과 동시에 4박 5일이라는 기간 동안은 헤어져 본 적이 없었기에 더더욱 그랬으리라. 의사 선생님께서는 어머니를 설득하셨고 어머니도 언젠가 내가 초등학교를 넘어 중학교, 고등학교, 더 나아가 대학교까지 가는 것을 고려해 보았을 때 지금 경험하는 것도 좋을 것 같다고 고개를 끄덕이셨다.
그렇게 더운 여름이 시작될 즈음. 나의 소아당뇨캠프 신청서는 성공적으로 접수되었고, 대학병원의 집합장소로 발걸음을 옮기게 되었다. 그곳에선 이때까지 나만 겪고 있는 줄 알았던 소아당뇨 환자가 생각보다 많았다는 걸 깨달았다. 모두 내 또래의 아이들이었으며 초등학교 저학년부터 많게는 고등학생까지의 환자들이 있었다.
마치 못 갔던 수학여행을 가는 듯한 설렘도 있었지만, 생전 처음 보는 사람들과 5일이나 지내야 한다는 불안감으로 인해 두렵기도 했다. 그렇게 준비물 리스트를 다시 확인하고 담당 인계 선생님들과의 간단한 인사 후 나는 캠프장소로 가는 버스에 올라탔다. 중간자리의 창가 쪽에 앉아 연거푸 창밖의 어머니와 이모에게 손을 흔들어댔다. 그리고 눈앞에 보이는 건 어머니와 이모의 대성통곡... 참 지금 생각해도 몇 년 동안 못 볼 듯이 대성통곡을 하고 계셨는데 슬프기도 했지만 한편으로 픽하고 웃음도 나왔었다.
버스를 타고 도로를 이리저리 지날 때, 내 옆에 있던 친구에게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어디서 왔는지, 너는 몇 형 당뇨인지, 주사는 무엇을 맞는지, 학교는 어디 다니는지 등등 그렇게 어느 정도 친분을 쌓았을 때 우린 팔공산에 있는 교육연수원에 도착했다.
출처 오마이뉴스캠프장의 위치는 '팔공산 마음이 자라는 학교'였는데, 지금 브런치에 글 쓰는 이 시점에서야 이 건물의 이름을 처음 알았다.
여하튼, 우린 도착 후 조를 나누어 인솔 선생님의 지도를 따라 방에 도착 후 짐을 풀었다. 조 인원은 10여 명의 아이들과 인솔 선생님으로 구성됐는데, 아니나 다를까 나이대가 다양해서 그런지 몰라도 도착하자마자 엄마가 보고 싶다며 울음을 터트리는 아이들도 눈에 보였다. 선생님이 열심히 달래 보았지만 이미 눈물샘이 터진 아이는 쉽게 울음을 그치지 않았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아이는 힘에 부쳐 입을 꾹 닫고 시뻘게진 눈으로 고개만 처박고 있었다. 분위기 변화가 필요하다고 판단한 선생님은 우리를 데리고 건물 한가운데 있는 강당으로 데리고 가셨다. 그러자 그곳엔 넓디넓은 공간이 우리를 반겨줬는데 무엇인가 처음으로 느껴보는 기분이었다. 이곳에서 5일 동안 어떻게 지내야 하지라는 고민은 눈 녹듯이 사라졌으니까.
그리고 1층엔 혈당을 체크하고 그 결과를 가지고 담당 주치의 선생님과의 면담 후 주사를 지금 놓을지, 혹은 밥을 먹고 놓을지 체크해 주시는 보건 선생님들이 계셨다.(아마 의과대학 쪽 사람들이었던 것 같다. 다들 나이대가 젊으셨기 때문에)
또 환자들마다 책 한 권이 주어졌는데 책에는 당뇨의 올바른 이해와 주사방법, 그리고 추후 조치방법에 대한 글이 즐비했었지만 초등학생에게 깨알 같은 글은 눈에 들어올 리가 없었다. 다만 맨 마지막 장에는 5일 동안 규칙적인 시간에 혈당에 따라 스티커를 붙일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되어 있었는데 저혈당은 노란색, 정상범위는 초록색, 고혈당은 빨간색으로 스티커를 붙여야 했다. 초록색 스티커가 많이 붙을수록 관리가 잘 된다는 의미였지만 노란색 스티커를 받으면 혈당을 올려야 하므로 간식을 받아갔다. 결국 너도나도 무리해서 혈당을 떨어트려 간식을 먹으러 오는 사태까지 발생하기도 했다. 물론 그 직후 단체로 저혈당의 위험성에 대한 교육시간도 추가됐지만...(어린이들의 합동심은 대단했다.)
불행히도 만약 밥시간이 다 되어서도 혈당이 고혈당이라 빨간색 스티커가 붙어버린다면, 그 환자는 바로 밥을 먹지는 못하고 주사를 맞은 뒤에 혈당이 정상으로 내려가기만을 기다렸다가 식당으로 가야 했다. 그것 때문에 우는 아이들도 숱하게 봤었더랬다.(그중 몇몇은 나도 해당이 됐었다.)
둘째 날이었나, 조에 속한 아이들과 어느정도 통성명도 하고 누나, 형들과도 애니메이션이나 축구얘기를 하며 어색한 분위기를 깨고 있었는데 위에서 언급한 엄마한테 가고 싶다고 투정 부리던 아이와 만큼은 부쩍 친해지지 못하고 있었다. 초등학생 1학년이었는데, 뭐만 하면 툴툴대고 선생님이 필기구를 나눠줘도 씩씩대며 던져버리는 그야말로 내가 제일 싫어하는 부류 그 자체였던 것이다. 그래서 그런가 나도 그 녀석에게 좋은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그 애가 선생님에게 한창 생떼를 부릴 때 옆을 지나가며 무심코 "그냥 집에 가지 왜 이곳에 왔냐"라고 퉁명스럽게 한마디 했다.
퍽
엥? 갑자기 내 배를 발로 차는 것이 아닌가? 9살의 아이는 싸움을 해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갑작스러운 공격에 어안이 벙벙해져 그 애를 홱 하고 쳐다봤더니 나보다 1살 어린 조그만 아이가 앙칼을 부리며 내 머리와 배를 사정없이 때리는 것이 아닌가! 난 너무나 당황한 나머지 말도 한마디 못하고 맞고 있다가 갑자기 너무 억울해졌다. 그래서 나도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무력을 썼다. 사실 말은 거창하지만 꿀밤을 꽉 쥐고 머리에다 휘둘렀고, 한 10초 정도의 시간이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선생님이 뜯어말리며 사건은 일단락됐다.
난생처음 겪어보는 육체미 소동에 그만 눈물이 나올 듯 말 듯했다. 아니, 내가 뭐 잘못 말한 것도 아닌데 너무한 거 아니야? 근데 이미 상대방은 눈물을 펑펑 흘리며 바닥에 나라 잃은 백성처럼 쓰러져있었다.
그러자 이내 안쓰럽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채우기 시작했고,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배려인 케로로(개구리중사 케로로라는 만화가 있었다.)를 그려주며 눈이 퉁퉁 부은 아이를 위로해 주었다. 결국 그 아이와는 마지막날까지도 호형호제하며 지냈다나 뭐라나.
그 후에도 노란색 스티커를 받고 싶어서 무리한 것인지, 강당에서 친구들과 고무비치볼로 축구랍시며 이리저리 뛰어다니다 기억이 뚝 끊겼다.
그렇다, 또 또 저혈당 쇼크였던 것이다.
무엇인가 정신없이 지나가고 엄청 많은 사람들이 내 팔다리를 붙잡는 느낌이 나서 막 발버둥을 쳤었다. 잠시 후 정신이 돌아오며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니 선생님들과 주치의 의사 선생님께서 날 내려다보고 계셨다.
순간 혈당이 30을 찍었던 것이고(정상인은 100~110을 유지한다. 80으로 내려가는 순간 인지능력이나 판단능력이 저하되기 시작한다), 내 팔뚝엔 링거가 꽂혀있었으며 포도당 수액이 몸속으로 흡수되고 있었다.
아이고 창피해라, 난 도대체 몇 번이나 이런 저혈당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그런데 놀라운 광경이었다. 이제껏 그런 경험을 한 후에는 담임선생님의 날카로운 고함이 당연하다는 듯이 뒤따라 왔기에 난 온몸에 긴장을 풀 수 없었지만 오히려 다들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잘 잤냐며 이제 밥 먹으러 가야 하는데 너만 늦었다며 다들 하하 호호 웃기에 그지없었다.
그렇다. 이곳은 소아당뇨캠프고 나뿐만이 아니라 다른 아이들도 긴급상황이 벌어지는 건 부지기수였음에 다들 이에 대한 준비가 철저했고 조치 또한 완벽했던 것이다. 나는 색다른 경험을 한 기분이었다. 아, 오히려 사람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대해주니 나도 창피함을 넘어서 이제 이런 상황이 벌어지기 전에 선 조치를 해야겠다는 다짐을 할 수 있구나라고.
이것이 소아당뇨캠프가 추구하는 최종적 목표가 아닐까 싶다. 아이들에게 긴급상황은 언제든지 벌어질 수 있으며 이를 배우고 대처하기 위해 이 캠프가 개최되는 것이라는 걸. 실제로 그 사건이 벌어지고 나서 나는 선생님들과 앉아 대처방법을 배우고, 혹여나 혈당이 너무 높아지면 어느 부위에 주사를 어느 각도로 놔야 아프지 않게 혈당을 내릴 수 있는지도 알게 되었다.
대망의 5일 차가 되던 날. 그동안의 추억이 눈앞에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3일째 되던 날 친구들과 뛰어놀다 비가 억수같이 오는데도 잔디밭에 누워 내리는 비를 다 맞아보기도 하고, 산 속이라 매미와 사슴벌레도 직접 보며 만져보고, 4일째 되던 날 가족들과 함께하는 당뇨교육을 받으며 부모님과 재회하고, 장기자랑에서 우연히 끌려나가 1등을 해버리는 바람에 자명종 시계도 받아보고.
나도 이런 성취감을 느낄 수 있구나, 또한 나뿐만이 아니라 같은 처지의 환자들도 이런 성취감을 얻을 수가 있구나라는 것을 느끼며 이 단체에 대한 소속감을 갖게 되었다. 정말, 그 캠프가 아니었다면 나의 사회생활 숙련도는 상당히 낮았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캠프를 통해 사람들을 상대하는 법도 알게 되고, 스스로 비상상황에 따른 조치 방법도 배우게 된 이상 일상생활로 돌아가는 것에 대한 두려움은 확실히 많이 줄어들었음을 깨달았다.
다시 짐을 둘러메고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에 탑승한 뒤, 그 짧은 순간이었지만 조장 선생님과의 뜨거운 포옹을 하며 내년에도 보자고 굳은 약속을 하기도 했다. 우리는 다시 대학병원에 도착했고 속속히 부모님의 품으로 돌아가며 그렇게 한여름날 소아당뇨캠프는 마무리되었다.
지금도 소아당뇨캠프를 하는지는 솔직히 잘 모르겠다. 그러나 첫 번째 캠프의 추억 때문일까 나는 고등학교 1학년이 될 때까지 소아당뇨캠프를 다녀왔다. 물론 중학생이 넘어가기 시작하며 내가 최고참이 되었으므로 오히려 저학년들을 데리고 다니는 조장 역할을 하기도 했다. 그렇게 사회 속으로 스며들 준비를 모두 마친 것이다. 이리저리 탈도 많았지만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그조차도 소중한 추억이었다.
매미소리가 찢어지게 들리던 그 여름날에 만나는 소중한 인연들, 그 여름에서만 느낄 수 있던 습도와 비 냄새, 강당에서 울려 퍼지던 아이들의 웃음소리와 음악소리. 이제 어른이 되어서는 그 감정을 느낄 순 없지만 가끔씩은 한없이 웃고 뛰어놀던 내가 그립기도 하다. 그때만큼은 정말 건강한 아이로서의 즐거움이 아니라, 당뇨환자이지만 이렇게 즐겁게 지낼 수도 있다는 추억이 가장 소중했기 때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