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학년 당시의 일이었다. 오늘도 어김없이 과학수업을 위해 우리 반은 과학실로 이동하였고 진도 빼기에 바빴다.
이제 학교생활은 어느 정도 자신감이 많이 붙었다. 저혈당쇼크로 선생님들의 걱정을 도맡아 챙기던 갓 전학 온 어린 꼬마아이는 벌써 초등학교 6학년이 되었고 이제 어느 정도의 혈당 상황은 통제가 가능할 만큼 능력치도 쌓였다. 물론 주위 친구들에게 하나하나 붙잡고 내가 당뇨환자라는 걸 어필하지는 않았다.(그들에게 나는 단지 아픈 아이일 뿐이지 특별한 아이는 아닌 존재였으니까)
그래서 쉬는 시간마다 혈당체크기를 꺼내 손가락에 핏방울을 내고 기계에 갖다 대고 있으면 반 아이들이 신기하다는 듯이 몰려와서 보기도 하고, 자기들 혈당도 알려줄 순 없냐며 손가락을 이리저리 눈앞에 가져다 대는 일도 있었다. 하지만 난 그럴 때마다 혈당체크기에 있는 채침은 내 피만 묻어있어야 한다면서 어머니에게 배운, 혹은 당뇨캠프에서 배운 지식을 반 아이들에게 일일이 설명하곤 했다.(내 당뇨에 관심을 가진 아이들에 한해서)
반 아이들과 과학시간을 마치고 반으로 돌아오던 순간, 혈당이 조금 떨어지고 있음을 자각했다. 난 반으로 올라가 다음 종이 치기 전에 초콜릿을 하나 먹어둬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내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실로 어이없었는데, 내 가방이 책상 위로 올라와있고 지퍼가 모두 열려있음과 동시에 나의 비상식량들이 빈 껍질만을 나풀나풀거리며 흩트려져 있었다. 아뿔싸. 소위 반에서 조금 잘 나간다는 '일진'아이들이 삼삼오오 모여 내 비상식량을 남김없이 다 먹어치운 것이다.
"야, 왜 너만 초콜릿 먹는데? 친구들한테는 주지도 않고 너무 양심 없는 거 아니냐? 그래서 같이 나눠먹었다. 불만 없제?"
그 한 마디에 순간 어안이 벙벙해져서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이윽고 수업 종이 울렸고 너무 억울 했던 나는 정말 나만 수업시간에 군것질을 먹는 것이 그렇게나 친구들의 심기를 건드린 일이었나라고 고민에 빠졌다. 근데 이건 단순한 군것질이 아니라 내 생명을 위한 최후의 방어수단인데...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무느라 수업은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그러나 어쩌겠나, 지금 내 비상식량은 바닥났고 오후수업도 있는 와중에 혈당이 어찌 될지 알고 도박을 할 순 없는 노릇이었다.
난 담임 선생님께 가서 사실대로 말씀드렸다. 단순한 고민인 줄 아셨던 선생님은 내가 상황을 설명하면 할수록 눈동자가 점점 커지셨다. 그러곤 들고 계시던 종이가 일그러지는 것을 보았다. 아마 후에 벌어질 상황을 대변하는 것처럼.
종례시간이 되었다. 다른 반 선생님들은 반으로 들어가 아이들의 하교 준비를 하셨지만 담임 선생님은 들어오시지 않았다. 동시에 내 비상식량을 먹어치웠던 아이들 또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아마 잔소리 듣고 있겠지.
잠시 후 반아이들과 담인 선생님이 동시에 교실로 들어오셨고 선생님은 화가 가라앉지 않으신 듯 씩씩 소리를 내시며 반아이들을 집중시키셨다.
"자 지금부터 우리 반이 명심해야 할 것이 하나 있어. (내 이름) 일어나 볼래? 자 친구는 다른 건강한 사람들과는 다르게 소아당뇨라는 병을 하나 갖고 있어.
겉으로는 티가 잘 안 나고 남들이 보기엔 그냥 건강한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어. 그렇기 때문에 친구는 언제 어디서나 병이 심해질 수가 있는 거야. 감기에 걸리면 감기약을 먹고 몸살이 걸리면 수액을 맞듯이 이 친구도 적재적시에 약을 먹어야 하는 거야.
그래서 이 친구 가방엔 항상 당을 올릴 수 있는 비상약이 있는 거야. 오늘은 다른 친구들이 그 상황을 제대로 몰랐던 것 같아서 넘어가지만 오늘부로 다시 이런 일이 발생한다면, 아픈 친구를 괴롭힌다는 것으로 인지하고 엄중하게 조치할 거니까 명심하도록 하자.
오늘 친구의 비상약을 없애버린 벌에 대해선 똑같은 비상약을 선물해 주는 걸로 마무리할 테니까 그렇게 알고. 만약 선생님의 조치가 불합리하다고 생각하다면 언제든지 선생님에게 상담을 요청해. 그럼 하나하나 설명해 줄 테니까 알았지?"
"네!"
반아이들의 단합된 대답이 교실에 울려 퍼졌고, 종례 후 내 비상약을 훔쳐먹었던 아이들이 다가와 진심으로 미안했다며 사과했다. 그러곤 정말로 다음날 똑같은 종류의 사탕과 초콜릿을 사서 나에게 선물해 주었다. 나도 친구들이 모르고 그랬고 내가 건강한 아이였더라도 오해했을 수도 있었겠다라며 친구들을 용서해 주었다.
난 이 사건으로 인해 당뇨환자들에 대한 인식이 일반인들 사이에선 아직도 상당히 부족하다는 교훈을 얻게 되었다.
실제로 그 당시만 하더라도 소아당뇨환자의 비중은 기존 당뇨환자들의 분포 중에서도 많이 낮았었고 이와 관련된 교육 혹은 캠페인, 사람들의 인식이나 경각심도 많이 낮았을 때니까 더더욱이 그랬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