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혈당 쇼크의 굴레
아이는 스스로 콜라를 마시지 못했다.
나는 철저한 관리의 대상이 되었다. 특히 몸을 쓰는 활동이라면 더욱 많은 관리가 필요했기에, 담임선생님이든 부모님이든 내가 나가서 무엇인가 활동을 하려고 하면 일단 "하면 안 된다"는 식의 권고 아닌 권고를 하셨다.
하지만 이제 9~10살의 초등학생에겐 숨길 수 없는 폭발적인 기운이 있었기 때문에 나는 그런 권고가 들려올 때마다 몸서리치며 무조건 활동에 참여할 거라고 선언했었다. 실제로 내가 이런 반응을 갖게 된 이유 중에 가장 큰 계기는 바로 현장체험학습을 제대로 간 적이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특히 대구 내에서의 현장체험학습은 부모님에게 울며불며 사정해서 겨우겨우 갈 수 있었다 해도 타 지역으로 다녀오는 현장체험학습은 그림의 떡이었던 셈이다.
한 번은 학교에서 도산서원(안동)에 현장체험학습을 간다고 가정통신문이 뿌려졌었다. 나는 학교에서 통신문을 받아 들자마자 반아이들과 도시락은 무엇을 챙겨 올지, 버스 자리는 어느 곳을 앉을지 재잘재잘 떠들며 한껏 기대에 부풀어 있었더랬다. 허나, 부모님은 완강하셨고 나의 건강이 우선이라는 우려 섞인 말로 나의 현장체험학습을 막아서셨다.
얼마나 울었을까, 가뜩이나 반아이들과의 케미가 좋아서 마치 내가 건강한 사람이라고 착각할 만큼 행복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는데 이럴 때마다 내가 정말 큰 병에 걸렸구나라는 것을 상기시키게 되었으니...
그때부터 나는 컴퓨터 사용법을 익혔고, 사진 합성하는 방법을 홀로 터득해서 반아이들이 찍힌 현장체험학습 사진에 내 모습을 합성시키곤 했다. 그게 그 나이대의 아이에게는 가장 위로가 되는 행동이었을 테니까.
2004년 한여름
내 담임선생님께서는 인상만 봤을 땐 무뚝뚝하고 험상궂게 생기셨다.(처음으로 남자 선생님이 담임이라는 것에 적잖이 당황해서 그런 편견이 생긴 것 같다.) 매학년이 올라갈 때마다 부모님과 나는 담임 선생님과의 면담을 거쳤고, 주의사항이나 조치방법에 대해서도 어머니는 마치 교수님이라도 된 듯이 담임 선생님께 설명하셨다. 근데 이번엔 좀 달랐던 게, 이번 담임 선생님께서는 수첩에 적지도 않으시고 그저 고개를 끄덕거리시며 나를 지그시 쳐다보기만 하셨다.
어렴풋이 처음으로 초등학교에 입학했던 날이 떠올랐다. 이 어색함과 이질감. 전에 만났던 선생님들은 모두 인자한 표정으로 혹은 머리를 쓰다듬어 주시면서 나에게 아늑함을 선사했다면 이번 담임선생님께서는 그런 느낌이 보이지 않아 덜컥 겁부터 먹어버린 것이다.
자, 이제 본격적인 사건을 이야기해 보자면 아까 위에서 말한 것처럼 나는 현장체험학습도 참여하지 못했고, 웬만한 체육활동이나 야외활동에 대해서도 많은 제약을 받았다. 결정적인 것은 전 학년이 1박 2일으로 스키장을 다녀오는 일정에는 아예 이름조차 올리지 못했다는 것이다.
너무나 억울했고 분노스러웠다. 그 조그만 아이가 무슨 죄가 있다고 이렇게나 날 억압하고 제약하는 것인지 그 당시엔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다 한여름 일이 터졌다. 그날은 토요일이었고 오전수업만 하면 집에 갈 수 있는 날이었다. 그때당시만 해도 놀토란 개념이 없었기에 사실 수업은 거의 없다시피 했고 단지 자율활동 혹은 간단한 야외활동만을 하다가 집에 가는 날이었다.
그날은 날씨가 좀 더웠지만 이미 스케줄상 야외에서 쓰레기 줍기 활동이 잡혀있었기에 우리 반은 다 같이 운동장으로 나가게 되었다. 그러곤 다들 손에 하나씩 검은 봉투를 들고 운동장을 돌아다니며 너도나도 승자의 전리품처럼 쓰레기를 주워 담기 시작했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자유였다. 다행히 오전 수업이 끝나자마자 어머니가 학교 앞에서 기다리고 계신다는 말을 들었기에 이 정도 활동은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거진 활동이 마무리되고 교실 건물로 들어가려는 찰나에 어머니가 날 부르시는 소리가 들렸다. 어머니는 이미 30분 전부터 오셔서 날 기다리고 계셨고, 선생님께선 그래 활동도 마무리됐겠다. 바로 하교해도 된다고 하셨다. 하지만 앞서 말한 기억들 때문일까. 나도 모르게 오기가 생긴 나머지 반아이들과 다 같이 하교하겠다고 어머니에게 답했고, 뭐 길어봤자 10분 정도의 시간만 지나면 집에 갈 수 있으니 나도 어머니도 선생님도 안심했던 것 같다.
교실로 올라가 가방을 싸고 친구들과 하하 호호 웃으며 주말엔 뭐 할 거냐고 얘기를 나누던 그때였다. 갑자기 말이 어눌해지기 시작하고 가뜩이나 더워서 땀도 많이 흘렸는데 식은땀이 거기다 덧입혀서 줄줄 흘러내렸다.
이런 적이 처음이 아니었기에 나는 가방 속에 넣어두었던 베지밀 두유를 꺼내 들었다. 선생님께선 하교하자며 반아이들이 정문으로 빠져나가는 모습을 보러 함께 나오셨는데 하필 나의 모습을 미처 알아차리지 못하신 것이다.
두유에 힘겹게 빨대를 꽂으려고 했지만, 애석하게도 빨대는 구부러지고 초점이 빗나가 두유 스트로 입구에 안착되지 못했다.(그냥 두유 상단을 뜯어먹으면 되지 않냐고 말하지만 실제로 당뇨환자들이 저혈당 쇼크가 오면 인지능력이나 판단능력이 현저하게 낮아지면서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반복한다.)
그렇게 나의 기억은 거기서부터 흐릿흐릿해지기 시작했다. 계단을 걸어내려 가는지 날아가는지 아무 기억도 나지 않았다. 오직 머릿속에는 어머니에게 두유 좀 먹게 해 달라고 하는 방법 말고는 떠오르지 않았다. 터덜터덜 후들후들 떨리는 다리를 이끌고 1층으로 내려오자 저 건너편에 어머니가 서계셨고 손을 흔들고 계셨다.
털 썩
그게 마지막 장면이었다.
입에 무엇인가 들어온다. 달달한 액체인 것 같은데... 이건 콜라다. 시원한 콜라가 내 목을 타고 넘어가 칼칼한 탄산을 몸 이리저리 터트리며 흡수된다. 무슨 영문인지 몰라 일단 들어오는 콜라를 곧이곧대로 마셔댔다. 잠시 후 시력이 점점 돌아오며 흐릿했던 내 의식도 명확해지기 시작했다.
아, 또 저혈당 쇼크였구나. 어머니는 나의 손을 붙잡고 무릎 꿇고 계셨고 담임 선생님은 두 눈이 시뻘게져서 눈가가 촉촉해진 채로 내 입에 조심스럽게 콜라를 먹이고 계셨다.
전후사정을 들어보니, 내가 어머니의 눈앞에서 불과 10m도 안 되는 그곳에서 뒤로 넘어갔단다. 그러곤 친구들이 달려와 선생님을 모셔왔고 선생님은 뒤늦게 날 확인하고는 곧바로 어머니에게 뭐든지 단 음식이면 되냐고 물어보신 뒤 초등학교 건너편의 문구점으로 달려가셨다고 한다. 실제로 그 문구점까지 가려면 왕복 8차선의 도로를 가로질러야 하며 바로 옆에 육교가 있지만 그걸 생각하기엔 너무 늦는다고 판단하신 것 같다.
선생님은 본인의 목숨을 걸고 8차선의 그 넓디넓은 도로에 몸을 던지셨다. 누구보다 빠른 속도로 500ml 콜라를 쥐어와서 곧바로 내 입에 물린 것이었다. 불과 1분도 안 되는 시간이었지만 어머니와 선생님에게는 영겁 같은 시간이었으리라.
그렇게 의식이 돌아오자 어머니는 날 챙기시고 차에 태워 곧바로 집으로 돌아오셨다. 친구들이 차에 타는 그 순간까지도 괜찮냐고 소리치는 모습에 적잖이 감동하여 있는 힘껏 손을 흔들어대며 인사했다.
주말이 지나고 다시 월요일이 되었다. 또 말괄량이 초등학생은 지난 토요일의 사건은 까마득하게 잊어버린 채 교실에 들어와 선생님께 해맑은 미소로 인사를 건넨다. 울려 퍼지는 고함소리. 또 옛날 기억이 상기되어서 그런 것일까. 난 석고상처럼 멈춰버렸고 선생님께서는 당장 본인의 자리에 와서 가방을 올려보라고 하셨다.
가방을 이리저리 살피시더니 사탕과 초콜릿의 위치를 모두 파악하시고는 나의 손을 꽉 잡으시면서 말씀하셨다. 나중에 어른이 되면 더욱 힘들 때가 많을 거고, 지금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하지만 지금 무슨 일이 터진다면 그대로 끝이라고. 그렇기 때문에 지금부터 몸관리를 스스로 철저하게 해야 하고 그 누구도 뭐라 하지 않으니까 수업중간이든 언제는 혈당이 떨어진다는 느낌을 받으면 그 자리에서 비상식량을 먹으라고.
선생님의 중후한 목소리가 내 맘을 후벼 팠지만, 그제야 내가 선생님을 매우 힘들게 하고 있었구나를 깨닫게 되었다. 얼마나 그 작디작은 아이가 걱정되었을까. 본인의 눈앞에서 금방이라도 숨이 멎을 것처럼 생기를 잃어버린 아이를 보자 본인께서도 터질 듯한 감정이 몰려왔던 것이다.
물론 그날 하루동안은 선생님께 괜스레 서먹해져 인사도 하는 둥 마는 둥하며 하교했지만 집에 돌아와 일기를 쓰려고 할 때, 선생님의 진심을 진정으로 알게 되었고 그대로 일기장에 적어나가기 시작했다.
나는 어쩌면 그때부터 항상 내 몸상태는 남들의 시선을 받고 있고, 섣불리 내가 원하는 대로 혹은 마음 가는 대로 독단행동을 하면 안 된다는 생각이 머릿속에 서서히 자리 잡기 시작했다.
즉, 일종의 강박이란 씨앗이 내 속에서 새싹을 틔워 쑥쑥 자랄 준비를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