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과 함께 52주 프로젝트
사태가 심각해짐에 따라서 회사가 일주일 정도 재택근무를 실시했다. 재택을 처음 해보는 인간이라 시행착오가 너무 많았는데, 일단 집에 업무를 위한 공간의 부재가 가장 심각했다. 집에 있는 거라곤 고작 카페에서 쓸법한 둥근 탁자와 작고 딱딱한 스툴이 전부였는데, 나는 집에서 작업을 하게 될지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던 터라 등받이 의자도 없이 업무를 봐야 했다. (의자는 미리 좀 살걸 그랬음) 집에 있는 거라곤 고작 15년 구형 13인치 맥북 레티나 프로… 그것도 개인 장비. 회사에서 사용하는 아이맥을 도저히 들고 집까지 올 수 없어서 27인치 듀얼 모니터만 이고 지고 집까지 왔다. (정말 끔찍한 경험이었음)
어찌어찌 있는 공간을 요리조리 고민해보고 나서 재택근무를 위한 공간이 만들어졌다. 그래 봐야 스툴에 앉아서 하루 8시간을 일해야겠지만… 일단 왕복 두 시간의 출퇴근 시간이 없어진 것만으로도 감지덕지해야 했다. 우리 회사는 9시 출근인데, 침대에서 8시 40분에 눈을 떠도 됐다! 느지막이 일어나서 깨끗하게 씻고, 물 마시고 컴퓨터를 켜면 8시 55분. 9시에 슬랙으로 아침인사를 하고 5분 후 콜로 일일 업무 진행 예정 회의를 했다. 회의가 끝나면 이제 간단하게 아침을 먹으면서 할당된 업무 리스트를 확인하면서 효율적으로 시간을 배분하고 일을 시작한다. 어 이거 나름 할만한데? 싶었다. 인터넷에 돌아다니는 재택근무 썰들을 보면서 다들 어떻게 하나 싶었는데, 무엇보다 스스로 규칙을 세우고 최대한 (심리적으로) 공간 분리하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래에는 내가 재택 하면서 세워둔 가이드이다.
규칙적인 생활을 하라.
점심시간/휴식시간을 최대한 지켜라 (메신저 꺼놓고, 온전히 휴식에만 집중)
항상 청결을 유지해라. 꼬질 하면 우울해지기 쉽다.
방은 항상 깨끗하게 청소하고 환기를 잘 시켜라.
인스턴트를 줄이고 건강한 식단을 유지해라.
중간중간 스트레칭을 하면서 몸을 움직여줘라.
침대에서 일하지 마라.
좋아하는 노래들을 브금으로 깔아놓고 업무를 진행해라. (개인의 취향)
스스로 세워놓은 규칙만 잘 지켜도 재택근무는 충분히 할만했다. 작은 자취방이라 공간이 분리되지 않아 침대의 유혹은 뿌리치기 힘들었지만 싫어하는 사람들의 얼굴을 보지 않고 루즈해지지 않기 위해 노력하다 보니 나름 일의 능률도 오르고 괜찮은 경험이었다. 슬랙에 있는 콜 기능을 사용해서 출근 후, 퇴근 전 일일 회의 진행하는 것도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고, 업무 보고도 바로바로 진행하면 되니까 막히는 것도 따로 없었다. 이 정도면 미래의 근무환경으로 봐도 되지 않을까? 굳이 비싼 임대료 지불해가며 사무실을 만드는 것도 비효율적이고, 나도 그렇다면 굳이 먼 서울에서 살인적인 집세를 부담하고 자취를 하지 않아도 되니까! 이 상황을 계기로 재택근무에 대한 거부감이 많이 줄었으면 좋겠다. 사실 재택근무 더 오래오래 하고 싶어.
아 물론 이렇게 말해도 갇혀있는 건 싫다. 아싸도 집순이도 자발적인 게 좋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는 요즘, 어디 나가 놀고 싶은 마음만 굴뚝같다. 사회적 거리를 유지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