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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그널 G Dec 18. 2021

겨울, 오후 3시의 노루벌길

[차철호의 #길] 노루벌 메타세쿼이아숲이 꿈꾸는 풍경


수영장. 대전 시내버스 정류장을 검색해보시라. '수영장' 이름을 가진 정류장이 있다.  흑석유원지 앞이어서, 그동안 그 정류장이 흑석유원지 정류장인 줄 알았다. 오늘은 거기서 출발한다. 흑석동 수영장정류장(흑석유원지)→장평보유원지→노루벌 둔치→메타세쿼이아숲(숲 체험원 예정지)→상보안유원지→상보안 버스정류장. 대략 6㎞. 구봉산에서 내려다 보는 노루벌도 아름답지만 갑천 물길 따라 휘돌아 걷는 길도 매력적이다. 겨울에도 유려하다. 다만, 캠핑 명소로 알려지면서 유명세(有名稅)를 톡톡히 치르고 있어서 안타까웠다. 마음이 무거웠다.


#1. 25번 시내버스  

"환승입니다." 가수원네거리 근처 가수원시장 정류장에서 25번 버스로 환승한다. 흑석동, 장태산휴양림, 원정동, 벌곡 수락계곡 등등을 달리는 20번대 초록색 버스는 향수를 일으킨다. 마음이 편안해진다. 이어폰에서 흘러나오는 노래에 꽂힌다. 시인과 촌장이 부르는 '풍경'. 세상 풍경 중에서 제일 아름다운 풍경, 모든 것들이 제자리로 돌아오는 풍경... 노래가 막 끝날 때쯤 버스는 벌써 흑석동이다. 흑석리역을 지나고 굴다리를 지나 흑석유원지 물안리다리 앞에 멈춰섰다. 가수원동에서 15분도 안 걸렸다.

흑석동 수영장 정류장. 그동안 흑석유원지 정류장인 줄 알았다.


#2. '수영장' 정류장  

익숙한 삼거리다. 자전거산책 할 때 숱하게 지나친 길이다. 지나치며 봤던 버스정류장, 당연히 흑석유원지 정류장인 줄 알았더니, '수영장'이었다. 1970~80년대 대덕군 기성면 흑석리 시절 물놀이 명소 '수영장' 이름이 지금까지 이어져 온 것으로 전해진다. 그 때 대전에서 살지 않았던 내겐 이 곳의 옛 그림이 잘 그려지지 않는다. 금강변에 있었다는 내탑수영장처럼. 아, 서론이 너무 길었다. 각설하고, 물안리다리 건너며 출발, 오늘 꽂힌 노래 흥얼거리며 걸음 내디딘다. 모든 것들이 제자리로 돌아오는 풍경 속으로.

갑천누리길 자전거 탈 때, 산책할 때 가장 좋아하는 구간.
자전거 탈 때는 좁아서 잠시 내려서 끌고 가며 주변 경치를 감상해도 좋다.

#3. 낭만 속으로  

물안리다리를 건너서 잠시 경로 이탈, 둑방길 벗어나 둔치를 걷는다. 분주한 캠퍼들의 텐트와 캠핑카를 만난다. 오른쪽으로 지나가는 호남선 열차와 인사 나누고 다시 둑방길로 올라선다. 여기서부터 호젓한 낭만길이 열린다. 왼쪽은 산 오른쪽은 갑천, 폭이 좁아서 더 사랑스러운 길. 노루벌길의 첫번째 하이라이트다. '슬픔은 쉬이 깃들지만, 마주 대면 아랫목처럼 따뜻해지는 곳. 다가올 땐 잘 모르다가도 멀어질 땐 파도처럼 들썩이는 곳 ... ' 연초 세상을 떠난 류지남 시인의 시를 떠올리며 아무도 없는 오솔길을 걷는다.


#4. 갑천누리길

오솔길을 벗어나 얕은 오르막 데크길을 오른다. 갑천누리길 표지석이 보인다. '2011년 행정안전부 친환경 생활공간 조성 우수사업으로 선정돼 행안부와 대전시 지원을 받아 서구가 조성...' 갑천누리길은 엑스포다리에서 시작해 가수원교, 흑석동, 노루벌을 지나 장태산 임도 및 매노천까지 이어지는 39.9㎞ 길이다. 사람과 사람, 자연과 사람, 도시와 농촌을 잇는 생태·문화 100리길로 ‘아름다운 풍경과 문화를 누린다’는 의미를 품고 있다. 지금 걷고 있는 노루벌 길은 갑천누리길 2코스에 포함된다. 노루벌은 대전 걷고 싶은 길 12선대전 아름다운 자연생태 7선에도 올랐다. 한국의 살기좋은 지역자원 100선에 선정되기도 했다. 

가을 구봉산에서 내려다 본 노루벌.
노루벌 둔치가 멀지 않았다. 오늘은 땅이 많이 질다.


#5. 어느덧 장평보

노루벌 U자 길의 시작이다. 한가로운 길 그림 여백 속으로 자전거 라이딩팀이 들어온다. 휘파람소리 같은 페달소리 신나게 달리는 자전거 풍경. 아스라히 멀어지는 자전거 위로 구봉산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흑석유원지 들머리에서 2.5㎞ 왔다는 이정표가 보인다. 노루벌둔치가 멀지 않다는 얘기다. 이정표는 노루벌둔치 1.9㎞를 가리키고 있는데, 어디를 가리키는지 모르겠다. 조금만 더 가면 되는데.

노루벌에서 구봉산 오를 수 있는 초입에 섰다. 물론 오늘은 구봉산에 오르지 않는다.

#6. 불안한 동거

노루벌의 핫플레이스, 노루벌둔치에 들어선다. 캠핑용 자동차와 텐트가 먼저 손짓한다. 몇 해 전만 해도 시원한 물소리와 새들의 날갯짓이 먼저 반기던 곳인데. 언제부턴가 포털사이트 지도를 보면 '노루벌캠핑장'이란 좌표가 보인다. 캠핑명소로 인기를 얻으며 전국에서 캠퍼들이 몰려왔다. 주말은 물론 평일에도 캠퍼들의 자동차와 텐트가 노루벌둔치를 점령한다. 오늘도 고기 굽는 냄새가 바람에 날려온다. 여기저기 불피운 흔적이 노루벌을 할퀴고 있다. 이곳은 취사금지 하천이다. 우리나라에서 발견되는 반딧불이 3종이 모두 출현하는 청정지역이다. 불안하다. 반딧불이와 캠핑족들의 동거, 가능할까. 


비밀 아닌 비밀의 숲 같은 노루벌 메타세쿼이아숲.

#7. 그 숲에 가보셨나요? 

둔치에서 다리를 건너 건너편 적십자 청소년수련장이 있던 자리로 향한다. 노루벌 구절초와 반디의 숲 체험원과 노루벌적십자생태원이 들어설 준비로 한창이다. 갑천 물가에 경계병처럼 높게 서있는 메타세쿼이아 그늘 안에 섰다. 메타세쿼이아 그늘 따라 조금만 더 걸어가면 비밀의 숲 같은 메타세쿼이아숲을 만난다. 오늘 트레킹의 두 번째 하이라이트 풍경이다. 장태산휴양림의 메타세쿼이아 규모와는 비교가 안 되지만 묘한 매력의 공간이다. 사회적 거리두기 하듯 일정한 간격으로 오와 열, 줄맞춰 서서 나를 유혹한다.

#8. 메타세쿼이아숲의 꿈

아아, 오늘 눈이 왔으면 어땠을까, 오늘이 가을이면, 여름이면 ... 시간이 멈춘 공간처럼 이 묘한 숲은 나를 홀린다. 봄에 여름에 가을에 또 눈이 오면 다시 오리라, 발길을 돌린다. 숲은 꿈꾼다, 노루벌의 반딧불이와 갑천의 별빛과 구봉산의 깨끗한 바람이 오래오래 지켜지기를.  왔던 길 되짚어 나가는 길, 멀찌감치 서서 인근 고택도 바라본다. 대전시 유형문화재 상제집략판목과 용천연고판목이 있는 곳이다. 


또다른 메타세쿼이아길. 자전거 탈 때 휴식을 취하는 곳이다.

#9. 상보안유원지로

메타세쿼이아숲에서 오감 호강 힐링을 누리고 노루벌 여정의 후반전을 걷는다. 멀리 보이는 구봉산 구름다리와 구봉정를 뒤로하고 걸어나간다. 노루벌둔치와 상보안유원지의 중간쯤 되는 지점에서 세번째 하이라이트 풍경을 만난다. 갑천 물길 따라 도열한 메타세쿼이아가 만든 길. 걷는 이들에게, 자전거 타는 이들에게 응원과 휴식을 준다. 이 길을 지나면 곧 오늘의 날머리 상보안유원지에 도착한다.

#10. 5.5㎞ 

짧았던 산책, 상보안유원지 버스정류장에서 26번 버스를 기다리며 여정을 마무리한다. 아쉽다면 갑천 따라 갑천누리길을 쭉 걸어도 좋다. 천연기념물 괴곡동 느티나무도 만나고, 산악자전거(MTB) 연습장 및 도심형 펌프트랙도 만난다. 괴곡동-정림동-도안동-원신흥동 등등 갑천 따라 쭉쭉 걸어 올라가 보시라, 우리가 살고 있는 대전을 다시 보게 될 테니까.    ich@kaka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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