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th 25번 버스
속 시끄러울 땐 초록버스를 탄다. 도심을 벗어나 달리는 시내버스는 위로를 준다. 버스 안 어르신들이 주고받는 이야기 소리도 정겹고 창 밖으로 지나가는 풍경도 다정하다. 초록버스는 대청호의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장태산휴양림, 장동산림욕장, 성북동산림욕장, 국립대전숲체원에도 데려가준다. 이사동 한옥마을 ‘대전별서’ 가는 길도 안내하고 갑천 상류와 대전둘레산길의 트레킹코스 길잡이 역할도 한다. 힐링버스라 부르기에 마침맞다. 금강일보는 2025 연중기획 [대전 초록버스 여행]을 연재한다. 대전 시민들에겐 휴식의 시내버스 노선을, 다른 지역에서 온 여행자들에겐 대전여행 힐링코스를 소개한다. 당신의 마음을 안아줄 것이다. 마음이 흔들릴 땐 초록버스를 타 보시라.
EP1. 노루벌길엔 ○○가 있다 (with 25번 버스)
- 수영장 정류장부터 상보안 정류장까지 걸으며 만나는 것들
25번 버스를 탄다. 서남부터미널↔봉곡동(서구)을 오가는 버스다. 서남부터미널을 출발해 도마동 지나 정림동·가수원동을 벗어나면 여유로운 농촌마을을 달린다. 괴곡동·고릿골-대전추모공원-상보안·장평보유원지-사진개-흑석동-대추벌을 지나면 종점인 봉곡동에 다다르는 노선이다. 나는 가수원시장 정류장에서 환승했다. 15분쯤 지났을까, 흑석네거리·흑석리역 정류장 지나 수영장 정류장으로 향한다.
#1. 수영장 정류장
“이번 정류장은 수영장입니다.” 안내멘트가 나온다. 굴다리 지나 갑천변 흑석유원지 앞에 멈춰섰다. 익숙한 삼거리. 자전거 타면서 숱하게 지나치던 길이다. 스쳐가며 봤던 버스정류장, 당연히 흑석유원지 정류장인 줄 알았는데 ‘수영장’이었다. 1970~80년대 대덕군 기성면 흑석리 시절 물놀이 명소 보통명사가 고유명사로 굳어진 듯하다. 그만큼 명성이 높았단 얘기다. 지금은 갑천 환경정비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대전시민들 더위 날려주고 피로 풀어줬던 자연 수영장. 앞으로도 이 정류장 이름을 바꾸지 말고 계속 지켰으면 좋겠다. 노루벌길엔 수영장 정류장이 있다.
#2. 물안리다리
두계천과 만나 힘차게 달려온 갑천은 대추벌을 휘돌다가 남쪽으로 머리를 돌린다. 수영장 정류장 앞에서 냅다 다시 돌아 북쪽으로 흐른다. 여기서 갑천이 품은 마을이 물안마을이다. 갑천을 건너 물안마을로 가는 다리가 물안리다리다. 물안리다리부터 본격적인 노루벌길 여정이 시작된다. 흑석 노루벌길은 갑천누리길(엑스포다리~장태산) 2코스(가수원교~증촌꽃마을) 중 하이라이트다. 상보안 정류장까지 5㎞ 남짓. 풍광이 아름다워 대전 걷고싶은 길 12선(2012년), 대전 아름다운 자연생태 7선(2020년)에 이름을 올린 힐링코스 되시겠다. 정 많은 충청 사람을 닮았다. 노루벌길엔 걷고싶은 길이 있다.
#3. 갑천낭만길
물안리다리 건너 갑천 물길 따라 둑방길을 걷는다. 시골마을 풍경 속으로 들어간다. 발걸음 옮기다 보면 호젓한 낭만길이 열린다. 왼쪽은 산 오른쪽은 갑천, 폭이 좁아서 더 사랑스럽다. 노루벌길의 첫번째 하이라이트 지점이다. ‘갑천낭만길’은 공식 명칭이 아니다. 개인적인 애정이 깊어 혼자 붙인 이름이다. 도심 속 엑스포다리 권역과 달리 자연 그대로를 품고 있다. 그래서 투박하고 때론 무심하다. 국가습지보호지역인 도솔산 갑천길도 근사하지만 이 길도 한껏 유려하다. 토요일오후스럽다. 갑천 건너편 지나가는 호남선 열차와 눈 맞추고 유유자적 걷는다. 건너편엔 ‘과거와 현재를 잇는 특별한 터널’ 충청권역 유물창고 예담고가 보인다. 가르마 같은 길을 따라 꿈속을 가듯 걸어가다가 얕은 오르막 덱(deck)길을 오른다. 짧아서 더 애틋하다. 로맨티시스트라면 자연스럽게 노래 한 자락 흥얼흥얼~. 노루벌길엔 낭만이 있다.
#4. 장평보 지나 노루벌로
노루벌길을 걷다보면 같은 안내문 게시판이 여러 군데 지키고 서 있었다. 야영·취사 금지지역 지정 안내문이다. 다행이다. 진작 그랬어야 했다. 노루벌이 캠핑성지로 인기를 누리던 시기, 캠핑용 자동차와 텐트가 노루벌 둔치를 점령했다. 주말은 물론 평일에도 여기저기 불피운 흔적이 노루벌을 할퀴었다. 공식캠핑장이 아닌데 포털사이트 지도에 ‘노루벌 캠핑장’이라고 좌표가 찍힐 정도였다. 지금은 지도에서 사라졌다. 하천법상 이곳 취사는 불법이다. 더구나 우리나라에서 발견되는 반딧불이 3종이 모두 출현하는 청정지역이다. 유명세(有名稅)를 톡톡히 치르는 동안 마음이 무거웠는데, 반딧불이와 캠핑족의 불안한 동거가 끝났다. 세상 풍경 중에서 제일 아름다운 풍경은 모든 것들이 제자리로 돌아가는 풍경이다. 지난해 여름 수해 영향일까, 최근에 찾았을 땐 야영·취사 금지 안내게시판을 볼 수 없었다. 장평보 다리 건너 노루벌 둔치로 길을 잡는다. 노루벌길엔 제자리로 돌아가는 풍경이 있다.
#5. ‘핫플’ 적십자생태원
노루벌길 트레킹의 두 번째 하이라이트다. 갑천 물가에 키다리 메타세쿼이아가 경계병처럼 서있다. 다리 건너 메타세쿼이아 그늘 따라 들어간다. 곧 비밀의 숲 같은 메타세쿼이아숲을 만난다. 예전엔 비밀의 숲이라 부르곤 했는데 지금은 많이 알려져서 산책과 휴식의 핫플레이스가 됐다. 들어서자마자 만나는 메타세쿼이아숲은 장태산휴양림 메타숲과는 비교가 안 되는 규모지만 묘한 매력의 공간이다. 시간이 멈춘 듯한 자유를 준다. 조용하다. 평화롭다. 봄여름가을엔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가득하다. 메타숲 옆에 유아숲체험원(놀이터)이 있어서 아이들도 좋아한다. 놀이터의 집라인은 아이들 최애 코스다. 아이들보다 더 즐겁게 타는 엄마아빠도 있다. 어른도 아이가 된다. 메타숲 말고도 미선나무숲 복원지, 편백나무숲, 구절초테마숲 등 산책 힐링하기에 최고의 장소다. 노루벌길엔 가족이 있다.
#6. 노루벌의 꿈
고맙게도 이곳은 무료다. 언제 와도 반갑게 맞아준다. 적십자의길 따라 전망대 방향으로 걸어간다. 그네벤치에 앉았다. 아무 생각없이 그냥 앉아있다보면 숲의 숨결이 느껴진다. 전망대는 생태원조망대, 하늘전망대 두 곳이다. 멀거나 힘들지 않다. 완만한 오르막 슬렁슬렁 가다보면 나온다. 하늘전망대가 생태원조망대보다 더 높은 곳에 있어서 조망이 좋다. 휘돌아나가는 갑천 물길도 뚜렷하게 보인다. 전망대 찍고 한바퀴 돌아 생태원을 나오는 길, 멀찌감치 서서 인근 고택도 바라본다. 전망대에서도 잘 보이던 곳, 대전시 유형문화재 상제집략판목과 용천연고판목을 보관하고 있던 구봉재사다. 상제집략판목과 용천연고판목은 현재 대전시립박물관에 기탁돼 있다.
다리를 건너며 뒤돌아 숲을 바라본다. 숲은 꿈꾼다. 노루벌의 반딧불이와 갑천 별빛과 구봉산의 깨끗한 바람이 오래오래 지켜지기를. 대전시는 노루벌 국가정원을 추진 중이다. ‘구봉산 아래 노루벌 풍경을 담은 9가지 주제정원’을 테마로 웰컴정원, 아홉이야기섬, 가람굽이정원, 가족정원, 노루산숲길정원, 꽃물결언덕, 사계정원, 풍류정원, 반디배움정원 등 9개 테마시설을 갖출 예정이다. 2027년 착공, 2028년 준공해 3년간 지방정원으로 운영한 뒤 2032년 국가정원 등록을 목표로 하고 있다. 기대와 우려가 교차한다. 노루벌길엔 생명이 있다.
#7. 휴식같은 친구
노루벌둔치를 벗어나면 트레킹 막바지다. 구봉산 올려다보며 상보안으로 향한다. 노루벌둔치와 상보안유원지 중간쯤 되는 지점, 물가에 도열한 메타세쿼이아가 만든 길을 만난다. 나무가 많지는 않다. 길이 길지도 않다. 그래서 더 정겹다. 걷는 이들이나 자전거 타는 이들에게 응원과 휴식을 준다. 영상광고에 나올 법한 제법 운치있는 길이다. 길과 길을 이어주는 덱(deck) 다리가 있었는데 지난해 여름 유실돼 오랫동안 방치돼 있더니 지금은 덱 없이 길로 정리가 됐다. 다시 그 공간을 만들면 좋겠다. 눈 즐겁고 마음 가벼워지는 곳이다. 노루벌길엔 휴식을 주는 친구가 있다.
#8. 곧 상보안
수영장 정류장에서 출발한 지 2시간 반 남짓, 6㎞ 정도 걸었다. 예전에 캠핑지로 인기 높았던 상보안유원지도 야영·취사 금지지역이다. 철길 아래 다리 건너 버스 타러 간다. 상보안 정류장으로 가서 오늘 걸음을 마칠 참이다. 가수원 방면 상보안 정류장은 두 곳이다. 25번과 21번이 지나가는 옛길의 정류장(34470)이 있고, 새로 닦은 큰길의 정류장(35510)이 있다. 이 두 곳엔 20번대 초록버스가 많다. 앱을 통해 버스를 선택하면 된다. 나는 25번 버스를 타기 위해 옛길 정류장으로 간다. 정류장 가는 길에 하얀 건물 카페가 있다. 차 한 잔 하면서 쉬었다 가도 좋다. 버스 기다리며 바로 옆으로 지나가는 호남선 기차에 손도 흔들어준다. 노루벌길엔 25번 버스가 있다.
노루벌길은 줄곧 구봉산(264m)과 함께한다. 구봉산(九峰山)은 봉우리가 아홉 개란 의미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실제론 아홉 개 이상이다. 봉우리가 많다는 의미, 꽉 찬 숫자 9를 이름에 붙인 듯하다. 신선이 내려와 바둑을 두었다는 신선바위 전설도 있다. 그만큼 산세가 수려하다. 그래서 관저동에는 신선마을아파트, 선암(仙岩), 선유(仙遊) 등 신선과 관련된 지명이 많다. 높지는 않지만 ‘뷰 맛집’이다. 한 쪽은 대전도심, 한 쪽은 산과 논밭 시골 풍경을 조망할 수 있다. 대전둘레산도 파노라마로 볼 수 있다. 계룡산, 대둔산, 서대산도 선명하게 다가온다. 조망의 백미는 역시 시그니처뷰 노루벌이다. 갑천 물길이 U자형으로 크게 휘돌아 나가는 장엄한 서사 같은 뷰를 감상할 수 있다. 물길이 품은 노루벌은 눈을 떼지 못하게 한다. 오른쪽 3시 방향에 노루벌적십자생태원이 보인다. 메타세쿼이아숲 숨결이 느껴진다. 다리 건너 둔치는 예전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되찾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장평보, 상보안도 짚어본다. 왼쪽 7시 방향에선 휴식 같은 친구 메타세쿼이아길이 손짓한다.
구봉산 산행 들머리/날머리는 여러 곳이다. 성애요양원 쪽에서 구봉정으로 바로 올라가는 코스가 있고, 예비군훈련장 근처 구봉근린공원에서 올라가는 코스가 있다. 가수원동과 가까운 빼올약수터 출발코스도 있고, 천연기념물 괴곡동 느티나무와 가까운 고릿골구름다리 정류장 바로 위 날머리로 올라가는 코스(대전둘레산길 11구간)도 있다. 25번 버스는 이 정류장에서도 정차한다. 25번뿐만 아니라 20번대 외곽버스 모두 선다. 이 밖에 노루벌적십자생태원과 이어진 등산로도 있다. 계족산과 대청호처럼, 서로 그리워하듯 바라보는 구봉산과 노루벌을 한번에 걷는 것도 좋다. 개인적으로 ① 초록버스(20번대)→고릿골구름다리 정류장→구봉산→노루벌→초록버스(20번대) 코스와 ② 초록버스(20번대)→고릿골구름다리 정류장→구봉산→봉곡동→방동저수지→초록버스(41번) 코스를 즐긴다.
훗날 노루벌과 구봉산이 어떻게 바뀔지 모르지만 시간이 흘러도 노루벌 반딧불이와 갑천 별빛과 구봉산의 깨끗한 바람이 오래오래 지켜지기를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