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론, 그리고 갈등
“아니, 도대체 이런 결론을 내리시는 게 어디 있나요? 너무 일방적이잖아요. 아니, 다들 말들 좀 해 보세요.”
얼굴이 빨개진 신중진 교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좌우를 둘러보며 소리를 질렀다. 작은 키에 베토벤과 비슷한 긴 장발을 왼쪽으로 벗어 넘긴 신 교수는 정말 화가 난 것으로 보였다. 회의실 안의 사람들 모두가 입을 열지 않고 있었다. 충격에 가까운 놀라움이 방을 지배했다.
회의실 가운데 놓은 기다란 원목 테이블의 중앙에는 여섯 명의 연구단 정 멤버들이 마주 보고 앉아 있었고 정부와 한전 관계자, 그리고 기타 노사정위원회 사람들은 위원들의 좌우로 앉았다. 모두 합쳐서 20명 가까이 되는 숫자였다. 그 가운데 문재송 과장의 얼굴도 보였는데, 하얗게 질린 채로 연신 안경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오전부터 시작된 회의는 가벼운 점심을 먹고 다시 모인 후에도 평행선을 달렸다. 벌써 이틀째 양측은 의견 차이를 보였고 합의는 힘들었다. 두 시가 조금 넘자, 이근석 단장이 최후통첩을 했다. 정부와 노조 양측 위원들이 합의에 이리지 못하면 다수결 투표로 가겠다고 선언했다. 모두가 동의했다.
“자, 그럼 간단하게 이 자리에서 거수로 결정합시다. 한전의 마지막 분할인 배전분할에 대한 찬반을 묻는 방식으로 하겠습니다. 먼저, 정부의 계획대로 배전분할이 진행돼야 한다는 의견을 가진 위원들, 손 드세요.”
이근석 단장은 건조한 목소리로 위원들의 얼굴을 살피며 거수투표를 제안했다. 짧은 침묵이 흐르고 예상대로 김창석, 신중진 교수가 손을 들었다. 중립 위원인 이근석, 이병호 교수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뭔가 이상했다. 여섯 명 중에서 네 명이 절반씩으로 갈라져 있고 가운데 두 명이 있는데, 이 가운데 두 사람이 찬성에 손을 들지 않는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하고 문재송 과장이 생각했다. 설마, 분할에 반대하는 것은 아니겠지? 손을 든 사람들도 다른 사람들도 모두 어리둥절해졌다. 저 두 중립위원이 끝까지 중립을 지키고 찬반 양쪽에 동의하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 거지? 모두의 머릿속이 빠르게 움직였다.
“다음으로, 배전분할에 반대하는 분들은 계신가요?”
김명자, 안현필 교수가 당연히 손을 들었다. 모두의 눈동자가 바쁘게 움직였다. 잠깐의 머뭇거림이 지난 후 이병호 교수가 오른손을 살짝 들었다. 순간 모두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충격이 방 안을 휘몰아치고 가라앉는 순간, 이근석 교수도 오른손을 가볍게 들었다. 허리케인 급 폭풍이 방안을 몰아치고 모두가 얼어붙었다.
무거운 침묵이 흐른 후, 문재송 과장이 입을 열었다.
“저.. 교수님들, 제가 뭘 잘못 들은 건 아니지요? 다들 아시다시피 발전이 이미 분할됐고 경쟁으로 나가는데...배전분할이 멈추면 안 되는 거 아닌가요?”
아무도 선뜻 대꾸하지 않았다. 그때, 김창석 교수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붉어진 얼굴로 주변을 살피면서 격앙된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 지금 도대체 왜 이런 결정이 나오는 겁니까? 다른 나라 모두가 경쟁체제로 가고, 심지어는 민영화로도 가는데, 여기서 이렇게 결론 내리면 우리는 바보가 된 거 아닌가요?”
그리고 이근석 단장을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단장님, 아니 교수님, 배전을 나누지 말라니, 대체 왜 그런 생각을 하시는 겁니까? 다들 보셨잖아요? 패러다임이 바뀌고 있다고요. 공기업이 독점하던 시대는 지났습니다. 앞으로 갈 길이 많아요. 다시 생각해 주십시오.”
“교수님들 생각은 알겠지만, 우리 함께 다 보지 않습니까? 전력이라는 산업의 특수성을. 전력산업은 장기적으로 안정적으로 유지해야지 주식시장처럼 현물거래를 하면 위험하다는 사실을요.”
듣고 있던 김명자 교수가 애써 흥분을 참으며 말했다. 사실 불과 5분 전만 해도 김명자 교수는 가슴을 졸이고 있었다. 분할 찬성과 반대는 2대 2가 될 텐데, 이근석 교수와 이병호 교수가 어느 쪽 손을 들어줄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만약 그 두 교수가 분할에 찬성하면 모두 허물어지는데. 회의장 안의 공기는 무겁게 가라앉았다. 문재송 과장은 교수들이 앉은 회의 탁자 뒤쪽 벽면의 의자에 하얗게 질린 얼굴로 앉아 있었다. 큰 망치로 머리를 한 대 맞은 듯 아무 생각이 나지 않았다. 사실 제주도로 오기 전에 모든 보고가 끝나 있었다. 일단 국장을 통해서 차관에게 공동연구단 활동 종료와 예상 결과를 올렸다. 연구위원 전원 또는 최악의 경우라도 노조 측 추천 위원 외 4인 이상의 찬성으로 배전분할 결정이 내려질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사실 그 보고서에는 최종 결론 도달 시 노조의 반발에 대응하는 내용이 더 중요한 부분으로 포함돼 있었다. 그런데 정반대의 결과가 나온 것이었다.
배석했던 노사정위원회의 박성범 위원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방 안의 여러 사람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면서 질문인 듯 아닌 듯 한 어조로 나지막하게 말했다.
“저... 예상과 다른 결론이 나네요. 저는 배전부문 분할로 결론 날 것으로 생각했거든요. 저희로서는 분할 이후 노조와의 협의, 그러니까 고용안정이나 지역별 배전회사 분할에 따르는 후속적인 제도 준비를 이미 시작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결론대로 만약 정부가 최종적으로 결정하면, 그냥 지금과 같은 한전 독점으로 가는 거지요?”
아무도 선뜻 대답하지 않았다. 혼돈 그 자체의 폭풍이 몰아치고 있었다. 문재송 과장은 이 모든 상황이 다 꿈으로 느껴졌다.
과천의 산업부 에너지자원실은 비상이 걸렸다. 이미 청와대에도 관련 내용을 보고한 상태였는데 판이 뒤집어졌다. 김정식 전력국장은 전화기에 대고 호통을 질렀다. 수화기 반대 편의 문재송 과장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듣고만 있었다. 김 국장은 당장 상황을 바꾸라고 소리 질렀다. 평소 사람 좋기로 유명한 김 국장은 벌게진 얼굴로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는 상태로 문 과장에게 불벼락을 내리고 있었다. 그는 알고 있었다. 산업부의 에너지 라인은 이제 죽은 목숨이라는 것을. 어떤 수를 쓰더라도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을 뒤집어야 했다. 그게 가능할지 않을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래야만 했다.
호텔 회의실을 박차고 나온 김창석 교수와 신중진 교수는 로비의 회전문을 밀고 나와 멀찍이 서 있는 택시를 향해 손짓을 했다. 그들을 곧 뒤따라 나온 이병호 교수가 그들을 불러 세웠다.
“김 교수님, 신 교수님, 조금 숨을 가다듬읍시다. 아니, 저녁이라도 같이 하고 올라가지요? 너무 흥분하지 말고. 이야기라도 좀 합시다.”
“이 상황에서 우리가 어떻게 여기 더 있겠습니까? 이런 말도 안 되는 상황에서요. 이 교수님, 너무 하신 거 아닌가요? 한전 자유화는 이미 가는 길인데, 두 교수님이 이렇게 반대하실 일이 아닌 걸로 보입니다. 이건 뭔가 잘못 됐습니다.”
김창석 교수가 이병호 교수 얼굴을 쳐다보며 말했다. 속으로는 너무 당황스럽고 화가 났지만 최대한 평정심을 가지려 노력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신 교수는 두 사람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면서도 입을 열지 않았다. 사실 신 교수가 김 교수 보다 더 황당하고 화가 났다. 본인이 한전 출신으로 교수가 된 입장에서 한전은 반드시 분할돼야 한다고 믿고 있었다. 순수한 엔지지어였던 그로서는 한전 내부에 팽배해 있던 관료주의와 적당한 보신주의, 그리고 직군별 내부 부패를 견디지 못했다. 그래서 한전을 뛰쳐나왔다. 지금과 같은 구조로는 미래의 변화를 감당하지 못한다는 것이 신중진 교수의 생각이었다. 두 사람은 이 교수의 만류를 뿌리치고 택시에 올랐고 곧장 공항으로 향했다.
호텔에 남겨진 사람들의 분위기도 묘했다. 사실 대부분은 이런 결론을 예상하지 못했다. 김명자, 안현필 두 교수는 최선을 다한다는 결의에는 찼지만 설마 정부의 정책을 바꿀 결론을 내린다는 낙관은 하지 못했다. 반대로 김창석, 신중진 두 교수는 공동연구단 자체가 일종의 요식행위로 생각했다. 분할과 민영화가 세계적 추세라는 사실은 접어두더라도 일단 정부가 결정했고 이미 발전도 분할되고 경쟁체제가 가동되기 시작했는데, 나머지 절반인 배전분할과 민영화가 안 된다는 생각은 추호도 하지 못했다. 그들은 이근석, 이병호 두 교수의 상상밖의 의견에 놀랐다. 아니 사실 화가 났다고 해야 맞을 것이다. 자신들의 의견이 묵살된 그런 패배감이었다.
공항에서 급하게 서울행 비행기 표를 구입한 두 사람은 대합실 벤치에 주저앉았다. 둘인 한동안 말이 없었다.
“아니, 이게 무슨 경우지요? 이근석 교수가 저럴 줄은 몰랐는데요. 혹시 선생님은 예상이라도 했나요?”
김창석 교수는 손목시계를 슬쩍 보면서 담담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러게요. 말도 안 되는 경우인데. 근데 그분들이 뭘 제대로 이해는 했는지 모르겠네요. 온 세계가 그쪽으로 나가는데 무슨 생각으로 이런 엉뚱한 의견을 내는지. 사실 저는 이근석 교수를 잘 몰랐어요. 근데 아무튼 되게 엉뚱하네요.”
“이제 궁금한 건 정부가 이걸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네요. 일단 노사정이 이 연구단의 결정을 수용한다고 약속은 한 상태인데. 산업부나 청와대나 이를 무시하고 원안대로 배전분할을 할까요?”
“약속은 약속이지만...”
신중진 교수는 말끝을 흐렸다. 그리고 약간의 침묵 후 말을 이었다.
“아무리 약속했다고 해도 여기서 중단하지는 않을 겁니다. 정부 체면이 뭐가 되나요? 그리고 원론적으로 생각해도 그렇지, 배전분할을 중단하게 되면 그 후폭풍은 어쩌려고요? 발전은 나누고 배전은 그냥 둔다고요? 그런 사례는 없습니다. 저는 자신합니다. 약간의 진통이 있어도 계획대로 갈 겁니다.”
신 교수의 말을 듣고 있던 김 교수는 빙그레 미소를 띠며 말했다. 얼굴은 웃고 있었지만 속은 구토가 날 것 같이 불쾌해진 상태였다.
“그게 정상이지요. 한전 독점으로 계속 간다는 건 말도 안 되고, 또 정부가 시작한 일이 중간에 서는 것도 아니고. 산자부가 잘 정리하겠지요. 생각해 보세요. 만약 반대 결론이 나왔다면 노조는 가만히 있겠어요? 자기들이 살기 위해서도 행동으로 나서겠지요. 결론에 무조건 승복한다는 건 우리나라에서는 쉽지 않지요.”
김창석 교수는 입맛을 다시며 말을 이어갔다.
“그런데, 자존심이 좀 상하네요. 우리가 두 이 교수를 너무 믿었나? 방심한 것 같아요. 깔끔하게 결론을 내렸어야 하는데.”
시간은 6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5월 말의 해는 길었고 제주도의 황금 시기를 제주공항이 잘 보여주고 있었다. 오가는 수많은 관광객의 분주하고 경쾌한 걸음과 달리 두 교수는 찜찜하고 허전한 마음을 삭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