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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력산업 민영화, 그 뒷 이야기 34

심야의 모임, 그리고 마지막 결의

by 요아킴

계절의 여왕이라는 5월도 끝을 향해 달리는 캠퍼스. 안현필 교수는 여름이 성큼 다가온 교정을 바삐 걸어가고 있었다. 학생들에게 내줬던 각종 과제물 채점에 바쁜 가운데에서 마음 한가운데에는 한전 분할 문제가 머물고 있었다. 지난가을부터 시작된 활동은 끝났고 제주도에서의 마지막 회의 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상태였다. 연구단의 최종보고서는 노사정위원회에서 최종적으로 승인됐고, 아마 지금쯤이면 정부로 제출됐을 것이다. 정부의 다음 행보가 너무나 궁금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걷던 안 교수의 핸드폰이 갑자기 울었다. 김명자 교수였다. 급한 일이 있으니 저녁 늦게라도 모이자는 연락이었다.


밤 10시가 조금 넘은 시간, 강남구 삼성동의 한 호텔 로비의 거피숍에 안현필, 김명자 교수, 그리고 김준형 위원장이 모였다. 세 사람은 초조한 표정으로 말없이 앉아 있었다. 잠시 시간이 지나자 노사정위원회의 양인식 위원이 종종걸음으로 모습을 나타냈다.


“상황이 급하게 돌아갑니다.”

양 위원은 자리에 앉자마자 일행을 돌아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대통령 보고가 곧 이뤄지나요?”

김명자 교수가 양 위원에게 물었다.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물을 마신 후 양 위원이 대답했다.

“아마 다음 주 초쯤에 대통령에게 보고가 있는 모양인데, 최종보고서 수정 의견이 있는 모양입니다. 청와대 내부에서요.”


상황은 이랬다. 노사정위원회 공공부문특별위원회의 충격적인 최종보고서가 배전분할에 반대하는 내용으로 결의됐고, 이를 확인한 산자부는 한동안 충격에 휩싸였다. 대내외적으로 발전부문의 경쟁과 판매경쟁이 이미 공표된 후에 벌어진 이 사태는 대한민국 정부의 위친 추락과 신용도 하락으로 이어질 수도 있었다. 산자부 장관은 청와대 정책실장으로부터 불벼락 같은 호통을 받았다. 대통령에게 정식 보고는 하지 않았던 상태였지만, 이미 대통령도 전 정부에 이어져 온 전력산업의 자유화와 구조개편 내용을 대충 알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이 정책 기조를 뒤집어 달라는 의견이 노사정위원회로부터 올라오다니, 아무리 친노동 대통령이라도 이를 수용할 수는 없을 것으로 보였다.


“결국 대통령의 결심만 남은 거지요? 산자부에서는 노사정 보고서에도 불구하고 배전분할 의견을 굽히지 않을 것이고.”

침묵 끝에 김주형 위원장이 입을 열었다. 일행은 잠시 말을 잃고 있었다. 안현필 교수가 물었다.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뭐지요? 최종보고서가 그대로 대통령에게 전달되도록 뭔가 해야 하나요? 당초 합의대로 공동연구단 연구 결과를 수용하기로 모두 합의가 됐잖아요? 청와대가 됐든, 누가 됐든 이를 거부할 명분은 없는데요?”


사실 그랬다. 공동연구단이 출범할 때 정부와 한전, 그리고 전력노조는 협약서에 사인을 했다. 연구단의 연구 결과를 3자 모두 그대로 수용하겠다고. 그 당시에는 정부와 한전은 별로 걱정하지 않았다. 결론은 뻔할 것으로 예상했기 때문이었다. 노조를 달래는 식으로 연구단 활동을 하고, 최종보고서는 배전분할을 하되 6개로 분할되는 배전회사로 전적하는 한전 직원들의 고용승계나 신분 보장, 또는 약간의 위로금 지급 등의 부가적인 조건을 달아 줌으로써 노조 역시 조합원들을 달래는 명분으로 삼는 것, 이게 노사정위원회 공동연구단의 역할이라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분할 자체를 하지 말자는 보고서라니. 이를 정부가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모두가 궁금했다.


공동연구단의 보고서를 받아 본 노사정위원회 공공부문특위는 깜짝 놀랐다. 모두가 예상했던 것과는 다른 내용이었다. 공공부문특위 위원장과 노사정위원장은 머리를 맞대로 고민에 빠졌다. 이를 어떻게 할 것인가. 연구단 보고서 대로 배전분할 불가라는 내용으로 산자부, 노동부, 그리고 청와대로까지 전달해야 할 것인가, 아니면 뭔가 내용을 수정해야 할 것인가를 놓고 혼란에 빠졌다. 연구단 보고서를 그대로 확정하면 사회적 혼란이 벌어지고 정부의 수용 여부를 확신하지 못했다. 그렇다고 보고서를 수정한다는 것은 당초의 모든 약속을 뒤집는 일이 되고. 고민의 시간이 길어졌다.


노사정위원회의 고민은 소문으로 흘러나왔고, 김주형 위원장은 결단을 내렸다. 노동조합의 무기인 위력시위를 계획했다. 김 위원장은 전력노조 중앙위원 등 핵심 간부 200여 명을 동원해 서울 종로구 금융타운 건물에 있던 노사정위원회에 기습적으로 들이닥쳤다. 투쟁 조끼와 머리띠로 무장하고 마스크를 착용한 조합 간부들은 로비를 점거하고 농성에 돌입했다. 이 사실을 예상하지 못했던 건물의 경비업체는 속무무책으로 당했다. 잠시 시간이 흐른 후, 일부 간부들은 저항하는 경비원들을 뚫고 노사정위원장의 집무실을 말 그대로 습격해서 점거했다. 경찰이 출동하기 전에 벌어진 전광석화 같은 작전이었다.


전력노조점거.jpg


노사정위원장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상태로 전력노조 간부들 앞에 나섰다. 대통령의 정신적 멘토라고 불렸던 전금수 위원장. 대한민국 노동운동의 중요한 역할을 했던 원로급 노동운동가도 상대적으로 온건해 보였던 전력노조의 위력 시위에 놀랐다.


“여러분들이 왜 이런 행동을 하시는지는 저도 잘 압니다. 저 역시 한때는 왕성했던 활동가였지요. 흥분을 잠시 가라앉히고 대화합시다.”


전 위원장은 50여 명의 전력노조 간부들을 대회의실로 안내하고 자신이 원형 테이블의 중간에 앉았다. 인원을 모두 수용하지 못했기에 일부는 서서 전 위원장의 얼굴을 쳐다보고 있었다.


“지금 우리 위원회 내부에서 심각하게 논의 중입니다. 공동연구단의 보고서 채택을 놓고 일부 이견이 있기는 합니다. 시간이 좀 걸리는 것 같아요. 하지만 제가 이 자리에서 분명히 약속합니다. 노사정 3자의 당초의 약속을 위반하는 일은 없도록 하겠습니다. 보고서 내용이 사실 예상과는 좀 다르다는 것 때문에 우리 위원회도 좀 생각할 시간을 가지겠습니다.”


“아니, 연구단에서 내린 결론을 그대로 수용하면 되지 왜 이걸 놓고 생각하고 자시고 하는 일이 있나요? 뭔가 보고서를 오염시킬 생각이 있나요? 그렇다면 우리도 그냥 있지는 못합니다. 총력 투쟁으로 파업도 불사할 겁니다.”


성격이 직선적이기로 유명한 이승곤 부위원장이 노사정위원장을 쳐다보며 소리 질렀다. 이 부위원장과 전 위원장은 사실 친근한 관계였다. 배전분할 문제를 노사정위원회로 끌어오는 과정에서 두 사람은 긴밀히 협의했고, 속 마음은 어느 정도 통했다. 두 사람의 공통된 의견은 배전분할 문제를 최대한 마찰 없이 끝내며 정부, 전력노조, 노사정위원회 모두가 체면을 구기지 않게 하자는 것이었다. 사실 이는 실현 불가능한 구상일 수도 있었다. 배전이 분할되는가 마는가에 따라 정부와 노조 중 한쪽은 패자가 되는데. 문제는 패하는 쪽이 얼마나 명예롭게 패배를 인정하고 후폭풍을 최소화하는가에 있었다. 물론 이승곤 부위원장은 노조가 이겨서 배전분할을 막는 것이었지만, 모든 상황이 불리한 현실에서 설령 분할을 수용하는 쪽으로 결론이 나더라도 노조와 조합원의 피해를 최소화하자는 생각이었다.


전금수 위원장은 잠시 말을 멈추고 생각에 잠기더니 입을 열었다.

“제가 다시 맹세합니다. 절대 보고서 훼손은 없을 겁니다. 내부적으로 정리할 부분이 있어서 그런 거니까. 그러니 여러분들은 저를 믿고 기다려 주세요.”


이런 소동이 벌어진 후 노사정위원회는 공동연구단의 보고서를 수정 없이 그대로 채택했다. 그게 지금의 파문을 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상했다. 왜 이 늦은 시간에 여기에 모인 것이지? 안현필 교수는 궁금했던 내용이었다. 답은 양인식 노사정위원으로부터 금방 나왔다. 정부로부터 타협안이 나온 것이다. 정확하게 말하면 청와대로부터였다.


양 위원의 설명에 따르면 노사정위원회의 최종보고서를 받은 청와대는 일부 수정안을 제시했다. 당초의 약속대로 최종보고서를 받아들이기는 하지만 문구 하나만을 더 넣자는 것이었다. 배전분할 중단이라는 말 대신 한전 배전부문의 효율성 향상을 위한 독립적인 지역별 경쟁체제를 구축하겠다고 결론을 내리자는 요구였다. 양 위원은 청와대에서 노사정위원회로 어제 이 의견이 제시됐고, 이를 연구단장인 이근석 교수에게 전달했다고 전했다. 이에 대해 이근석 단장은 명확한 답을 주지는 않았지만 거부하지도 않았다고 전했다. 이에 따라 노사정위원회도 최종보고서 수정 문제를 논의할 수도 있다고 했다.


모두가 놀랐다. 그런 제의가 있었다는 사실도 그렇고 이 단장이 이를 적극적으로 거부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모두 놀란 것이다. 양 위원은 김준형 위원장에게 이런 내용을 귀띔했고, 김 위원장은 급하게 두 교수를 야밤에 불러낸 것이다. 김 위원장으로서는 도저히 받아들이기 어려운 제안으로 보였다. 배전분할 중단이라는 말 대신에 지역별 경쟁체제 구축이라고 결론을 내리면 이게 표현만 다른 배전분할이 아닌가. 세 사람은 이 제안에 숨은 의도를 놓고 의견을 나눴다. 말만 다르지 배전분할의 효과를 내게 될 것이라는데 의견이 맞춰졌다.


김명자 교수는 핸드폰을 들고 급히 평소 자주 자문을 구하던 같은 대학의 이상집 교수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 교수는 교수노조 위원장을 지냈던 인물로, 여러 민주화 운동 단체에 참가하며 교수 사회 안에서 진보 운동을 이끌던 리더 격의 인물이었다. 이번 공동연구단 참여 과정에서도 노조 측 위원 추천 등 여러 과정에서 전력노조에게 적극적인 자문을 아끼지 않고 있었다. 이 교수의 답은 간결했다. 청와대의 의도는 당장 배전분할이라는 물리적 민영화 추진에서 잠시 물러서면서도 그 불씨를 살려서 추후 이를 추진하겠다고 해석했다. 발전분할과 같은 완전한 독립회사로의 분할 이전에 기업 내 사업부제와 같은 형태로 지역 분할을 해 놓겠다는 의도로 보인 것이다.


김 위원장과 두 교수는 이 교수의 의견에 따라 입장을 정했다. 노사정위원회가 최종적으로 결정한 보고서를 절대 수정할 수 없다는 결론이었다. 김명자 교수가 핸드폰을 들었다. 이근석 단장이 수화기 반대편에서 가라앉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김 교수는 세 사람의 의논 내용을 전달했다. 이 단장은 잠시 침묵하다가 입을 열었다.


“나도 알아요. 여러분들이 무슨 걱정을 하는지. 그런데 청와대와 정부 쪽에서 충격이 큰 것 같네요. 뭔가 자기들도 명분을 살리고 싶어서 그런 모양이에요. 한전 내부의 지역별 독립체제 발족이 그렇게 위험한가요? 나도 많은 생각을 하고 있는데 말입니다.”


“교수님, 정부의 요구를 받아들이면 일면 우리가 이긴 것으로 보이지만 숨은 뜻이 커 보입니다. 지역별 경쟁체제라는 시스템은 언젠가 다시 마음만 먹으면 분할이 가능하다는 말이 되잖아요. 이건 우리로서는 받을 수 없는 내용입니다.”


“노조도 같은 생각인가요?”


“예. 지금 여기 김 위원장도 같이 있어요. 노조 역시 양보가 불가하다는 입장입니다.”


이근석 단장은 잠시 침묵을 지킨 다음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그들의 요구를 수용한 것은 아닙니다. 그냥 고려해 보겠다고 답했습니다. 조만간 나보고 오라고 할 것 같습니다. 나 역시 여러분들의 뜻이 그렇다면 그렇게 하겠습니다. 원안에서 수정은 없는 것으로. 이제 됐지요?”

김명자 교수는 전화를 끊고 안 교수와 김 위원장에게 이 단장의 입장을 설명했다. 그리고 다시 이상집 교수에게 전화했다. 이근석 단장과의 대화 내용을 전달했다. 통화를 마치며 이상집 교수가 당부했다. 계속 살펴보고 절대로 물러서면 안 된다는 결의를 이근석 단장에게 전달하라고.


일행이 호텔을 나설 때 이미 시간은 자정을 넘기고 있었다. 양 위원이 먼저 택시를 잡아 타고 떠난 후 세 사람은 서로의 얼굴을 말없이 번갈아 봤다. 그리고 똑같은 생각을 했다. 아직 끝난 게 아니구나. 사실 끝난 게 아닌 것이 맞았다. 노사정위원회는 최종적으로 지역이라는 말을 뺀 내부경쟁체제 도입을 조건으로 하는 보고서를 결의했다. 노사정위원회 공공부문구조조정특별위원회 명의로 발표된 정확한 문구는 다음과 같았다.


전력산업 배전분할 관련 결의문(안)


노사정위원회 “공공부문구조조정특별위원회”는 ’99. 1월 정부에서 발표한 「전력산업 구조개

편 기본계획」에 의거하여 ’02. 6월 확정된 제2단계 구조개편(배전분할)계획과 관련하여 ’03.

3월 정부로부터 추진현황을 보고받았으며 이에 대한 한국전력공사 노?사의 의견을 청취하고 배전

분할의 타당성 및 쟁점 등에 대하여 논의를 계속하여 왔다.


이에 본 특별위원회는 심도있고 체계적인 연구를 위하여 ‘03. 8월 전문가들로 구성된 “합리적

인 전력망산업 개혁방안 공동연구단”을 구성하였다. 동 연구단은 ’03. 9월부터 ‘04. 5월까지

16차례의 회의와 국내외 전문가의 의견청취 및 미국, 캐나다, 영국, 일본 등 9개국 32개 기관에

대한 해외사례 현지조사를 진행하여 배전분할의 타당성 및 관련쟁점들에 대한 연구·검토를 거

쳐 ’04. 5.31 본 특별위원회에 정책제안을 보고하였다.


공동연구단은 보고에서 배전분할을 통한 도매시장 도입시 전기의 특수성(저장 불가능, 수요의

가격 비탄력성)과 과점시장 폐해로 전기요금 상승 및 공급불안정성 발생이 우려되므로 기대편익

이 불확실할 뿐만 아니라 외국과 고립된 우리나라의 특수성으로 인해 전력대란의 가능성이 있고

한국전력공사에 의해 운영되는 현 체제가 저렴한 가격으로 전력을 안정적으로 공급한다는 임무

를 비교적 성공적으로 수행중이라는 판단에 따라 현 체제가 전면 개편되는 배전분할 추진은 중단

되어야 하며, 한국전력공사의 배전사업부문에 내부경쟁 및 경영효율성을 구현하기 위해 독립사

업부제를 도입하되 세부방안에 대해서는 추후 연구를 거쳐 시행할 것 등을 제안하고 있다.


한편, 공동연구단은 전력산업에서 현재의 국가독점체제는 계획경제의 비효율성이 있기 때문에

배전분할정책은 계속 추진되어야 한다는 소수 의견과 함께 전력산업은 다른 산업과 성격이 판이

하므로 이 보고서의 결론을 다른 공기업의 구조개편에 그대로 적용하는 것은 무리임을 부언하고

있다.


이에 본 특별위원회의 노·사·정은 공동연구단의 연구결과를 검토하고 진지한 논의 끝에 공공

연구단의 연구결과를 존중하여 정부에 정책 권고하기로 하고 다음과 같이 결의한다.


1. 정부의 도매시장 경쟁을 위한 배전분할 추진은 중단되어야 한다.

2. 한국전력공사의 배전사업부문에 있어 내부경쟁 촉진을 위해 자율성과 독립성을 강화하는 독

립사업부제를 도입하되, 철저한 사전준비 및 연구를 거쳐 단계적으로 시행한다.

3. 전력산업의 합리적 발전을 구현하기 위해 ‘전력요금체계의 합리적 개선방안’ 등 3개항의

공동연구단이 추가 연구과제로 제안한 사항을 적극 검토한다.


2004. 6.17

노 사 정 위 원 회

공공부문구조조정특별위원회


위의 내용을 보면 ‘배전분할은 중단하되 배전사업부문에 독립적인 사업부를 도입해 내부경쟁을 유도하겠다’라는 말이 된다. 김 위원장과 두 교수를 비롯한 모든 사람은 노사정위의 공식 발표 이전에는 이런 세부적인 내용을 알지 못했다. 이근석 교수 역시 노사정위가 내부경쟁과 사업부 도입이라는 부분을 정확하게 알지 못했다. 일단 배전분할은 중단됐지만, 불씨는 완전히 끄지지 않은 상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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