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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를 구원할 품격에 대하여

by 요아킴

1990년대까지 우리나라 광고에서 많이 쓰이던 말이 ‘품격’ 또는 ‘격조’였다. ‘품격 있는 남자를 위한 oo패선’, ‘격조 높은 당신을 위한 ooo자동차’ 등과 같은 광고 문구를 신문이나 방송에 매일 흘러나왔다. 그 제품을 사면 마치 나의 품격이 높아진다는 그런 착각을 하도록 유도했다. 물론 대부분 그 광고 문구를 문자 그대로 믿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다른 경쟁 제품과의 차별화를 느끼게 만들고, 묘한 기대감을 품게 만드는 그런 효과는 있었을 것이다. 광고를 연구하는 사람들이 아무 생각 없이 그런 문구를 지어내지는 않았을 것이니까.

‘품격, 격조’ 무슨 말일까? 말 그대로 평범하지 않고 남들이 보거나 내가 느끼기에 격이 다르고 뭔가 우아해 보이는 그런 차별성을 가지는 말일 것이다. 당시 이 단어가 유행하던 시대는 1970년대 이후 급격한 경제 성장이 이루어지던 그런 시대였다. 기업은 빚을 내더라도 투자하면 시장이 확대돼서 돈을 벌었고 개인들도 무리하게라도 집을 사면 집 값이 올라가며 자산을 불려 가던 그런 시대였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의 자본주의는 끝없는 확대를 경험하고 있었고 이 기간 냉전의 덕을 본 우리나라 역시 개발독재 시대의 고도성장을 이룩했다. 갑자기 부자가 된 사람들이 많았다. 평범한 사람들도 돈을 벌었고 이런 날이 계속 이어질 것으로 믿었다.


가난한 농촌에서 태어나 어렵게 대학을 나오고 대도시의 대기업에 들어간 사람들, 커져 가는 회사에서 승진을 거듭하던 직장인들, 이들은 사회적 보상도 원했다. 이들을 노린 마케팅 문구가 남과 다른 뭔가, 출세를 보상하는 자신들만의 호칭이었다. 졸부까지는 안 돼도 급성장하는 세상에서 함께 신분이 올라가는 듯했던 당시의 세대에게 자신의 성공을 대변해 줄 그런 용어가 필요했다. 스코틀랜드산 위스키가 유행하기 시작했고 우후죽순처럼 생겨나던 고층 아파트, 귀족들이나 입는 줄 알았던 모피코트의 대중화, 그리고 꿈에 그리던 자가용이 늘어가던 그 시대의 용어가 품격과 격조였다.

품격과 격조는 영국과 같은 신분제가 남아 있는 사회의 귀족들을 표현하는 말이다. 공화국 프랑스 사람들이 들으면 코웃음을 치겠지만. 영국 귀족들은 세습적으로 권위를 보장받는 대신 국가적 위기나 전쟁에서는 항상 앞장서는 계층이었다. 사회적 특권과 동시에 책임이 따르는 그들에게 품격이 있고 격조가 있다. 조선 이후 우리에게는 양반이라는 특권층이 있었는데, 이들은 영국 귀족들과는 달랐다. 세금도 내지 않았고 병역과 같은 국가의 각종 의무에서도 벗어나 있었으면서, 전란이 벌어지면 도망치기에 진심이었다. 물론 양반들이 의병을 일으킨 경우도 있었지만, 이들은 주로 중앙 정부의 관료가 아닌 향촌에 묻힌 순수한 성리학자들이었다.

조선이 건국하면서 고려의 권문세족을 몰아내고 권력을 차지했던 유생들을 문반과 무반 다 합쳐서 양반이라 불렀는데, 이들은 당시 전체 인구의 8% 정도였다. 하지만 18세기에 들어서면 이 숫자는 전체 인구의 절반이 넘었고, 19세기말에는 70%가 양반이 됐다. 국가의 의무를 지지 않는 특권층이 이렇게 많은 나라가 망하는 것이 당연했다. 지금 전 인구의 대부분이 족보를 가지고 있다는데, 양반만 가지게 허락됐던 족보는 16세기부터 생기기 시작했다니, 우리나라 족보의 진실성이 매우 의심스럽다. 이 많은 양반은 어디서 다 나타났는지 아는 사람은 다 안다. 임진, 병자 양난을 거치며 조선의 근본은 흔들렸고, 이후 엉터리 양반과 족보가 대거 등장한 것이다.

일제 강점기와 한국전쟁을 지나며 기존의 신분제는 완전히 붕괴하고 지금 우리나라는 가짜 양반과 졸부가 지배하는 세상이 된 것이다. 이들에게 물질적 성공을 통한 외적인 품격과 격조는 꼭 필요한 정신적 보상이 된다.

자본주의가 그 끝을 향해 달리고, 세계가 평화와 공존에서 멀어져 각자도생과 국가주의적 대립으로 치닫는 이 시점에, 우리 앞에 또 어떤 혼란과 파국이 기다리고 있을지 두렵다. 냉전의 붕괴와 미국 유일 패권의 시대의 끝에는 새로운 세계대전의 위기가 점차 커지고 있다. 역사를 배우면 인류사에는 일정한 흐름이 있음을 깨닫게 된다. 지금 우리에게는 서로 연대하고 돕는 진정한 품격과 격조가 필요하다. 팍스로마나 시대 끝에 게르만에 의한 대혼란이 있었고, 합스부르크 왕가 붕괴 뒤에는 양차 세계대전이 있었다. 역사상 가장 길었던 평화와 성장의 시대가 저물고 새로운 혼란이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 이 시점에, 모두의 현명한 판단이 필요하다. 인간으로서의 진정한 품격과 격조를 지키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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