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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력산업 민영화, 그 뒷이야기 35

청와대 회의와 대통령

by 요아킴


10년이 넘은 고물차. 이근석 교수는 이 차를 애마처럼 아꼈다. 가족들은 새 차를 마련하자고 졸랐지만, 그는 이 차가 좋았다. 그 세월 동안 이 교수와 자동차는 한 몸과 같았다. 이 교수는 오래된 구두나 옷도 함부로 버리는 것이 싫었다. 자신의 일부와의 헤어짐과 같이 느꼈다.


이 교수는 청와대 여민관 못미처에 있는 공용주차장에 차를 세웠다. 50여 미터를 걸어서 민원실 쪽으로 걸어가자, 노사정위원회 공공부문구조조정특별위원장을 비롯한 몇 명이 기다리고 있었다. 낯익은 양인식 위원의 모습도 보였다. 일행은 신분증을 제시하고 민원실 안의 대기실로 들어갔다. 민원실 안에도 여러 명이 대기 중이었는데 기획예산처와 산업자원부 관계자들도 보였다. 문재송 과장은 이 교수를 알아보고 다가와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이 교수의 배전분할 중단 결정으로 산자부는 초토화됐다. 자신의 목줄도 어떻게 될지 모르는 상황인데, 상관인 구성식 국장은 이미 대기발령 상태였다. 방심하다 급소를 찔린 그런 형태였다.


여민관 민원실에 모인 인원은 10명 가까워 보였다. 일행은 청와대 비서실 행정관을 안내에 따라 신원확인과 보안 검색을 마친 후 여민관 집무실 쪽으로 이동했다. 이들은 여민관 앞에서 행정관의 안내에 따라 작은 마이크로버스를 타고 청와대 본관으로 이동했다. 약 3분 후 본관 앞에 도착하자 다시 간단한 보안 검색 절차가 있었다. 행정관의 안내에 따라 일행은 본관 1층 회의실로 들어갔다. 이근석 교수는 행정관이 여민실에서 나눠줬던 출입증을 목에 걸고 이름표를 왼쪽 가슴에 붙이고 있었다. 이름표에는 공동연구단장이라는 직함과 함께 소속 대학교 이름이 적혀 있었다.


여민관.jpg 청와대 비서동 여민관


회의실 내부는 단출했다. 전체적으로 얕은 회색 톤의 방 한가운데에는 20여 명이 앉을 수 있어 보이는 짙은 갈색 긴 테이블이 놓여 있었다. 일행은 각자의 명패가 놓인 자리에 앉았다. 시간이 조금 지난 후 언론에서 익히 보였던 두 사람이 입장했다. 비서실장과 정책실장이었다. 두 사람은 참석자 모두에게 악수를 청하며 가볍게 인사했다. 실장들의 얼굴은 그리 밝지 않았다.


시간이 조금 흐른 후 회의실 입구에 서 있던 비서실 직원이 대통령의 입장을 알렸다. 자그마한 키에 단단하게 생긴 대통령이 웃는 얼굴로 회의실로 들어왔다. 이근석 교수로서는 대통령을 직접 만나는 것은 두 번째였다. 과거 경실련에서 활동할 때 당시 국회의원이던 대통령과 잘 기억나지 않는 어떤 토론회에서 만난 적이 있었다. 노동운동가, 인권변호사, 파격적인 장관 등 다양한 수식어를 붙이고 다니던 참신한 정치인으로 기억했다. 토론회에서 그의 말은 거침이 없었고 당당했고 논리도 정확했다. 좋은 기억으로 남아 있던 사람이었다. 이 교수로서는 대통령을 직접 만날 수 있을 것이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대통령은 미소를 머금고 좌중을 돌아보며 말문을 열었다. 이마의 깊은 주름살이 인상적이었다.


“반갑습니다. 바쁘신 분들을 이렇게 모이게 해서 죄송합니다만, 워낙 중요한 사안이라서요. 실제로 현장을 보고 연구하시는 분들과 함께 이 문제를 논의해 보고 싶었습니다.”


“저는요, 우리나라의 미래를 생각하면 에너지산업, 그중에서 전기와 관련된 분야가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전기는 우리 산업의 피라고 하더군요. 철강은 심장이고. 전기와 철강 없이는 다른 산업도 성장하는 것이 불가능하지요? 지난 정부 때 여러 분야의 개혁과 구조조정이 시도됐는데, 전력산업도 그중 하나로 알고 있습니다. 핵심은 한전의 독점에서 다양한 형태의 경쟁체제로의 전환이지요. 공기업 독점의 장단점과 민간이 참여하는 시장경쟁, 그 둘 사이에 우리가 있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한번 잘못 추진한 정책은 되돌이키기 어렵기에 신중한 접근이 필요하고, 그래서 현장에서 연구하신 분들과 이런 토론이 필요해 보입니다.”


대통령의 말은 거침이 없었다.


토론회는 정확하게 40분이 걸렸다. 먼저 산자부 에너지자원실장이 보고서에 대한 정부 입장을 설명했다. 발전과 배전의 완전한 경쟁체제가 이미 세계은행을 비롯한 국제사회에 약속된 내용임을 강조하며 노사정위원회의 결의문과 보고서의 문제점을 지적했다. 기획예산처 공공정책국장은 발전회사의 민영화 계획과 분할된 배전회사의 경쟁체제인 양방향 경쟁시장을 설명했다. 노련한 공무원들은 짧고도 정확하게 자신들의 계획을 전달했다. 대통령은 말없이 이들의 보고를 듣고 있었다.


보고가 모두 끝나고 대통령이 입을 열었다.


“잘 이해했습니다. 전력산업 자유화는 세계적인 추세이고, 미래의 투자를 위해 우리가 가야 할 길이라는 말이지? 자, 이제 이번 연구에 참여한 분들 의견을 듣고 싶습니다. 연구단 단장님, 아니 교수님, 저와 만난 적이 있지요? 혜화동 경실련 사무실에서 뵌 적 있어 보입니다?”


“예, 구면입니다.”


“이번 연구에서 고생 많으셨습니다. 단도직입적으로 묻겠습니다. 배전분할을 하지 말라는 결정의 이유가 뭔가요? 제가 이해하기 어려워서 그렇습니다.”


대통령의 질문에 이 교수는 설명을 시작했다. 국내 전력산업의 역할과 경제성을 먼저 설명했고, 해외의 실패 사례를 조목조목 나열했다. 그리고 결론적으로 지금은 한전을 더 분할하면 안 된다는 점을 강조했다. 한마디로 한전의 공공성이 중요하다고 역설했다. 그리고 캘리포니아를 비롯한 영미식의 급진적인 자유화의 상황을 설명했다.


이 교수의 설명을 듣던 대통령은 옆에 놓인 담배 한 개비를 꺼내서 물고 불을 붙였다. 깊이 담배 한 모금을 빨고 대통령은 잠깐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물었다.


“교수님 설명 잘 들었습니다. 제가 지금까지 알던 내용과 달라서 당혹스럽습니다. 독점 자체의 문제 보다 시대의 변화에 따른 유연성, 즉 일부 경쟁체제 도입을 통한 공공성 강화라고 저는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교수님을 비롯한 전문가들은 이와 다른 결론을 보이시는군요.”


회의장은 침묵에 빠졌다. 정부가 그동안 진행하던 정책을 반대한 것은 물론이고 대통령의 의중에서 반하는 결론을 주장하는 이 교수를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분위기였다. 회의 참석자들은 모두 대통령과 이근석 단장의 얼굴을 번갈아 보면서 눈치를 살폈다. 그때 에너지자원실장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희 산자부도 이번 노사정위의 결론을 존중합니다. 다만, 이 결론대로 최종 결정이 나게 되면, 우선 대외신인도에 문제가 발생합니다. 발전은 이미 2년 전에 6개 회사로 분할됐고 이번 배전 6개 회사로의 분할은 전력자유화의 마무리 단계입니다. 그리고 국내는 물론이고 해외 투자자들도 이번 우리 전력산업에 투자할 계획들을 세우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갑자기 중단한다는 것은 여러 가지 문제를 야기합니다.”


대통령은 말없이 듣고 있었다. 눈은 보고서에서 떼지 않은 상태였다. 그리고 다시 물었다.


“저 역시 막무가내 민영화는 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리고 분할 경쟁이 꼭 민영화를 전제로 하는 것은 아닌데요. 일전에 제가 대선에 나오기 전에 노조에서 찾아와서 했던 말을 기억합니다. 전력산업 해외매각을 반대한다고 했지요. 저도 이 부분은 찬성입니다. IMF 시절처럼 국가 자산을 해외에 헐값에 파는 것과 이번의 분할은 다르다고 봅니다.”


이 교수는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대통령의 시각도 파악이 됐다. 이분 역시 민영화나 해외매각에는 부정적이구나. 다만 지금까지 공무원들의 보고를 통해 경쟁체제 도입이라는 논리에 빠져 있다는 결론을 내리게 됐다. 이근석 교수는 정중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대통령님과 정부의 계획과 입장도 이해가 됩니다. 저희가 8개월이 넘는 시간 동안 다양한 자료도 검토하고 현장의 의견도 듣고 해외의 사례도 살펴봤습니다. 대통령님, 문제는 전력산업이 아직은 국가 주도의 독점이 유효하다는 점입니다. 독점이라는 문구가 부정적이기는 하지만 말입니다. 지난 YS 정부 때도 한전의 분할을 검토했지만, 투자비가 많이 들어가는 전력산업의 규모의 경제성, 그리고 공공성, 또 국가 안보와 직결되는 점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하면, 더 이상의 자유화는 위험해 보입니다. 한번 갈라버린 전력산업은 만약 문제가 생겨도 다시 통합하기가 어렵다는 불가역성도 있습니다. 캘리포니아와 온타리오, 뉴질랜드가 다 그런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저희는 그런 우려를 크게 느꼈습니다.”


이 교수의 말이 끝난 후 기재부 국장이 이를 반박하는 발언을 조심스럽게 했다. 대통령은 노사정위 공공특위 위원장에게도 질문을 했고, 위원장의 답변은 애매했다. 자신과 위원회는 연구단의 보고를 검토한 끝에 논리적 타당성이 있다고 판단했지만, 최종적인 결정은 정부의 몫이라는 식이었다. 노사정위의 역할은 정부에게 권고하는다는 말이었다. 대통령은 좌중을 둘러보며 묘한 미소를 띠었다.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를 이해한다는 표정이었다. 약간의 침묵이 흐른 후 대통령은 다시 이 교수에게 물었다.


“자, 이런 논쟁은 밤을 새우겠네요. 좋습니다, 좋아요. 제가 한 가지 제안을 하겠습니다. 모두를 만족시킬 수는 없겠지만요. 교수님, 그리고 위원장님, 일단 정부가 선언한 배전분할을 계획대로 진행하되, 해외매각을 포함한 민영화는 하지 않겠다는, 일종의 정부 약속을 담보로 하는, 그런 식의 절충은 어떨까요?”


순간 이 교수는 당황했다. 바로 이틀 전 밤에 걸려 온 김명자 교수의 우려가 그대로 드러난 것이다. 노사정위의 최종 결의문에도 한전 내부 사업부제라는 표현이 닮긴 것도 불만스러웠는데, 대통령은 배전분할을 민영화 불가라는 조건으로 추진하자는 의견을 내다니. 이런 제안이 대통령에게서 나올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원칙을 고집해야 하는가, 아니면 대통령의 제안을 받아야 하나. 청와대까지 이렇게 불러서 여러 사람의 의견을 물어보는 대통령이 또 있었던가. 모두가 이 교수를 답을 기다리는 눈치였다.


이근석 교수의 눈앞에 갑자기 부인의 얼굴이 떠올랐다. 평생을 함께 살며 항상 매사를 의논해 왔던 동지 같고 친구 같은 반려자의 얼굴이었다. 지난해 늦은 여름, 공동연구단 참여를 요청받았을 때, 부인은 의아해했다. 한전을 민영화하는 문제를 놓고 연구단을 만든다는 사실이 궁금했기 때문이었다. 또 한편으로는 그 결과가 미칠 후폭풍이 걱정되기도 했다. 하지만 이 교수가 참여를 결정하자 늘 옳은 길을 가는 남편에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 올해 1월 초, 두 달 예정으로 해외 조사를 떠나는 날, 무거운 가방을 끌고 나서는 이 교수를 향해 한마디 했다.


“근데 여보, 한전이 도대체 뭘 잘못한 건가요?”


해외 조사 과정에서 이 한마디 물음이 항상 귓전을 맴돌았다. 구조개편이든 구조조정이든 그 어떤 이름을 붙이든 간에 기존의 체제 또는 시스템에 심각한 문제가 있을 때 외부의 강력한 충격이 필요하다. 전력회사의 개편이 필요한 경우는 정전이 잦거나, 전기요금이 너무 높거나 등의 경우가 돼야 한다. 좀 더 넓게 보면 국영 전력회사의 경우에는 관료주의가 팽배해서 국민적 개혁의 요구가 많을 때 또는 부정부패가 만연할 때 민영화 같은 조치가 필요하다. 주로 남미나 아시아권에서 많이 목격되는 현상이다. 그런데, 한전이 과연 그렇게 방만하고 전력서비스 수준이 낮은 기업이던가? 그게 아니면 굳이 위험한 자유화와 민영화를 들이댈 이유가 있는가? 이게 이 교수가 스스로 물은 질문이었다.


답은 쉽게 나왔다. 첫 방문지였던 캘리포니아 에프리. 연구단의 방문을 흥미로운 시각으로 보던 에프리 연구자들은 입을 모아서 의견을 밝혔다. 한전은 건강한 전력회사이며, 한전의 서비스 수준은 세계적이며 전혀 분할과 민영화를 고려할 필요가 없다. 그리고 한번 시작된 자유화는 되돌릴 수 없으므로 신중히 생각하라. 물론 이날의 토론이 이 교수의 마음을 완전히 굳히게 만든 것은 아니었지만 그 효과는 매우 컸다. 이후의 일정에서도 해외 전문가 대부분의 의견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게 바로 최종보고서의 방향을 결정했다.


“ 대통령님, 저희 보고서를 수정할 의견은 없습니다. 이게 우리 연구단의 결정입니다.”


누군가의 가벼운 탄식이 들렸다. 대통령의 정중한 부탁에도 물러서지 않는 이 교수를 모두가 놀란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공공특위 위원장도 안타깝다는 표정으로 이 교수를 쳐다봤다. 모두 난감했다.


이 교수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대통령의 표정이 순간 굳었다가 이내 풀렸다. 작은 미소를 머금고 대통령은 말했다.


“교수님의 입장, 강하시네요.”


대통령은 담배 한 모금을 깊이 빨고 나서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려서 정책실장을 쳐다보며 말했다.


“실장님, 제가 보기에도 연구 결과를 뒤집는 것은 허락하지 않으실 것 같네요. 저도 이해합니다. 실장님께서 하실 말씀 없나요?”


실장은 안경을 고쳐 쓰며 주변을 둘러봤다. 왜 자기에게 이런 질문을 하는지 난처하다는 표정이었다. 그러다 곧 대답했다.


“제가 뭐라고 답하기는 어렵습니다만, 배전분할 중단을 정부가 받기는 어렵다고 봅니다. 배전과 발전의 완전 분리와 자유화는 지난 정부부터 일관되게 추진해 온 정책이었고, 정책의 일관성은 중요합니다. 단장님을 비롯한 노사정위원회의 이해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노조의 걱정은 이해합니다. 민영화를 하지 않겠다는 약속과 직원들의 고용승계 약속은 정부가 해 줄 수 있습니다. 이 정도 선에서 서로 양보하고 타협하는 게 어떨까요?”


“우리 연구단이 내린 결정에서 저희는 양보가 불가합니다. 노사정위의 결의문도 어느 정도 저희가 양보한 수준입니다. 배전분할은 중단돼야 한다는 것이 저희 결론입니다.”


말을 마친 이 교수는 주머니에서 담배 한 개비를 꺼냈다. 그리고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라이터를 켰다. 모두 놀란 표정으로 쳐다봤다. 회의장 구석에 있던 행정관이 깜짝 놀라서 다가왔다. 약간 놀란 표정으로 이 교수를 쳐다보던 대통령은 행정관에게 손짓으로 재떨이를 갖다주라고 지시했다. 당황한 표정의 행정관은 재빠른 동작으로 재떨이 하나를 이 교수 앞에 내려놨다. 자욱한 담배 연기가 회의실 천장으로 올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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