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력산업 자유화의 종지부
“정부의 공공부문 민영화의 첫 제동이 걸렸습니다.”
2004년 6월 17일, 저녁, KBS 9시 뉴스의 헤드라인이었다. 공중파 3사는 물론이고 뉴스 전용 채널의 머리기사가 모두 유사한 제목으로 도배가 됐다. 표현은 조금씩 달랐지만, 내용은 같았다. DJ 정부 이래 추진돼 온 공기업 및 공공부문 민영화와 구조조정이 커다란 암초를 만나서 좌초했다는 식이었다. 우리나라 언론의 특성상 이게 무슨 의미인지, 국가 경제와 국민 생활을 위해 옳은 일인지 아닌지에 대한 논평은 전혀 없었다. 의무적인 중립만 지키는 듯한 메마르고 건조한 보도였다. 모든 언론이 다 그랬다.
소위 말하는 보수 언론과 경제지들은 이를 반대하는 논조를 표현했어야 했다. 자기들이 떠받드는 자유시장경제와 민영화의 신앙을 깼으니까. 하지만 그들이 극도로 싫어하던 진보 정부의 정책이 중단됐기 때문에 그들로서는 좋다는 말도 싫다는 말도 하지 못하고 어정쩡했다. 비겁했다. 반면 대다수 진보 매체는 민영화 중단을 일단 환영했다. 어느 쪽이 조금이라도 더 솔직한 가는 이 보도를 통해서도 볼 수 있었다.
6월 17일 자로 이런 사실들이 보도되자 전력 문제를 조금이나 아는 사람들은 발칵 뒤집어졌다. 전력노조를 지지하며 노사정위원회로 배전분할 문제를 끌고 가는데 도움을 준 한국노총은 즉각 환영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사회공공성을 내세우며 공기업 민영화를 반대해 온 여러 시민사회단체 역시 성명을 통해 배전분할 중단을 지지한다는 견해를 밝혔다.
한전 내부는 어리둥절한 분위기였다. 일부 약삭빠른 직원들은 배전이 분할되고 민영화까지 따라오면 살아남기 어렵다는 생각에 송변전 등과 같은 다른 분야로 옮길 생각까지 하고 있었는데 느닷없는 분할과 판매 자유화 중단 소식에 이유를 몰랐다. 노조는 이 활동을 대외적으로 알리기가 어려웠디. 결과를 예상하기 힘들었기 때문이었다. 아니, 힘들다기보다 실패할 가능성이 더 커 보였던 것이 사실이었다. 굳이 노사정위원회까지 문제를 끌고 가서 결국 배전분할을 막지 못한다면 그 후폭풍이 클 것이기에 그랬다. 회사 경영진들도 마찬가지였다. 노사정위원회에서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기대는 크지 않았지만, 마지막 희망의 불씨를 살리는 마음으로 노조를 은근히 지원했다. 겉으로는 정부를 지지하는 척하면서도. 그래서 한전 내부 직원들은 배전분할 중단이라는 결정이 의아했고, 대부분은 대통령과 정부의 갑작스러운 정책 선회 정도로만 이해했다. 이런 상황이 나중에 문제를 좀 일으키게 된다.
언론보도가 요란했던 밤이 지나고 다음 날 아침, 김준형 위원장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출근했다. 전력노조 사무실은 묘한 흥분이 느껴지는 분위기였다. 언론에서만 시끄러웠지 사실 공식적으로 아무 변화는 없었다. 딱 하루가 지났을 뿐이기에. 김 위원장은 늘 하던 것처럼 사무실을 돌면서 노조 집행부 임원들과 상근자들에게 일일이 인사를 했다. 최용석 앞에 오자 김 위원장은 묘한 웃음을 머금은 얼굴로 악수를 청했다.
“최 부장, 고생했다.”
“아, 제가 뭐 한 게 있나요. 위원장님과 우리 모두의 노력이었지요.”
“아니야, 최 부장 없었으면 답이 안 보였을 것 같아. 해외 실사 누가 준비했겠어? 고생했어.”
둘은 가볍게 손을 잡고 웃는 얼굴로 서로를 바라봤다. 사실 김 위원장의 말이 빈말은 아니었다. 당초 공동연구단 정식 구성원이 아니었던 최용석은 김 위원장의 의지에 따라 무리하게 연구단을 따라나섰다. 사전에 방문 기관 섭외도 거의 최용석의 의도에 맞춰 진행됐지만 그가 함께 가서 전력 민영화의 부정적인 의견이 최대한 묻어 나오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 김 위원장의 생각이었다. 이근석 단장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연구단에 끼었던 최용석은 시간이 지나면서 나머지 교수들과도 제법 잘 어울리게 됐다. 이근석, 이병호 두 중립 측 교수들은 물론이고 김창석, 신중진 두 민영화 찬성 쪽 교수들과도 친밀하지는 않았지만 그럭저럭 말을 트게 됐고 때로는 어울려 맥주잔을 기울이기도 했다.
방문 기관에서의 모든 대화는 한전 실무자가 녹음을 했다. 그와는 별도로 최용석은 대화 내용을 노트에 받아 적었다. 그에게는 통역이 필요 없었기에 때로는 더 정확하게 회의 내용을 기록할 수 있었다. 두 달 동안 그렇게 적은 기록이 노트 세 권이 됐다. 그리고 이를 컴퓨터로 타이핑 한 내용이 아무런 반대도 없이 최종보고서의 공식 첨부 자료로 채택됐다. 역사에 남게 된 것이었다. 최용석은 때로는 토론 과정에 직접 참여하기도 했다. 주제넘은 행동이었지만 이근석 단장은 물론 아무도 이를 문제 삼지 않았다. 덕분에 최용석은 자유롭게 연구단의 활동에 참여했고 마치 정식 구성원처럼 행동할 수 있었다.
최용석은 기관방문이 끝난 날 밤마다 저녁에 한전의 이강산 구조조정실장, 연구단의 노조 측 위원 김형자, 안현필 교수와 함께 모여서 그날의 토론 결과를 요약했고 다음 기관 방문에 대비하는 공부를 함께 했다. 이강산 실장은 한전에서 구조조정과 민영화에 관한 전문가로서 전력산업 자유화 등에 관한 해외사례, 전력시장 운영, 그리고 기술적인 부분까지 간단하고 명료하게 다른 참석자들에게 학습시켰다. 이런 공부 덕분에 기관별 토론회에서 해당 기관 관계자들로부터 민영화의 부정적인 부분에 대한 증언을 끌어낼 수 있었다. 이는 중립위원이었던 이근석, 이병호 교수의 마음을 움직이는데 좋은 영향을 주게 된 것이다. 노조 측이 추천해서 방문하게 된 기관에는 최용석을 아는 친구들이 많았고, 이들은 적극적으로 노조에 유리한 내용을 조리 있게 설명했다. 이 모든 일들이 모여서 배전분할 중단이라는 결론을 끌어내는 데 도움을 준 것이다.
시간이 지나자, 김 위원장의 집무실은 말 그대로 문지방이 닳을 정도였다. 이번 결정에서 김 위원장의 역할을 아는 한전 내 고위 간부들의 방문이 줄을 이었다. 항상 정부의 지시를 하늘의 계시처럼 모시던 한전 고위 간부들은 정부 정책의 틀을 바꿔버린 노조, 특히 김준형 위원장의 활동에 놀랐고, 앞으로 한전은 물론이고 노동계에서 김 위원장의 위상이 크게 높아질 것을 예상한 것이다. 불빛을 쫓아 모이는 나방들처럼 이들은 갖은 찬사를 위원장에게 바쳤고 그의 눈에 잘 띄려는 노력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전까지는 김 위원장의 존재를 크게 신경 쓰지 않았고, 전력노조조차 하찮게 보던 사람들이 이렇게 바뀌었다. 이게 세상의 인심이다.
배전분할 중단의 파문은 크게 일었다. 당장 매각 대상이었던 한국남동발전 주식회사의 민영화가 뒤로 밀리기 시작했다. 남동발전을 인수하려 준비를 하던 미국계 자본들이 하나씩 한국을 떠났다. 이들은 캘리포니아의 자유화 과정에서 크게 돈을 벌었던 발전전문 기업들과 금융계 투자자들이었다. 발전량 조작을 하면서 캘리포니아 전력시장을 교란했던 엔론의 경영진은 미국 법정에서 중형을 받고 감옥에 갇혔고 회사는 파산했다. 서던에너지, 미란트, 엘파소, 릴라이언트 등 엔론과 함께 시장조작을 벌였던 기업들도 주 정부가 전력시장을 폐쇄하고 재국유화하자 하나씩 망해 나갔다. 한국의 배전분할 중단은 세계적으로 신자유주의적 전력산업 자유화가 끝나간다는 사실을 알려 주는 상징이 됐다.
해외에서 전력노조로 문의가 쏟아졌다. 당장 비슷한 방식으로 발전과 배전을 자유화하려던 태국의 노동조합에서 요청이 왔다. 김준형 위원장과 최용석은 태국을 방문해서 배전분할 중단의 경험을 공유했고, 태국 노동자들은 큰 관심을 보였다. 국제공공노련 PSI와 세계에너지연명 ICEM과 같은 국제 노동단체에서도 이에 대한 보고서를 요청했다. 최용석은 바빴다. 국제담당자로서 한국의 민영화 저지 사례를 알리기 위해 세계를 돌아다녔다.
김준형 위원장 역시 유명해졌다. 전력노조가 공기업 중에서는 가장 규모가 큰 단일 기업별 노조이기는 했지만, 40대 초반의 나이로 처음 위원장이 됐기 때문에 노동계 내부에서 존재감이 별로 없었다. 하지만 배전분할이 중단되는 큰 성과를 낸 장본이라는 소문이 퍼짐에 따라 김 위원장은 노동계에서 중요한 인물로 떠올랐다. 그리고 이는 향후 그의 이력의 가장 중요한 자원이 된다.
전기를 만들어 소비자에게 공급하는 전력산업은 국가의 기간산업이다. 기간산업이라는 말은 다른 산업을 뒷받침한다는 기초적인 산업이다. 흔히 철은 산업의 쌀, 전기는 산업의 피라고 부른다. 대한민국의 세계적으로 유례없는 단기간 산업화는 독재정권의 강력한 리더십, 유능한 공무원들의 효율적인 행정 처리, 산업현장에서 희생을 무릅썼던 공기업 노동자들의 노력 등이 한데 어우러졌던 덕분이었다. 물론 독재정권의 인권과 노동기본권 탄압이었다는 비판을 피할 수 없지만, 당시 빈곤 상태였던 국민 다수는 이에 순종하는 분위기였고 사실 인권과 노동기본권에 대한 이해도 부족했다. 이를 통해 산업화는 성공했고 오늘과 같은 선진국 대열에의 합류도 가능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반독재 투쟁을 벌였던 민주, 노통 운동가들에 의해 민주화도 산업화와 함께 이루어졌다. 산업화와 민주화를 동시에 성공한 사례는 다른 나라의 역사에서 찾아보기 쉽지 않을 우리 민족만의 성과가 아닌가.
그해 6월 말, 전력노조는 국제연대 활동에서 도움을 크게 줬던 세계의 동지들을 서울로 초청했다. 김 위원장은 행사의 이름을 배전분할승리보고대회라고 지었다. 여기에는 전국에서 올라온 전력노조의 지부장, 중앙위원, 중앙집행위원 등의 간부들이 참석했다. 해외에서 초청한 인사는 미국의 유진 코일 박사, 캘리포니아 CPUC 칼 우드 커미셔너, 퍼블릭 시티즌의 타이슨 슬로컴, 캐나다 토론토 하이드로 노조위원장 부르노 실라노, 영국 그리니치대학 스티브 토마스 교수 등 모두 다섯 명이었다. 더 많은 해외 동지를 초대할 수도 있었지만, 일정과 재정 문제로 제한이 생겨서 노조와 가장 친했던 사람들로만 선별하게 됐다. 국내에서는 공동연구단의 이근석, 이병호, 김영자, 안현필 교수 모두를 초대했다. 노조는 한전 본사 강당에서 기념식 및 전력주권사수결의대회를 열었다.
김준형 위원장과 전력노조의 배전분할반대투쟁은 이렇게 마무리 됐다. 그리고 그들 앞에는 새로운 도전이 계속 기다리고 있었다.
1999년, 김대중 대통령이 취임한 후 IMF 국난극복이라는 국가적 명제를 해결하기 위해 시작했던 공공부문구조조정의 핵심은 민영화와 해외매각이었다. 독점 공기업을 중심으로 한 공공산업의 민영화, 아니 사유화는 세계적인 유행으로 번졌고 대부분 국가에서 실패로 끝났다.
이 정책의 성공과 실패의 기준은 간단하다. 그 과정에서 누가 혜택을 입었는가에 있다. 헐값에 공공자산을 사들인 국제 투자자들은 설비 매각,, 인력 감축 등과 같은 살 빼기 작업 후 이를 다시 2년 안에 되팔았다. 그 과정에서 수많은 실업자가 생겨나고 공공요금은 치솟았다. 공공산업은 모두 납세자의 세금으로 세워졌는데, 탐욕스러운 민간투자자들은 이를 싸게 사서 비싸게 되팔았고, 결국 납세자인 국민들의 공공서비스는 무너졌다. 누가 승자인지는 자명하다. 그리고 그런 해외매각과 민영화가 어떤 사람들의 힘에 따라 좌지우지되는가도 모두 잘 알게 됐다. 대한민국의 전력산업도 그런 순간을 맞이할 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