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이야기와 미래
1997년 12월 3일, 온 나라를 강타했던 국가부도 사태. 흔히 IMF 사태라고 부르는 이 사건은 대한민국을 통째로 바꾸었다. IMF 이전의 대한민국과 이후의 대한민국은 완전히 다른 나라이다. 고도성장의 대한민국은 모두가 성장하던 나라였다. 개인의 소득도 나날이 높아갔고 국가의 재정도 기업의 매출도 항상 두 자릿수 이상 쭉쭉 올라갔다. 물론 이런 성장에는 인플레이션이 그림자처럼 따라왔지만 모두의 수입이 늘어나던 시대에 아무도 이를 걱정하지 않았다. 국가는 사회보장을 늘려갔고 일자리는 넘쳐났으며 기업은 차입 경영을 하면서도 평생직장을 약속했다. 노동기본권 의식도 열악했지만 노동자들은 미래를 보며 현실을 참아 왔다. 중산층은 두꺼워졌고 모두가 돈을 모았다. 장밋빛 미래만 보였다.
이런 거품이 한꺼번에 꺼지면서 부도 사태가 발생했다. 김영삼 정부는 미국 주도의 자유무역 확대를 믿고 WTO에 가입했고 경제의 대문을 활짝 열었다. 세계화라는 구호 아래 우리는 꿈에 그리던 선진국의 대열에 낀다고 꿈에 부풀었다. 하지만 너무 일렀다. 경쟁력이 그리 강하지 못했던 우리의 경제구조, 그중 가두리 양식장과 같은 환경에서 보호받던 후진적이던 금융산업은 야수와 같은 투기자본 세력의 먹잇감이 됐다. 그리고 IMF 구제금융 이후의 대한민국은 오늘날과 같은 빈부격차와 실업자가 넘치는 시대로 변했다. 평생직장은 없고 사회안전망은 불안정하고 사회는 분열돼 있다.
IMF 극복이라는 미명으로 DJ 정부는 돈이 될 만한 자산은 모두 해외에 팔아야 했다. 금융, 철강, 철도, 통신, 전력과 같은 기간산업도 모두 포함됐다. 국민 세금으로 성장했던 여러 국책은행이 헐값에 투기자본의 손으로 넘어갔다. 통신과 철강도 민영화했다. 그리고 전력산업 차례가 됐다. 이미 영미권을 중심으로 독점 국영 전력회사를 쪼개서 민영화시키는 소위 말하는 전력산업구조개편은 진행되고 있었다. 당시 정부는 대형 석탄발전소 몇 개라도 팔아서 급한 외화를 벌어들이고 싶었다. 그런데 누군가가 요구했을 것이다. 산업 자체를 자유화하라고.
1999년에 확정된 전력산업구조개편기본계획은 영국식 모델을 그대로 따라 했다. 한전을 배전과 판매 각 6개의 회사로 만들어 경쟁하는 구조로 바꾸고, 그 회사들을 하나씩 민영화한다는 것이었다. 이 모든 계획은 2008년에 마무리되는 되기로 예정됐다. 노조와 시민사회단체의 저항으로 우여곡절을 겪은 후 발전부문은 2001년에 6개로 쪼개졌다. 전력거래소라는 전력시장도 새로 생겼다. 양쪽의 자유경쟁을 위해서는 배전과 판매부문을 또 6개 지역별 회사로 나누는 것이 배전분할이었다. 정부와 해외 투자자로서는 모든 과정이 잘 될 것으로 보였다. 그런데, 2004년 6월, 배전분할이 멈췄다. 발전회사 민영화도 함께 중단됐다. 발전은 경쟁체제, 판매와 배전은 한전 독점체제가 20년이 넘게 어정쩡하게 유지되고 있다. 심각한 모순이다.
이제 세상은 새로운 시대로 들어가고 있다. 인공지능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다. AI라 불리는 인공지능을 운영하려면 엄청난 전기가 필요하다. 여러 데이터를 저장하는 데이터센터도 필요하다. 기후위기에 대비하기 위해 재생에너지로의 전환도 필요하다. 모든 에너지가 전기로 바뀌는 전기의 시대이다. 정부는 야심 찬 계획으로 화석연료 발전소 문을 닫고 재생에너지의 시대를 열고 싶어 한다. 동시에 AI 강국으로 뻗어 나기 위한 노력도 한다. 막대한 전기가 필요하다. 그것도 재생에너지로 만든 깨끗한 전기가 필요하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우리의 좁은 국토, 다른 나라와 연결되지 않는 전력선, 부족한 일조량과 바람, 모두 어렵다. 힘들게 호남에서 태양광으로 만든 전기가 대한민국의 60%의 인구, 돈, 설비가 모인 수도권으로 올라오지 못한다. 호남과 충남의 주민들은 철탑과 변전소 건설을 막고 있다. 난맥이다. 지혜가 필요하다.
배전분할 중단을 끌어냈던 이근석 교수는 대학에서 은퇴, 경기도 전원주택에서 만족하는 노후를 보내고 있다. 이 교수는 지금도 자신이 배전분할 중단을 결정하는데 일조한 사실에 대해 자부심을 느낀다.
노조 측 위원이었던 김명자 교수 역시 교수직에서 퇴직했다. 그녀는 여의도에 있는 진보적인 학자들이 함께 만든 연구소 이사장 역할을 하며 분주한 일상을 보내고 있다.
안현필 교수는 아직 현직 교수이다. 학생들에게 고전 읽기를 장려하는 한편 에너지는 물론 다양한 분야에 연구를 진행 중이다.
정부 측 위원으로 참여해 배전분할 추진에 실패를 맛본 김창석 교수는 보수당의 비례대표 국회의원을 한 차례 지냈고, 현재 개인적인 연구 활동을 하고 있다.
신중진 교수는 자신이 몸담았던 대학의 부총장까지 지냈고 현재 퇴직한 상태이다.
김준형 위원장은 전력노조 위원장을 네 번 지내고 한국노총 위원장을 거친 후 현재 재선 국회의원으로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
끝으로, 최용석은 전력노조에서 9년여 동안 국제활동을 전담하며 다양한 경험을 쌓았다. 배전분할 저지 투쟁의 성공을 여러 국제 노동단체에 전파하는 활동을 했고, UN에서 열린 관련 회의에도 참석했다. 이후 한전에서 경영진의 요청으로 부장으로 특별 승진을 해서 해외사업과 국제업무 등을 맡았다. 하지만, 그의 이런 신분 변화는 한전 내부의 경쟁자들에게는 부정적인 인식을 주게 됐고, 이는 그의 한전에서의 경력을 부장으로 계속 머물게 했다.
기후 위기, 에너지전환, 에너지 고속도로, AI, GPU 등 전기를 둘러싼 많은 이야기가 매일 오간다. 분명한 사실은 전기는 하나의 물리적인 존재이며, 인류는 전기를 사용함으로써 획기적인 에너지 혁명을 이룩했다는 것이다. 화석연료를 이용한 산업혁명 이후 가장 큰 에너지 혁명이 지금 벌어지고 있다. 이 혼돈의 시대에서 한 단계 상승하는가 아니면 후퇴할 것인가는 우리의 선택에 달려 있다.
에너지를 둘러싼 많은 주장, 영상자료, 서적이 넘치는 이 시대, 모두가 자기의 이야기를 한다. 아이디어 차원의 담론이 아무리 넘쳐나도 전기라는 매우 단순한 물리적 존재의 특성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이 전기라는 존재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모두가 공평하게 사용해야 하는 대표적인 공공재이다. 누군가 특정 세력이 돈벌이로만 사용하게 되면 사회 전체에 큰 악영향을 주게 된다는 말이다.
UN에서 열린 어느 회의에서 나왔던 단순하면서 명쾌한 명제가 하나 있다.
“Electricity is a basic human right.”
“전기는 인권이다.”
Electricity is a basic huan righ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