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애 첫 암진단, 다정관 3610호

암 수술과 그 후

by 요아킴

나이가 들어가니 회사에서 주기적으로 건강정밀검사를 해준다. 개인이 하기에는 부담스러운 금액인데 회사에서 해주니 고맙다. 작년에 그 두 번째 생애주기검사를 했다. 뇌, 심장 등에서 약간의 의견이 나왔지만 정밀하게 다시 검사하니 별일이 아니었다.


문제는 전립선이었다. 혈액 검사의 일부로 이름도 어려운 PSA, 즉 전립선특이항원검사에서 뭔가 이상한 것이 발견됐다. 이후 의사들은 전립선에 대해 집중적으로 초음파검사, 복부 MRI 촬영, 마침내 조직검사까지 했다. 이 모든 과정이 넉 달이 넘게 걸렸다. 그리고 최종 결과를 들으러 갔다. 주치의는 얼굴에 약간의 미소까지 띠고 암이라고 했다. 다행히 초기라서 수술로 완치할 수 있다고.


의사들은 말을 참 쉽게 한다. 물론 직업이 그러하니 늘 그런 병자들을 보고 그들을 상대하니 매사에 담담하겠지. 하지만 막상 ‘당신 몸속에 암 덩어리가 있소’라는 말을 듣는 사람의 입장은 다르다. 난생처음 내 몸의 세포 일부가 암으로 변했다는 말을 담담히 듣고만 있기는 어려웠다. 사실 암이 아닐 것으로 기대했다. 하지만 예상과 반대 결과가 나왔고 그걸 받아들이지 않을 수는 없었다. 일사천리로 수술 날짜를 잡고 병원을 나왔다. 햇볕은 따가웠고 모든 게 별로 달라지지 않았지만 나는 변했다. 난 이제 암 환자다.


입원 첫날, 환자로의 변신


임 수술을 위한 입원이 예정된 일요일 늦은 오후, 주섬주섬 준비물을 챙겨서 집을 나섰다. 운전석의 아내도 나도 별말이 없었다. 병원까지는 기껏해야 10분 거리. 차가 달리는 동안 주변 풍광을 보며 속으로 되뇌었다. 쟤들을 다시 볼 때면 내 몸속의 장기 하나는 사라지고 없겠지. 사람의 5장 6부 가운데 필요 없는 게 있겠나 마는 이제 나는 그중 하나를 없애려 한다. 거기에 암이라는 놈이 자라고 있어서. 수술을 기다리는 동안 전립선암 전문가가 됐다. 전립선인지 전립샘인지 어디 있고 뭐 하는 것인지도 몰랐지만 약 한 달가량 수술을 기다리는 동안 이리저리 조사했다. 그리고 논문 한 권 정도 쓸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전립선이라는 놈을 이해하게 됐다. 이렇게 탐구하게 된 이유는 간단했다. 왜 이런 병이 걸렸고 어떻게 하면 고가의 수술을 피할 수 있을까 하는 막연한 생각 때문이었다. 결론은 원인은 모른다와 수술을 피할 요령은 없다는 것이었다.


일요일의 대학병원 로비는 어두웠다. 외래환자가 없기에 내부는 차분하기보다 오히려 적막했고 병원은 최소한의 조명만 유지하고 있었다. 건장한 체구의 경비직원이 입구에서 물었다.


“선생님, 어디 가시나요?”

“저…. 입원하러 왔는데요.”

“아, 그러세요. 보호자는 어디 계시나요? 같이 안 오셨나요?”

“혼자 왔습니다.”

“아, 예…. 저쪽 정면의 입원 수속 카운터로 가 주십시오.”


경비직원을 지나 입원 수속 카운터로 향하며 생각했다. 오늘은 두 발 멀쩡히 입원만 하는데, 그리고 수술은 화요일 내일모레인데 뭐 하러 보호자가 같이 들어올 필요가 있나. 그러다 잠깐 스치는 생각. 집사람을 그냥 돌려보내지 말 걸 그랬나? 어차피 요새 별로 사이도 안 좋아서 차에서 내리고 뒤도 안 돌아보고 혼자 왔는데, 좀 그런가? 입원실은 다정관이라는 건물의 6층, 3주 전 조직검사 때 하룻밤 입원했던 같은 공간이었다. 다만 이번에는 열흘 동안 입원하기에 6인실이 아닌 4인실로 업그레이드. 침대를 배정받고 환자복으로 갈아입고 나니 다시 환자가 됐다.


유니폼이라는 게 참 웃긴다. 그걸 입는 순간 그 조직의 소속감은 물론이고 그 옷이 지향하는 그대로의 사람으로 변한다. 중학교 때 처음으로 까만색 교복을 입고 머리를 빡빡 밀었다. 거울을 보니 완전 일본군 졸병의 모습이었다. 일본이 망하고 독립한 지가 45년이 됐던 그 시점까지 우리는 일본 해군 군복과 같은 검은 교복을 입었다. 3학년이 되자 전두환 대통령이 두발 자유화, 즉 까까머리 강요를 없앴다. 고등학교로 올라가는 순간 일본식 교복이 폐지됐다. 진짜 군대에서 군복을 입는 순간 본능에만 충실한 군인이 된다. 사람에서 군인으로 바뀐다. 병원에서 환자복을 입고 거울을 보면 어딘가 아파 보인다. 옷이 날개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것이 아니다.


환자복을 입은 직후 손목에는 바코드가 찍힌 종이 팔찌가 채워졌다. 나는 환자 번호 0084774번으로 이 병동은 물론 병원 전체의 컴퓨터에 기록될 것이다. 간호사들이 줄줄이 다녀가면서 뭔가 하나씩을 내 몸에 찔러 넣었다. 주사기 네댓 개가 꽉 차도록 피를 뽑았고, 링거를 세 개 팔목에 꽂았다. 병동에 들어온 지 30분 만에 나는 누가 봐도 완벽한 환자의 모습으로 변했다. 간호사들도 내가 어디가 병이 들고 양 손목에 바늘을 가득 꽂은 모습으로 무기력하게 드러눕자 안심이 되는 얼굴로 모두 돌아갔다. 난 이제 환자다. 이 꼴로 어디를 가도 나는 환자다. 병원 전체가 멀쩡히 걸어 들어온 내가 환자로 변해서 침대에 힘없이 누워있는 것으로 확인하고 안도하는 분위기 같다.


입원실에는 침대가 모두 네 개가 있었지만 그중 하나에만 어떤 분이 앉아 있었다. 통성명하고 보니 하필이면 같은 아파트에 사는 분이었다. 70대 중반으로 토요일 밤에 갑자기 소변이 안 나와서 119 구급차를 타고 응급실로 와서 입원했단다. 급한 대로 응급실에서 소변줄을 끼워 소변을 해결했지만, 비뇨의학과 전문의가 없는 주말이라 꼼짝없이 월요일까지 기다리고 있었단다. 토요일 밤을 혼자서 보낸 후라 일요일 오후에 입원한 나를 반가워했다. 이렇게 병원 동기가 생겼다. 입원실에서 첫날밤은 이렇게 지나갔다.


둘째 날, 잠깐의 죽음을 준비하는 시간


여럿이 모인 다인실 입원실에서는 한마디로 숙면을 제대로 할 수 없다. 새벽 시간 도대체 몇 시인지 모를 시간대에 간호사들은 제일 먼저 환자를 깨우며 혈압을 잰다. 이건 매일 있는 루틴의 첫 번째로 이제 당신은 다 잤다는 신호와 같다. 보통 밤잠을 자다 새벽에 재는 혈압은 활동시간과 비교하면 상당히 낮다. 혈압을 재고 난 후 다시 잠이 들만하면 혈당을 재러 온다. 물론 모든 환자에게는 아니라 당뇨병이 있거나 주의할 환자들만 대상이었다. 그리고 5~6시가 되면 각종 검사장으로 환자들이 한 명 두 명 불려 나간다. 외래환자들이 오기 전부터 입원환자들은 CT, 엑스레이 등과 같은 각종 촬영, 심전도검사 등 다양한 제목의 검사장으로 한두 명씩 나갔다 돌아온다. 입원환자 대부분은 수술을 앞둔 사람들이기에 수술 이전에 필요한 각종 검사가 수술 하루 이틀 전에 진행된다.


난 오전 5시에 가슴 부위 엑스레이를 촬영했다. 수술 전날 폐와 심장의 상태를 미리 점검하는 모양이다. 완전 마취 수술에서는 폐활량이 매우 중요하다. 죽음과 같은 전신 마취는 이를 감당할 체력이 없으면 매우 위험한 과정으로 변모한다. 마취전문의들의 고충에 대해 전에도 들은 적이 있지만, 아무튼 단순히 잠을 자는 것은 분명히 아니다. 어떤 사람은 전신 마취를 죽음 직전의 상태, 즉 가사상태라고도 표현했다. 그만큼 위험한 과정이다.


그리고 11시경에 역시 태어나서 처음으로 골스캔이란 것을 했다. 말 그대로 온몸의 뼈의 상태를 촬영하는 모양이었다. 전립선에 생긴 암이 혹시 주변의 뼈, 특히 척추 쪽으로 퍼지지 않았나를 살펴본다고 했다. 전립선암은 초기에 성장 속도가 매우 느리다고 한다. 그리고 전립선 바깥으로 퍼져나가는 속도로 늦다고 한다. 그래서 농담조로 전립선암은 착한 암이라고 한다. 착한 암이라는 이 형용모순이 웃기기는 하지만, 그 암을 앓는 환자로서는 다행스러운 일이다. 위암을 비롯한 일부 암은 세포 성장과 전이 속도가 너무나 공격적이라서 걸리는 순간 말기로 이어진단다. 반대로 전립선암은 전이 속도도 느리고 통증도 없어서 생겨도 모르고 세월이 지난다고 한다. 그러다 몸의 이상을 느껴서 발견하면 이미 말기 암으로 변해있고, 아무리 순한 암이라도 말기에는 생존이 어렵다. 나처럼 초기에 다른 검사과정에서 발견한 사람은 천운을 타고났다고 한단다. 암튼 고맙다. 정밀점검을 해준 회사와 초기에 잘 보이지도 않는 내 암세포를 끝까지 물고 늘어진 의사님들. 아미 이번에 못 찾았으면 한 10년 지나서 말기가 다 돼서야 발견하지 않았을까.


입원 3일째에 있을 수술은 로봇을 이용한 복강경 수술이란다. 기존에는 의사가 직접 아랫배를 갈라서 깊숙한 곳에 있는 전립선을 절개해 냈는데, 전립선의 위치가 수술을 매우 어렵게 했단다. 이 과정에서 주변의 다양한 신경조직, 특히 남성의 성기능과 관련된 조직들을 훼손하는 일이 많았다고 한다. 그런데 배를 가르지 않고 구멍을 뚫고 막대기를 집어넣는 복강경 수술 덕분에 수술이 정교해졌고 환자들의 고통과 부담이 줄었다고 한다. 기술이 더 발전해 이 복강경 속에 로봇의 팔을 집어넣고 의사가 밖에서 환자 배속을 확대된 화면으로 보는 로봇 수술이 보급되면서 수술 시간도 단축됐고 기존의 수술들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정교한 수술이 가능해졌다.


담당 의사는 당연히 로봇 수술을 권했고 나는 이것을 선택했다. 단, 아직 국민건강보험에 급여항목으로 들어있지 않아서 비급여, 즉 환자가 생돈을 다 부담해야 한다는 단점이 있었다. 여기에서 회사의 고마움이 또 나왔다. 전체 직원 대상으로 단체 보장성보험을 십수 년째 가입하고 있는데, 여기에서 최대 비급여 항목이 최대 70%까지 보상이 된단다. 살았다.


각종 검사실에 불려 다니며 수술 이전의 검사를 마치고 나니 하루가 비었다. 늦은 오후부터는 기다림의 시간이었다. 당연히 두려움이 몰려왔다. 수술 시간은 3시간을 예상한다고 하지만 상황에 따라서는 길어질 수도 있을 것이다. 모든 수술은 집도하는 의사의 기술과 지식도 중요하지만, 수술을 받는 환자의 정신적, 육체적 상태 역시 매우 중요하다고 한다. 특히 전신 마취의 그 강한 압력을 체력적으로 버티지 못하면 수술은 진행되지 않는다. 주로 기력이 다한 노인들에게서 그런 일이 벌어진다고 한다. 아직 난 젊으니 그럴 걱정은 없을 것이다.

수술 후 회복 역시 환자 개개인에 따라 차이가 난다. 약 15년 전에 신장 조직검사를 위해 전신 마취를 해 본 경험으로 수술 후 마취에서 깨는 과정 역시 만만치 않았다. 그때 병문안 와서 내게 큰 도움을 줬던 중학교 동창 재찬이. 연락이 끊어진 지가 여러 해가 지났다. 아무도 그의 소식을 모른다. 수술 전날 밤은 깊어가고 나는 여러 생각에 잠을 못 이뤘다. 어차피 내일부터는 자는 시간이 많을 건데 하는 생각도 들었다. 죽음에 가장 가깝게 다가가는 날의 전야는 불면으로 지났다.


셋째 날 : 수술, 그 깊은 잠


화요일이 밝았다. 하필이면 6.25 전쟁 기념일. 갑자기 옛날로 생각이 돌아갔다. 당시 김일성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논란이 많지만, 항일투쟁에서 잔뼈가 굵은 그는 소련군이 1945년 8월 초, 미국 등 연합국들과의 약속에 따라 일본과의 불가침조약을 깨고 기습적으로 만주국을 공격 불과 1주일 사이에 껍데기만 남은 일본 관동군을 괴멸시키고 한반도로 밀고 내려올 때 소련군 소속이었다. 일설에는 1942년의 그 유명한 스탈린그라드전투에도 참전했다고 하지만 나는 못 믿겠다. 증거가 없다. 만약 본인이 스탈린그라드전투 참전용사라면 세계사를 바꾼 그 전투 참전의 증거를 엄청나게 이용했을 텐데 사진 한 장 공개된 것이 없다. 가짜 같다.


암튼 소련군이 미국과의 약속대로 순진하게 38선에 멈추는 바람에 한반도 분단이 시작됐다. 미군이 한반도에 급히 올라온 날짜가 1945년 9월 8일인데 비해 소련군은 이미 8월 26일에 평양에 있었다. 소련군이 한반도 적화 욕심이 진짜 있었다면 그 길로 쭉 부산까지 미군이 오기 전에 갈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소련은 독일처럼 전범국 일본을 분할에 관심이 있었지 한반도 전체를 점령할 생각 자체가 없었다. 하지만 이후 소련은 깨달았다, 미국에 속았다는 사실을. 미국은 일본을 소련과 나눌 생각이 전혀 없었고 대신 한반도를 나눴다. 결론적으로 한반도 분단의 책임자는 미국이다.


김일성으로서는 무력으로라도 한반도를 통일하고 싶었을 것이다. 국가수립 자체가 대한민국이 1948년 8월 15일이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1948년 9월 9일이니 한반도에서 분단 정부를 먼저 수립한 분단의 책임자 역시 대한민국이었다. 물론 이승만과 김일성 둘 다 단독정부 수립을 준비했지만, 김일성은 영리하게 날짜를 며칠 뒤로 미뤘다. 결과적으로 북은 남에게 분단 정부 수립의 책임을 역사적으로 영원히 주장할 수 있게 됐다. 그리고 김일성에게는 십수 년 동안 중국에서 항일투쟁의 선봉에 섰던 조선의용군이 있었다. 남쪽의 군대는 일본군 출신 허수아비에 불과했고 무장도 비교가 안 됐다. 박헌영은 인민군이 공격하면 남한 전체의 남조선노동당이 봉기할 것이며, 실제 전쟁은 한 달도 안 될 것이며, 최소한의 피해로 통일이 가능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모두가 오판이었다.


잘못된 계획으로 시작된 전쟁은 3년을 끌었고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발해와 통일신라와의 관계가 지금과 같았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이런 비극적인 날에 나는 내 배를 열고 장기 중 하나를 꺼내는 수술을 받는다고 생각하니 뭔가 서늘한 느낌이 들었다.


여느 새벽처럼 간호사가 선잠을 깨웠다. 혈압을 재고 혈당을 재고 또 옆 침상 환자를 점검하고... 일상의 시작이었다. 7시가 되자 아침 식사가 나왔다. 일요일 처음 입원할 때와는 달리 월요일을 지나며 4인 병실의 모든 침대에 주인이 생겼다. 각자의 침상에서 아침을 먹는 소리가 들려왔다. 커튼으로 서로를 가려주니 망정이지 서로 얼굴을 마주쳤으면 상당히 민망했을 그런 구조였다. 물론 나는 어제 점심을 끝으로 완전 금식이다. 음식은 물론이고 물도 금지. 이유는 간단했다. 우리가 소위 부르는 전신 마취란 단순히 잠을 자는 그런 마취가 아니라 중추신경을 완전히 차단하는 죽음에 가까운 가사상태라고 한다. 아무리 깊은 잠을 잔다고 해도 칼로 신체를 찌르면 고통 때문에 당연히 잠을 깬다. 이런 불상사를 막기 위해 전신 마취는 중추신경 자체를 차단한다. 이때 소화기관을 비롯한 여러 장기가 기능을 멈춘다. 만약 소화기관 속에 음식물이 있다는 그대로 썩는다고 한다. 장폐색이 바로 그거란다.


하루 이상 곡기를 끊어도 배는 고프지 않았다. 혈관을 연결된 영양제가 수분을 비롯한 여러 영양소를 직접 피 속으로 공급하기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실 이런 식이면 일주일이고 한 달이고 금식이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났다. 아무것도 먹거나 마시지 않아도 목마름이나 허기를 전혀 느끼지 않는 그 신기한 현상을 경험하면서 여러 생각이 났다.


간호사가 불현듯 나타나 내 수술 시간이 오후 1시로 정해졌다고 했다. 그때부터는 기다림의 시간.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초로의 수녀님 한 분이 갑자기 나타났다. 그리고 내 이름을 묻고는 본인이 이 병원에서 사목 하는 담당 수녀인데 나를 위해 기도해 주려 왔다고 했다. 일요일 입원 당시 담당 간호사가 몇 가지를 물었는데 그중 종교에 대한 질문도 있었다. 아, 그게 이걸 위한 것이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수녀님은 나를 위해, 그리고 의료진을 위해 짧게 기도해 주셨다. 마음속에 큰 위안이 됐다. 종교의 효능?


1시에 수술실에 들어갔다. 약 20분 정도 대기한 후 진짜 수술방으로 들어간 시간은 1시 20분. 로봇 수술방은 수술실의 여러 방 가운데 제일 안쪽에 있었다. 휠체어를 타고 전공의에게 떠밀려 지나면서 문이 열려 있는 각 수술방의 모습들을 하나씩 봤다. 10개가 넘는 수술방에서는 각기 다른 수술이 진행되고 있었다. 거의 다 비슷한 모습이었다. 수술대 위의 이름 모를 환자, 그리고 밝은 수술 조명 아래에서 머리를 맞대고 진지하게 수술을 진행 중인 의료진들의 모습. 처음 보는 신기한, 그러면서도 떨리는 모습들이었다.


로봇 수술방은 다른 수술방보다 좀 커 보였다. 수술실이란 우선 겉보기에도 차가운 느낌이 들고 실제로 온도 자체가 낮다. 꽤 춥다. 수술 복장을 한 의료진들은 부지런히 뭔가 준비를 하고 있었다. 방 가운데 덩그러니 놓은 수술대. 그런데 일반 수술대에 비해 좀 작아 보였다. 의료진이 내게 휠체어에서 내려 수술대에 누우라고 했다. 역시 다리 부분이 좀 짧았다. 내가 눕자 각자가 뭔가를 했다. 전공의로 보이는 한 의료진은 자신이 설 자리와 나중에 수술 로봇이 들어올 자리를 정하면서 다른 의료진에게 이를 확인했다. 마취 담당 의사는 내 왼쪽 머리맡에 앉아서 뭔가를 열심히 재고 있었다. 나를 잠재울 약을 준비하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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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봇 수술은 우리나라에서는 2005년에 처음 시작됐다고 들었다. 원래 수술은 수술 부위를 모두 절개하는 개복수술이었는데, 상처를 최소화하고 회복을 빨리하게 도움을 주는 방식의 복강경수술이 언젠가부터 유행했다. 로봇수술은 수술 부위에 구멍을 뚫어 수술장비를 삽입하는 복강경수술의 업그레이드 버전으로, 몸속으로 들어가는 수술 장비가 로봇의 팔과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란다. 기존의 복강경수술에 비해 마치 사람의 팔과 비슷한, 물론 크기는 훨씬 작고 얇은 로봇 팔이 몸속으로 들어가고, 이 팔에는 관절도 있어서 이를 조종하는 의사가 로봇 팔을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어서 미세한 수술이 가능하기에 널리 쓰인다고 했다. 환자와 의사 모두에게 유익한 수술 방식이지만, 아직 국민건강보험 적용에서 제외됨에 따라 환자가 부담하는 비용이 다른 수술에 비해서 훨씬 크다는 것이 문제였다. 다행히 회사에서 가입한 단체보장성보험에는 적용되므로 나는 주치의의 권유대로 이 수술을 선택했다.


수술방에 들어올 때 방 한가운데에 우뚝 서 있던 로봇을 봤다. 사진으로도 이미 확인한 그 모습 그대로였다. 사람의 형상은 아니지만, 인도의 비슈누 신처럼 생긴 녀석이 수술방 구석에 서 있었다. 내가 잠들면 저 녀석에 내 몸 위로 와서 내 배에 구멍을 뚫겠지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리고 갑자기 정신을 잃었다. 삶과 죽음 사이의 공간으로 나는 이동했다.


눈을 떴을 때는 회복실이었다. 망치로 머리를 얻어맞은 듯한 멍한 혼미한 느낌과 함께 아랫도리에서는 대변이 나올 것 같은 묵직한 기분이 느껴졌다. 주변을 왔다 갔다 하는 간호사들을 멍하니 보다가 옆 침대에서 비명을 지르는 노인을 발견했다. 간호사들은 이 노인을 달래며 뭔가 말을 시키더니 침대를 밀고 밖으로 나갔다. 그 옆에는 나와 수술실에 비슷한 시간대에 들어왔던 여인이 고통을 호소하고 있었다. 간호사들은 그 여인에게 진통제를 투여했다.


내가 의식을 차린 것을 확인한 간호사들이 내 침대를 밀고 회복실을 나섰다. 밖에는 특별청원휴가를 나온 큰아들과 아내가 기다리고 있었다. 아직도 혼미한 의식 속에서 입원실로 돌아왔다. 면회객이 일체 들어올 수 없는 간호간병통합병실이라 큰아들은 따라오지 못했고 아내만 함께 했다. 수술 직후에는 빨리 의식을 회복해야 하므로 간호사들은 내가 잠을 깬 상태로 유지하기 위해 계속 노력했다. 마취 기간 혼자서 호흡을 하지 않았기에 폐가 쪼그라들어 있단다. 그래서 마취가 깰 때 최대한 많은 호흡을 하고 의식적으로라도 기침을 해야 폐기능이 다시 살아나기 때문에 다시 잠들지 않도록 최소한 세 시간은 깨어 있어야 한다고 했다. 그 과정이 쉽지 않았다. 시간이 흐르고 나는 잠을 완전히 깼고 아내는 집으로 돌아갔다. 전신 마취의 후유증에 그렇게 비몽사몽 수술 날의 밤은 지났다.


넷째 날부터 회복하는 날까지, 그리고 퇴원


간호사들이 분주한 시간, 다시 새벽에 잠을 깼다. 한결 머리는 가볍고 마음도 가벼웠다. 걱정스럽던 수술이 끝남에 뭔가 후련함에 몸과 마음은 한층 가벼워졌다. 간호사들의 여느 점검이 하나씩 지나고 창밖으로 햇살이 비치기 시작했다. 마음을 단단히 먹고 침대에서 일어났다. 별문제가 없었다. 팔에는 여러 개의 바늘이 꽂혀 있고 거기에는 알 수 없는 다양한 약물이 연결돼 있었다. 병실 밖으로 천천히 걸어 나왔다. 약간의 현기증이 있었지만 큰 문제는 없었다. 왼쪽 옆구리에는 피 주머니가 달려서 아직 몸속에 남은 피를 조금씩 받아내고 있었다. 링거를 꽂은 폴대 아래에는 방광과 연결된 소변 주머니가 있었다. 붉은 피가 잔뜩 섞인 소변이 거기로 모이고 있었다.


입원실의 다른 방들을 하나씩 지나며 천천히 복도를 걸었다. 사실 엊저녁 회진에서 주치의는 내일부터는 살살 걸어 다니라고 당부했다. 수술 후에는 가능한 한 빨리 일어나서 움직이는 것이 몸의 활기를 주고 회복을 빨리한다고 들었다. 잠들어 있던 장이 제 기능을 발휘하는 것을 방귀로 확인하면 음식 섭취도 가능하다고 했다. 오전 중에 모든 것이 해결됐다. 점심에는 미음을 먹었고 저녁에는 죽을 먹었다. 이제 모든 것이 시간문제였다. 오후 늦게 찾아온 주치의는 나의 회복 속도가 빨라서 좋다고 했다. 하지만 이날까지 머리는 무겁고 의식은 몽롱했다. 마취의 힘이 이렇게 셀 줄이야.


수요일부터 토요일까지 하루가 다르게 회복됨을 느꼈다. 병실에서는 무료한 시간이었다. 잠을 자는 것 이외에는 달리 할 일이 없었다. 책을 펴니 아직 어지러운 머리로는 독해가 잘 안 되었다. 패드를 켜서 유튜브를 봐도 재미를 느끼지 못했다. 집중이 안 되는 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각종 항생제와 진통제를 비롯한 약물이 계속 몸으로 들어가는 이 마당에 모든 것이 힘들었다. 수술 후 편안한 시간을 보낼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던 내가 틀렸다. 빨리 병실을 빠져나가고 싶었다. 이럴 때 제일 좋은 것이 잠드는 것이다. 육체와 정신이 힘들어지는 시간에 최고의 탈출구는 자는 것임을 새삼 배웠다. 다른 선택이 없었다.


토요일, 둘째와 셋째가 처음으로 병원을 찾아왔다. 물론 병실에 들어올 수 없어서 병원 앞의 벤치에서 시간을 보냈다. 생각보다 환자처럼 보여서인지 셋째 딸은 눈물을 흘렸다. 가족 모두가 놀랐다. 아마 딸의 감성으로는 견디기 힘들었던 모양이었다. 원래 씩씩한 녀석인데.


식구들이 돌아가고 이만섭 기자와 박대전 사장이 찾아왔다. 이들에게는 나의 수술 소식이 충격이었다. 동년배의 암이라. 사실 나도 주변에서 하나둘씩 쓰러져가는 친구들을 볼 때마다 섬뜩한 맘이 있었다. 그 대상이 내가 되니 오히려 담담했다. 50대 중반을 지나는 중년들, 모두 스스로 돌아볼 시간이 필요하다. 모두 지쳐있다. 불쌍한 영혼들. 모두에게 적절한 휴식이 있기를.


입원 후 정확히 열흘째, 집으로 돌아왔다. 확실히 병실보다 집이 편하다. 암이라는 놀라운 소식과 급히 잡힌 수술 날짜. 한 박자 쉬어가라는 말씀으로 들린다. 그래, 좀 천천히 가자. 난 아직 젊다. 크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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