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연구단의 불청객(2)
1월 초의 인천공항에는 매서운 바람이 불고 있었다. 영종도라는 곳을 아는 사람은 3년 전만 해도 많지 않았다. 하지만 2001년 새로 문을 연 공항은 이제 대한민국의 관문이 됐다. 동북아 허브 공항을 목표로 세워진 이 거대한 공항, 다만 입지가 문제였다.
서해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정면으로 맞으며 피할 곳이 별로 없는 이 벌판에 홀로 선 공항. 21세기를 향해 활짝 연 관문에 비해 좀 생뚱맞아 보였다. 매서운 바람을 얼굴에 맞으며 최용석은 공항버스에서 내려 바쁜 걸음을 걸어 터미널로 향했다.
노조 활동을 시작하면서 이제 꽤 자주 오게 된 인천공항까지의 길은 집에서부터 좀 복잡하다. 봉천동 언덕의 집을 나서 마을버스를 타고 중앙대학교 앞으로 이동, 거기에서 20분에 한 대씩 오는 공항버스를 타는 과정이 참 번거롭다. 현관을 나서서 인천공항 대합실로 들어오기까지 보통 2시간을 잡아야 한다. 물론 저 멀리 서울에서 먼 지방에서 오는 많은 사람들의 불편과는 비교가 되지 않지만.
약속된 장소에는 벌써 여러 사람이 와 있었다. 한전 구조조정실 관계자, 노사정위원회 사람들, 그리고 공동연구단에 포함된 교수들이 곳곳에 이미 모여서 웅성거리고 있었다. 가장 핵심이 되는 연구단장의 모습은 아직 보이지 않았다. 최용석은 얼굴을 아는 사람들과 가볍게 인사하고 주변을 둘러봤다. 단장의 모습을 찾아봤다.
이미 지금 가는 이 길이 본인에게는 별로 편한 길이 아님을 알고 있었기에 마치 죄인이라도 된 듯한 어색한 입장이었다. 김준형 위원장이 억지로 연구단 일행에 밀어 넣었고 한전 역시 별 거부감 없이 받아주기는 했지만, 가장 핵심이 되는 단장이 허락하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인천에서 샌프란시스코로 가는 대한항공의 출발시간인 오후 4시까지는 아직 세 시간이 남아 있었다. 공동연구단은 정부 측 선정 전문가 2명, 노사정위원회 추천 중립 인사 2명, 그리고 전력노조 추천 교수 2명으로 모두 6명의 전문가로 구성됐다. 모두가 대학교수들이었다.
사실 한국에서는 전문가 하면 대학교수를 먼저 떠올린다. 옛날부터 이어져 온 사농공상의 관습 때문인지 교수를 무조건 높이 쳐준다. 미국이나 서양에서는 교수도 중요하지만, 오히려 현장 경험이 풍부한 CEO, 엔지니어, 활동가들을 전문가로 대접하는 것 하고는 좀 다른 분위기인 것이 사실이었다.
이번 1차 해외현장 확인은 미국, 브라질, 캐나다를 거치는 9일간의 일정이었다. 노사정위원회 산하에 전력문제를 다루기 위한 공공부문구조조정위원회가 만들어졌고, 여기에서 한전의 제2의 분할, 즉 배전부문 분할을 공동연구단의 연구 결과에 따라 결정하기로 정부, 즉 당시 산업자원부, 한전, 그리고 전국전력노동조합이 합의한 것이 2003년 8월이었다.
이 3자 합의에 따라 연구단은 각 주체별 추천에 따라 모두 6인으로 구성하고, 2003년 9월부터 2004년 5월까지 약 9개월 동안 연구 활동을 벌이기로 했다. 이에 따라 구성된 공동연구단은 2003년 9월 초부터 주 1회 한전 본사가 있던 삼성동에 모여서 미국 의회의 청문회 방식을 본뜬 형태로 학술자료 검토, 증인과의 대화 등으로 활동을 해 왔다.
그리고 마지막 순서로 전력회사 민영화나 구조개편이 진행된 국가들에 대한 현장 실사를 벌이기로 했다. 물론 국내 전력산업의 현장을 둘러보는 국내 실사도 진행했다. 그 첫걸음이 바로 2004년 1월 2일 시작됐다.
드디어 모두가 모였다. 이번 1차 연구단의 규모는 모두 16명이었다. 전문가 6명에다 한전의 구조개편 담당 처장, 부장, 과장 각 1명, 노사정위원회의 실무자 및 관련자 3명, 구조개편 정책을 이끌어 가던 전기위원회 담당 과장과 실무자 각 1명, 전력노조의 구조개편 담당 국장 1명이 정식 멤버였다. 거기에다 아무 자격이 없던 최용석 전력노조 국제부장이 추가됐다.
김준형 위원장이 최용석을 억지로 연구단 일행에 밀어 넣은 이유는 간단했다. 2002년 하반기에 한전노조인 전력노조 집행부에 합류한 최용석은 부모 잘 만난 덕에 자비로 미국에서 대학을 다니고 한전에 입사한 후 본사에서 평범한 직장생활을 하고 있었다.
최용석은 전력노조 내부의 복잡한 민주화 문제를 겪으며 노동조합에 관심을 가지게 됐고 결정적으로 1999년에 정부가 한전 민영화 계획을 발표하면서 본격적으로 노조에 발을 담갔다. 구조개편이라는 것과 민영화가 잘못됐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김준형 위원장은 반신반의하면서 최용석에게 국제업무를 전담시켰다. 결과는 좋았다. 일단 영어가 자유롭게 되니 각종 국제회의 등에 나가서 다른 나라의 노조 관계자들과 빨리 어울리게 됐다. 특히 이미 민영화 바람이 쓸고 간 나라들을 중심으로 네트워크를 잘 형성해 나갔다.
노조 국제활동이라는 것은 사실 일반적인 영업활동과는 다르다. 편차는 있지만 노동조합들은 일정한 연대의식을 가지고 서로 돕는다. 특히 구조조정이나 민영화 등을 경험했거나 앞에 놓인 공공부문 노동조합들은 서로에 대한 지지가 남달랐다. 그런 네트워크가 이번 해외실사 방문지 선정에 결정적인 도움을 줬다. 그래서 김 위원장은 최용석을 이 해외실사에 같이 보내고 싶었던 것이다. 현장에서 공동연구단의 마음을 움직이는데 조금이라도 도움을 주기 위해서.
이코노미석에 앉은 최용석은 발아래로 멀어져 가는 인천공항을 내려다보며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었다. 비행기 여행은 항상 불안하다. 사람이 하늘을 날아간다는 자체가 불안하다. 과연 이 비행기가 10시간 뒤에 무사히 샌프란시스코 공항에 내려앉을 것인지. 집에 두고 온 네 살배기 아들과 아내의 얼굴도 떠올랐다. 둘만 두고 또 이런 출장길. 그것도 한전의 운명, 어쩌면 대한민국의 운명이 걸릴지도 모르는 이런 힘든 출장길을 나서기가 참 어려웠다.
비행기가 이륙한 지 약 한 시간 정도 됐을 때 비즈니스석에 앉아 있던 이근석 교수는 갑자기 연구단 간사를 맡은 이병호 교수를 불렀다. 이 교수 역시 정 단장과 마찬가지로 중립 위원으로 노사정위원회가 선정한 사회학 전공 교수였다.
“무슨 일이 십니까? 단장님?”
“다들 좀 모이라 그래요. 살펴보니 이 비즈니스 칸에 우리 이외의 다른 승객은 많아 보이지 않네요.”
이근석 단장은 불편한 얼굴로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예, 알겠습니다. 일단 위원들 모두 이쪽으로 오라고 하겠습니다.”
“아니, 위원들도 오지만 한전 사람들도 오라고 해요. 노사정위원회 분들도 오고.”
이 단장의 갑작스러운 호출에 모두 이 단장 자리 주변에 모였다. 일부 사람들은 이 단장 옆이나 앞뒤에 앉은 상태로 그냥 몸만 그쪽으로 돌렸다.
다들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이 단장의 약간 상기된 얼굴을 쳐다보며 말을 아꼈다.
“지금 이 연구단에 노조의 어느 젊은 친구가 같이 왔지요? 저번에 노조 위원장이 한 번 소개해 주더군. 점심을 같이 했던 그 친구 같은데.”
이 단장은 한전 구조조정 실장 이강산에게 물었다.
“아. 예... 그런 걸로 알고 있습니다.”
단장의 의중을 재빨리 읽은 이강산 실장은 잠깐 머뭇하다가 곧장 대답했다.
“아니, 알고 있다니, 그게 무슨 말이요? 그 친구를 이 일행에 포함시킨 것이 맞나요? 누구 결정인가요? 위원회 분들은 아셨나요?”
이근석 단장은 화가 묻어 있는 목소리로 노 실장과 노사정위원회 관계자들을 번갈아 보면서 물었다. 한전 관계자가 아닌 다른 일행들은 이게 무슨 일인가 하는 마음으로 어리둥절하게 서로를 쳐다봤다.
“예... 저.... 노동조합에서 강하게 요청을 해서 일행에 포함시켰습니다만 우리 연구단의 정식 일원은 아닙니다. 다만 그 친구가 노조 쪽 방문기관 섭외를 잘했다고 해서 노조에서 길잡이로 써 달라고 해서 회사에서는 그렇게 응했습니다.”
노 실장은 기가 죽었지만 그래도 할 말은 하겠다는 자세로 대답했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이 연구단이 아무나 막 따라와도 되는 그런 건가요? 그럼 비용은 누가 부담합니까?”
이 단장의 호통에 이강산 실장은 최용석의 비용은 노조가 따로 부담한다고 둘러댔다.
노사정위원회에서 전문위원으로 같이 온 배손근 위원은 약간 머쓱한 표정으로,
“저희도 한전노조와 회사의 요청을 듣기는 했지만 큰 문제가 없어 보여서 그냥 용인했습니다. 저희 불찰입니다.”
라고 말꼬리를 흐렸다.
잠시 생각에 잠겼던 이 단장은,
“이건 절차상의 문제예요. 이왕 이렇게 된 것을 놓고 되돌릴 수는 없지만, 앞으로 잘들 합시다. 이 얼마나 중요한 출장입니다.”
라고 말했다.
이근석 단장의 성격을 잘 아는 사람들은 모두 조용히 듣기만 하고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한창때에 이 교수는 왕성한 사회활동을 했다. 경실련을 만드는데 참여했고 기본적으로 사회적 약자에 대한 동정이 있는 자유주의적 경제학자였다. 그런 한 편 한 번 생각한 것은 좀처럼 포기하지 않는 완고한 고집도 있는 원칙주의자였다. 어쩌면 공동연구단이 나가는 방향을 쥐고 있을 수도 있는 그에게 그 누구도 잘못 보이고 싶지는 않았다.
이 단장의 분노를 안고 살며시 자기 자리로 돌아간 안현필 교수는 앞자리에 앉은 김명자 교수에게 몸을 기울이며 귀에다 대고 속삭였다.
“단장님 기분 안 건드리도록 조심해야겠어요.”
“그래, 생각보다 무서운 분이야. 아무튼 저분 비위 잘 맞추는 게 우리의 목표 중 하나야.”
지방 수재에서 사회비평적 기자, 그리고 해직, 다시 이어진 공부, 그리고 경제학 교수. 김명자 교수의 지난날은 평범하지 않았다. 수줍던 댕기머리 소녀를 사회운동가로 만든 것은 유신말의 독재정권이었다.
메이저 신문사에 입사했지만 당시 피 끓던 20대 초년병 기자는 세상을 관조하거나 전달만 하는 3인칭으로 머물 수 없었다. 신군부가 정권을 잡자 신문사에서 쫓겨났고 뭘 할까 고민하다 당초 전공이 아니던 경제학 박사까지 따 버렸다. 그리고 교수노조, 민주화를 위한 교수협의회 등 사회 변혁에 앞장서는 각종 단체의 운동 맨 앞에 섰다.
한전 민영화 이야기가 처음 나왔던 1999년, 자신을 찾아온 한전노조 관계자들에게 큰 호감을 가질 수 없었다. 독점공기업의 어용노조라고 막연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찾아온 이들의 간절함에 일단 선입견을 버렸다. 그리고 국가기간산업을 해외에 매각하겠다는 정부의 정책에 문제가 있음을 알아차렸다. 그 뒤부터 이들과 함께 하고 있다. 전력노조에서 공동연구단의 노조 측 위원으로 추천할 때 큰 망설임 없이 승낙했다.
이번 해외일정을 짤 때 노조의 최용석이 무슨 역할을 했는지 잘 알고 있었다. 최 부장은 불과 1년 정도의 전력노조 국제담당으로 상당한 해외 네트워크를 만들었다. 그리고 절박한 마음으로 지원을 요청하자 다양한 국제 노동단체들과 단위 노조들, 시민단체들이 돕겠다고 나섰다.
이제 그들을 만나러 가는 길에 섭외를 담당했던 최 부장이 있어 주면 단장을 비롯한 다른 위원들에게 큰 영향력을 행사할 것이 분명해 보였다. 그런데 단장이 매우 언짢아하고 있음이 심히 걱정됐다. 뭐 이미 벌어진 일이라 걱정해 보면 무슨 소용이 있겠냐고 생각하며 창밖의 풍경을 즐기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