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연구단의 불청객(1)
레스토랑 안의 공기는 그날따라 좀 여유로웠다. 항상 늦어도 이틀 전에 예약을 하지 않으면 자리를 잡기 어렵던 이탈리아식 레스토랑 마르코폴로의 평일 점심시간은 이날은 좀 한가했다. 깔끔한 흰색 와이셔츠 위에 짤막한 감청색 이탈리아식 조끼를 걸쳐 입은 웨이터가 테이블 위의 빈 잔 4개에 와인을 다 채우고 물러서자 김준형 위원장이 입을 열었다.
“교수님, 요새 고생이 많으시지요? 어려운 전력산업 공부도 하시고요.”
“힘들긴요. 재밌어요. 새로운 걸 많이 배우고 있죠.”
이근석 교수는 두꺼운 안경 너머로 힐끗 위원장을 쳐다보며 헛웃음을 웃고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아이고, 저희로서는 교수님이 이번 일을 맡아 주셔서 얼마나 고마운지 모르겠습니더. 사실 이번 일은 저희 생사를 가르는 것과 같아 갖꼬 엔간히 신경이 씨는 기 아입니더.”
김 위원장 옆에 앉아 있던 이승곤 부위원장이 예의 높고 경쾌한 톤으로 한 마디 거들었다.
이 교수는 테이블 위의 접시에 놓인 라자냐를 포크로 떠서 한 입 물고 묵묵히 씹었다.
잠시 침묵이 흐르고 각자 접시 위의 음식을 조금씩 먹기 시작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김 위원장은 어색한 침묵을 깨기 위해 입을 열었다.
“저도 노조위원장이 된 지 이제 겨우 1년이 조금 지났습니다. 저 개인으로서는 이런 어려운 시절에 이런 자리에 있는 것 자체가 참 부담입니다. 하지만 어찌하다 보니 이렇게 됐고, 또 이번 일이 저희들로서는 정말... "
"어쩌면 목숨이 걸린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저희 회사를 쪼개고 민영화하고 뭐 많은 말들이 오고 가 있고 또 아시다시피 이미 2년 전에 발전회사도 6개로 분리돼 나갔습니다. 뭐 정부가 결정한 일이라 다 이유가 있다고는 생각하지만, 현장에서 전력산업을 책임지는 우리들로서는 이건 아니다는 판단입니다.”
“2001년에 발전회사들이 분리될 때도 우리 현장 노동자들한테는 한 마디 의견을 묻지 않고 정부가 일방적으로 밀어붙였지요. 당시 노조집행부도 파업을 각오하고 반대했지만 결국 뭐 여러 이유로 정부에게 굴복했고. 이제 소매부문도 또 6개 회사로 쪼갠다는데 문제는 이렇게 되면 큰 파국이 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입니다. 그래서 저희가 반대하고 있고요. 그런데 어쨌든 이번에 노사정위원회에서 이 문제를 같이 모여서 논의하자는 결정이 내려졌고 저희도 여기에 동의합니다.”
김 위원장의 말을 들으며 물끄러미 쳐다보던 이 교수가 입을 열었다.
“압니다. 지금 벌써 석 달 동안 공부 많이 하고 있어요. 다양한 얘기들도 듣고 있고요. 근데 한전 사람들, 다들 참 열심히 들이더군요. 다들 성실하고. 착해요.”
“그러니까요, 교수님. 사실 한전의 주인이 누굽니꺼? 우리 노동자 아입니꺼? 근데 100년 가깝은 역사를 가진 이런 회사를 단칼에 두부 쪼개는 마냥 갈라놓으매 우리한테는 한 마디도 의견을 안 구한기 그기 정부고 공무원들인기라요. 아니 사실 국민들한테도 한 번 물어나 봤나요? 이 회사가 정부껍니까 아이면 국민껍니까? 너무들 한 기라요. 그라고 그 잘난 구조개편인지 먼지를 해서 결과가 좋을끼면 반대하는 우리가 나쁜 놈들일낀데,"
"사실 외국에서 벌어지는 일들도 보믄 다 잘 안됩디다. 우리가 반대하는 거도 다 이유가 있는 겁니더. 단순히 뭐 언론이 말하는 고용안정, 머 그것도 중요하지만요 그것만, 우리 일자리만 챙긴다고 매도하면 아이지요.”
이 부위원장은 마치 뭔가 잔뜩 억울한 일을 당한 사람처럼 일그러진 표정으로 속사포처럼 말을 쏟아냈다.
말하는 동안 윤 부위원장은 손을 가슴에 얹었다 앞으로 폈다 하면서 마치 자신의 심장을 꺼내서 진심을 토하듯이 바삐 움직였다. 뭔가 심각한 말을 할 때 나오는 그 특유의 몸짓이었다.
이 교수는 열변을 토하는 이승곤 부위원장을 얼굴과 접시를 번갈아 보며 포크질을 했다. 라자냐의 맛이 생각보다 좋았다.
물 한 모금을 삼킨 다음 이근석 교수는 냅킨으로 입을 가볍고 훔치고 포크를 잠시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두 사람을 번갈아 보면서 입을 열었다.
“그래요. 두 분 말씀, 잘 이해합니다. 사실 우리나라 공무원들이 좀 독단적이에요. 일을 하면서 좀 주변의 의견도 들어야 하는데. 항상 자기들만 옳지.”
김 위원장은 이 교수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동의의 의사를 보였다.
“맞습니다. 여론 수렴, 특히 이해당사자에 대한 배려가 없습니다. 많이 아쉽습니다.”
“일주일에 한 번 모여서 다들 열심히 합니다. 한전에서 자료도 많이 주고. 정부 쪽 교수들도 다들 잘하는 분들이에요. 뭔가 좋은 결과가 있을 겁니다. 근데 김 위원장은 언제부터 노조를 했지요?
이근석 교수의 갑작스러운 질문에 김 위원장은 순간 멈칫하다 이내 가벼운 미소를 머금고 입을 열었다.
“제가 한전에 들어온 것이 1986년입니다. 뭐 누가 첨부터 노조에 관심이 있겠습니까. 저도 열심히 현장 일 하고 승진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지요. 서울 어느 사업소에 근무하다가, 그게 아마 1996년쯤이었을 겁니다. 당시 그 사업소 분회장이 좀 잘못을 많이 했고, 젊은 층에서 분회장을 바꾸자라는 말들 나왔는데 하필이면 제가 떠밀려서 선거에 출마했습니다. 그리고 덜컥 분회장이 됐지요. 허허.”
“맞아요. 살다 보면 뭔가 운명이 끌고 가지요.”
이 교수는 작은 바구니에 담겨 있던 마늘빵을 한 입 베어 물면서 대답했다.
“예, 그렇습니다. 그러다 1999년에 한전 구조개편 계획이 나오고 당시 노조집행부가 파업을 선언했다 철회하고 등등 복잡한 일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다 발전분할 저지에 실패한 위원장이 또 출마하길래 저는 이건 아니다 하는 마음에서 출마했습니다. 그게 2002년이었고 그래서 제가 오늘 이 자리에 있습니다. 뭔가 운명이 끌고 간 그런 느낌입니다.”
김 위원장은 마치 모든 일이 바로 직전에 벌어진 듯 약간 상기된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그의 머릿속은 2002년 3월로 잠시 되돌아갔다.
한국전력공사의 단일 노동조합인 전국전력노동조합은 2002년 3월 새로운 위원장을 선출하는 선거에 돌입했다. 전력노조는 1961년 당시 조선전업, 경성전기, 남선전기 3개 전력회사가 하나의 회사인 한국전력주식회사로 통합하면서 이 세 회사의 노조가 하나로 모이면서 출범했다.
그렇다면 전력노조의 시작은 1961년으로 돼야 하는데, 경성전기주식회사의 노동조합이 생긴 1946년 11월 24일을 실제적인 뿌리로 인식하고 있다.
당시 경성전기 노동조합은 우리나라 제1호로 등록한 노동조합으로 기록됐다. 그러다 2001년에 한국전력이 한국수력원자력, 한국동서발전주식회사, 한국남동발전주식회사, 한국서부발전주식회사, 한국남부발전주식회사, 한국중부발전주식회사, 한국전력거래소로 쪼개져 분리되면서 나간 노동자들이 각자 노조를 설립함에 따라 조합원 숫자가 대폭 줄어들었다. 그래도 14,000명 조합원 숫자를 유지하는 공기업 최대의 노조의 위상은 지키고 있었다.
2002년의 선거는 한 마디로 전임 집행부에 대한 심판이 최대 이슈였다. 1999년에 한전 분리를 막겠다는 공약으로 선출된 전임 오철수 위원장 많은 조합원들의 비난 속에서 위원장 연임을 목표로 출마를 선언했다. 이에 분개한 김준형은 위원장은 회사 분리를 막지 못한 집행부 심판을 선언하고 출마하게 된 것이다.
김 위원장과 비슷한 생각을 한 사람들이 두 명 더 출마함으로써 모두 4명이 위원장 선거에 나섰고 결선투표까지 가는 혼란 속에서 김 위원장이 당선됐다.
당선의 기쁨도 잠깐, 정부는 한전의 발전에 이어 배전부문까지 분할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선거 당시 모두가 이 배전분할 저지를 공약으로 내 걸었고, 이제 공은 위원장에 당선된 김 위원장 앞으로 굴러왔다. 멋있게 멀리 차 내던가 아니면 헛발질을 하고 넘어지느냐, 그것이 문제였다.
김준형 위원장은 막막했다. 이미 한전의 절반인 발전부문이 쪼개져 나갔고 이제 정부의 계획인 2단계 분할인 배전과 판매부문을 또 6개 회사로 나누기로 한 계획을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한전은 1961년 박정희 군사정부가 발전회사 조선전업, 송배전판매회사 경성전기와 남선전기를 강제로 하나로 통합해서 국유화한 이래 한국의 전력산업을 독점해 왔다.
독점이라는 말은 좀 부정적이지만 빈약한 자본, 기술, 인력, 모든 것이 부족하던 당시로서는 국가독점자본에 의한 집중적 투자와 사업확대가 필요했기에 그런 결정을 했던 것이다. 그 결과 3개 민간회사가 하나의 공기업으로 통합된 1961년부터 한전 분할이 결정됐던 1999년까지 한전의 전기생산 규모는 100배가 넘게 커졌다.
통합 당시 수력과 무연탄 발전소만 겨우 운영하던 한전은 20세기말이 되자 세계에서 5위권 안에 드는 규모를 자랑하게 된 회사로 급성장한 것이다.
1970년대에 급성장한 철강, 자동차, 중화학 등의 중공업 발전은 한전이라는 회사가 충분히 전기를 공급하면서 가능했다. 그리고 1970년대 말과 1980년대를 거치며 전국 거의 모든 가정에 전기를 보급하는 일도 한전의 성장 때문에 이루어진 성과였다.
물론 국가가 자본을 지원하고 독점을 허용했기 때문에 이런 성장이 가능했지만 이는 박정희 정부의 경제개발 계획의 기본이었다. 즉 정부가 일사불란하게 국가독점자본을 진두지휘하면서 나라의 수준을 농업국에서 공업국으로 변모시켰고 이 과정에서 산업의 피라고 불리는 전력회사의 성장과 역할은 필수적이었다.
그런데 1990년 중반을 지나면서 세계적으로 변화의 바람이 불었다. 당시까지도 거의 모든 나라에서는 전력산업은 국가의 기간산업이고 많은 돈이 드는 자본집약적 산업이기에 공기업 또는 민간기업의 독점이 당연하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지만 전력산업의 독점을 허물고 경쟁을 도입하는 것이 더 효율적이라는 주장이 나타난 것이다. 그 시작은 소위 말하던 ‘영국병’을 앓고 있던 영국이었다.
복지국가의 원조이던 영국에 병이 나타난 것은 제2차 세계대전으로 인한 호황이 끝나고 두 차례 오일소크를 겪고 난 1970대 중반부터였다. 실업률은 오르고 물가는 치솟고 실질임금은 떨어졌다. 국가가 많은 것을 챙겨주던 복지국가는 빚더미에 앉게 되고 마침내 IMF에 손을 벌리게 된다.
이때 혜성처럼 나타난 여전사, 마가릿 대처였다. 그녀는 외쳤다, 모든 것을 바꾸자고. 망해가던 공기업을 민영화하고 정부 지출을 깎고 시장경쟁을 강화했다. 영국의 골칫덩어리였던 강한 노조도 손 볼 대상이었다. 가장 힘이 컸던 광산노조를 무너뜨리기 위해 국영광산을 폐쇄했고 수명이 30년이 지났던 대형 석탄발전소 문을 닫고 마침 북해에서 생산되던 가스를 이용하는 가스발전소를 건설했다. 물론 민간주도로. 그 결과 영국병은 낫는 것으로 보였다.
영국이 당시에 도입한 방식이 전기 생산에서 판매까지 함께 수행하던 거대한 국영전력회사를 발전회사, 송전회사, 배전과 판매회사로 쪼개서 민영화하는 방법이었다. 발전에서 판매까지 수직으로 묶었던 끈을 자르니 수직분할이었고, 하나이던 발전과 배전판매부문을 서 너 개로 나누니 수평분할이었다.
대성공이었다. 비싼 석탄 대신 싼 가스를 사용하니 전기요금은 낮아지고 경쟁의 효과도 보였다. 이런 영국식 모델이 전 세계를 강타했다. 1990년대 초반의 영국의 성공에서 미국으로, 호주로, 그리고 마침내 한국으로 퍼져왔다.
김준형 위원장이 전력노조 위원장에 출사표를 던졌던 때는 전임 위원장의 항복으로 이미 한전의 발전부문은 6개 자회사로 떨어져 나간 지 1년이 지난 2002년이었다. 집안의 3분의 1 가량이 졸지에 자회사로 떨어져 나갔지만 항복했던 전임 위원장은 다시 한번 위원장을 하겠다고 재선에 출마했다. 조합원들은 들끓었다. 이건 아니다.
그래서 너도 나도 위원장 선거에 뛰어들었고 최종적으로 네 명이 경합했다. 결선투표까지 가는 혼란 속에서 김준형 위원장은 당선이 됐다. 당선된 다음 날부터 덜컥 겁이 났다. 배전부문 분할을 막겠다고 공약했는데, 이를 어쩌지? 그날부터 사방팔방으로 뛰어다녔다. 지부장은 했지만 전력노조 위원장은 차원이 달랐다. 명색이 대한민국 최대 공기업의 단일노조였다.
많은 사람들의 냉대를 받았다. 전 국민이 지켜보는 앞에서 파업을 철회했던 노조. 어용이고 비겁한 노조였다. 그래도 사방으로 도움을 구해 나섰다. 등 돌렸던 시민단체, 한국노총, 민주노총 가리지 않고 도움을 구했다.
지성이면 감천인가, 조금씩 돕는 손길이 나왔다. 그리고 마침내 새로 들어선 참여정부와 합의를 했다. 2단계 구조개편, 즉 배전분할 문제는 노사정위원회에서 함께 고민하고 결론을 내리기로. 위원회가 구성한 공동연구단이 정부, 한전, 노조가 함께 구성하고 그 연구결과에 무조건 승복하겠다는 각서를 썼다.
두려웠다. 만약 결과가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나온다면? 무조건 파업을 돌입하고 다 잡혀갈까? 그래 내일 걱정은 내일 하자. 그래서 구성된 연구단이 노사정이 각각 추천한 2명의 교수들이었다. 연구단장을 맡은 중립위원 몫이었던 이근석 교수가 키맨이었다. 그래서 오늘 이 자리를 만들었다.
다시 현실로 돌아온 김 위원장은 목이 말랐다. 물 한 모금을 삼키고 숨을 한 번 몰아 쉬었다. 이제 결론을 이야기해야 한다.
“교수님, 이제 다음 주면 해외조사를 떠나시지 않습니까?”
“예, 그렇지요. 일정이 꽤 길게 잡혔지요. 다 합치면 두 달이 넘는 것 같던데.”
“방문기관만 다 합쳐도 50개가 넘는다고 들었습니다. 9개 나라라고 하던데요?”
이근석 교수가 안경을 만지면서 잠시 생각을 하더니
“그래요. 사실 나도 리스트를 봤는데 잘 모르는 기관도 있더라고요.”
라고 말하며 허허 웃었다.
“그런데 이번 방문기관 선정을 노사정이 같이 했는데, 저희 노조에서 열심히 했습니다. 그동안 국제활동으로 알게 된 노조들과 이들을 통해서 소개받은 기관들이 꽤 있었고요,”
김 위원장은 이어서 “그런데 이번 연구단 해외 활동에 저희 노조에서 실무를 담당한 친구가 하나 있는데, 이 친구도 함께 좀 갔으면 하는 생각입니다.”라고 망설였던 말을 그대로 내었다.
“그래요? 누군데요? 연구단 멤버 아닙니까? 그... 김 뭐라는 국장님?”
“아닙니다. 김 국장은 정식 멤버인데 제가 말한 친구라 사실 공식 멤버가 아닙니다.”
갑자기 이 교수의 표정이 굳으며 눈썹이 위로 올라갔다. 그리고
“그래요? 그런데 왜 그 친구를 같이 보내려는 겁니까?”
라고 되물었다.
“예, 그 친구가 바로 여기 있는 저희 노조의 국제부장인 최용석 부장입니다. 사실 최 부장이 국제활동도 많이 했고 이번 기관 섭외에 큰 역할을 했기에 데려가시면 많은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식사가 시작된 이래 이 교수는 최용석의 존재에 큰 관심이 없었다. 그저 김 위원장을 따라온 일행 중의 한 명이라고 생각했다.
김 위원장의 말을 듣자 그제야 최 부장을 유심히 쳐다봤다. 검은 뿔테 안경 너머로 날카로운 눈빛이 최용석의 얼굴을 때렸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이근석 교수의 표정이 잠시 굳어지는 듯했다. 잠깐의 멈춤 이후 이 교수는 단호하게 말했다.
“그건 제 소관이 아니에요. 저는 중립적으로 이번 연구를 하려는 것이지 어느 한쪽의 입장을 더 챙길, 그럴 위치가 아닙니다.”
김 위원장은
“압니다, 제가 알지요. 하지만 저희 입장에서는 조금이라도 더 그쪽 사정을 아는...”
“위원장님, 이런 부탁을 제게 하는 건 예의가 아니지요. 그 노조 친구 합류 문제는 제가 결정할 사항이 아니고 노사정위원회에서 알아서 하라고 하세요. 저는 모릅니다.”
그렇게 그들은 아무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식사를 마쳤다.
“와 생각보다 딱딱하다. 머 씨가 안 묵히네. 허허 유도리가 없데이.”
식당 밖을 나와 멀어져 가는 이 교수의 뒷모습을 보면서 이승곤 부위원정이 넋두리를 했다.
김 위원장은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한 시간이 넘는 시간 동안 아무 말 없이 이근석 교수 건너편에서 숨죽이며 있던 최용석에게는 해방감과 함께 무거운 압박이 동시에 찾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