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항에서의 소동
최용석이 공동연구단의 실사 계획을 수립할 때 미국의 수도 워싱턴 DC는 당연히 포함됐다. 거기에는 미국 전체의 에너지 정책을 수립하고 수행하는 연방에너지위원회, FERC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연방국가인 미국은 대부분의 정책이 연방 단위와 주 단위로 나눠서 이뤄지는데, 에너지의 경우 연방 차원의 정책은 FERC가, 주 정부 단위의 정책은 주별 공공산업위원회, PUC가 담당한다. 샌프란시스코에서 만났던 칼 우드 커미셔너가 근무한 기관이 캘리포니아 PUC로 약자로 CPUC라고 불린다.
연구단 일행은 브라질리아에서 리오 데 자네이로로 한 시간가량의 비행으로 이동한 다음 밤 비행기로 워싱턴 DC로 향했다. 주말이 한창인 토요일 밤, 리오 공항은 무척 붐볐다. 일행은 유나이티드 항공 카운터 앞에서 수속에 들어갔다. 그때 브라질 현지에서 일행을 안내하던 현지 한국인 가이드가 이해하기 힘든 말을 했다.
“저, 그런데 오늘 밤 티켓이 좀 이상합니다.”
그 말을 들은 정하수 부장이 고개를 돌려 가이드를 쳐다보며 물었다.
“무슨 말인가요? 티켓이 이상하다니?”
“오늘 비즈니스석 티켓이 모두 14장이고 이코노미가 두 장인데요, 이코노미가 예약 컨펌이 안 된 상태네요.”
최용석도 그 말을 듣고 가이드를 똑바로 바라봤다.
연구단 일행은 연구위원인 교수 6명, 노사정위원회 공익위원 2명, 정부 측 3명, 한전 측 3명, 전력노조를 대표하는 국장 1명, 그리고 소속이 애매한 최용석 등 모두 16명이었다. 이 중에서 최용석과 한전 구조조정실 차장 1명 등 2명만 전 일정에 이코노미 좌석을 예약한 상태였고 나머지 14명은 비즈니스석이었다. 이코노미 좌석 2개가 컨펌이 안 됐다면 이는 한전 차장과 최용석 두 사람의 자리였다.
“당장 서울로 전화해서 확인해요. 아니면 이코노미 두 자리 확보를 현장에서 하든지.”
정하수 부장은 목소리를 높여 가이드를 혼낼 듯이 소리쳤다.
불쌍한 현지 가이드는 유나이티드 항공사 카운터에서 한참 뭐라고 물어보더니 이내 핸드폰으로 서울의 여행사와도 통화했다. 그리고는 기가 죽은 듯한 모습으로 일행으로 돌아왔다.
“서울과 통화했습니다. 문제가 있네요. 비즈니스 좌석을 14장씩 예약을 하다 보니 일단 비즈니스 좌석이 여유 있는 비행 편을 우선적으로 예매한 모양입니다. 그러다 보니 이코노미 좌석이 풀로 부킹이 된 비행 편에 예약을 걸어버린 모양입니다. 조금 기다려 보면 이코노미 쪽에 자리가 날 수도 있다고 하네요.”
일행은 잠시 말이 없었다. 상황은 가이드의 설명 그대로였고 전체 일행 중 두 명이 비행기를 못 탈 가능성도 생긴 것이었다. 하지만 그 두 명은 사실 별로 중요한 멤버가 아니라고 모두가 느꼈다. 최용석은 일종의 덤으로 노조에서 붙여온 존재였고 한전 차장은 연구단 일행의 일정을 보조하는 역할만 하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한전의 이강산 처장과 정하수 부장에게 이 사태는 달랐다. 최용석은 노조가 주관해서 짠 해외 방문지 계획을 통째로 수립했고 각 기관의 컨택 포인트를 가진 존재였다. 그리고 지금까지 연구단 단장과도 관계가 좋아지고 있었고. 아무튼, 해외일정에서 그 중요도가 높아지고 있었다. 그런데 같은 비행기를 못 탄다는 것은 위기였다.
정하수 부장은 급한 마음에 항공사 카운터로 달려갔다. 지갑에서 신용카드를 꺼내고 가이드를 통해서 말했다.
“컨펌이 안 된 이코노미 두 좌석을 비즈니스로 업그레이드합시다. 당장 차액을 낼 테니.”
항공사 직원은 내용을 듣자마자 머리를 좌우로 가볍게 흔들었다. 그건 규정상 불가능하다는 뜻이었다. 다만 그들이 해 줄 수 있는 일은 카운터가 마감된 후 혹시 빈 좌석이 생기면 우선적으로 두 사람에게 배정해 주겠다는 것이었다. 다른 방법이 없었다.
게이트 마감 시간이 다가오면서 일행은 비행기에 올랐다. 최용석, 한전 차장, 정하수 부장, 그리고 현지 가이드만 초조한 표정으로 게이트 앞에 서 있었다. 혹시 누군가가 나타나지 않기를 기다리며.
그들의 기대는 보기 좋게 실패했다. 비행기는 만석. 빈자리는 없었다.
비즈니스석에 탑승한 연구단 일행은 워싱턴의 덜레스 공항으로 출발했다. 비행기를 같이 타지 못한 최용석과 한전 구조조정실 지상우 차장은 어두운 상공으로 멀어져 가는 보잉 747 비행기를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다.
사정을 잘 아는 중년의 항공사 직원이 다가와서 말했다.
“당신들 최종 목적지가 워싱턴이지요? 좀 있다 마이애미행 항공기가 출발하는데 거기에 아마 빈자리가 있을지도 몰라요. 그럼 일단 그 비행기를 타고 마이애미에서 워싱턴행으로 갈아타는 것도 방법인데, 그렇게 할래요?”
최용석은 고개를 끄떡이며 감사를 표했다. 지금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최대한 빨리 일행을 따라잡아야 하는 것이기에 다른 선택권이 없었다. 최용석과 지상우는 대기실 한쪽의 의자에 쭈그리고 앉았다. 운명에 모든 것을 맡겼다. 하지만 최용석으로서는 이런 상황도 재미있게 느껴졌다. 좀 늦게 가면 어때.
한 20분이 지났을까 아까 그 항공사 직원이 뛰어왔다. 그리고 소리쳤다.
“지금 34번 게이트로 가요. 거기에서 마이애미행 유나이티드가 20분 안에 떠나요. 자리가 있어요.”
최용석과 지상우는 그 직원에게 감사의 인사를 하고 34번 게이트로 뛰어갔다.
게이트는 마감 직전이었다. 거기에도 몇몇 미국인들이 대기상태로 서 있었다. 연초 연휴가 끝나는 시점이라 그런지 공항은 복잡했다. 많은 미국인들이 따뜻한 브라질로 놀러 왔다가 주말을 앞두고 집으로 돌아가는 시기였다.
두 사람은 마침내 비행기에 올랐고 서로 멀리 떨어지기는 했지만 빈자리에 각자 앉았다. 곧이어 문이 잠겼고 비행기는 마이애미를 향해 이륙했다. 일행들이 탄 워싱턴행 비행기 보다 약 30분 늦게 비슷한 항로로 비행을 시작했다. 긴 일정과 공항에서의 긴박한 시간에 지친 두 사람은 곧 잠이 들었다.
최용석과 지상우가 탄 유나이티드 항공편은 이른 아침에 마이애미 공항에 착륙했다. 리오 공항에서 항공사 직원이 마련해 준 워싱턴행 연결 항공편까지 남은 시간은 약 두 시간. 그 정도면 누가 봐도 충분한 시간이었다.
그러나 두 사람이 마이애미 공항 입국장에 도착했을 때 두 사람의 눈은 휘둥그레졌다. 입국심사장이 안 보일 정도로 줄이 길었다. 순간 두 시간 안에 저 입국심사대 통과가 가능할까라는 걱정이 앞섰다.
걱정이 현실이 됐다. 인파는 많았고 마이애미 공항 입국심사 직원들은 너무나 세심했다. 심사장을 통과하기도 전에 마이애미에서 워싱턴으로 가는 유나이티드 항공 국내선은 출발했다. 최용석과 지상우 차장이 연결 게이트 앞에 도착했을 때 모든 것이 완료된 상태였다. 항공사 직원에서 연결 항공권을 보여주니 그냥 기다리라고 한다. 일요일에는 워싱턴행 항공편이 12편이 있고 방금 출발한 항공편이 두 번째라고 했다. 아직 열 편이 더 있으니 기다려 보라고.
이후 두 편이 한 시간 간격으로 출발했지만 두 사람을 위한 빈자리는 없었다. 마음 좋게 생긴 중년의 항공사 여직원은 안쓰러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오늘이 연휴가 끝나는 일요일이라 상황이 안 좋아요. 지금 살펴보니 오늘 밤까지 대부분의 항공편이 빈 좌석이 없네요.”
이미 공항 대합실에서 세 시간째 기다리던 두 사람은 절망적이었다. 무엇보다 피곤했다. 다섯 시간에 가까운 밤 비행과 두 시간이 넘는 입국장의 줄 서기, 그리고 또 대합실에서의 기다림. 어디로든지 가서 눕고 싶었다.
“내 생각에는 오늘 공항 근처에 숙소에 하루 묵고 내일 아침 일찍 워싱턴으로 떠나는 것이 어떨까요? 첫 비행 편이 오전 6시인데 자리가 넉넉해요.”
진심으로 두 사람을 걱정해 주는 것으로 보이는 유나이티드 항공사의 직원은 다시 물었다.
최용석과 지상우는 그녀의 말에 따르기로 했다. 다른 대안이 없어 보였다.
태어나 처음 발을 디딘 마이애미. 돌핀스라는 미식축구팀이 유명한 도시를 뜻밖의 기회에 오게 됐다. 브라질에서 항공권 문제가 없었다면 애당초 오지 않았을 도시. 최용석은 나름 기대가 됐다. 어차피 오늘 하루를 지내야 할 바에 시내 구경이나 할까?
하지만 최용석의 기대와는 달리 밖에는 장대비가 내리고 있었다. 1월에 이런 비가 오다니.
마이애미 공항 인근의 힐튼 호텔에 둘은 각자 방을 잡았다. 그리고 하루를 보냈다. 비를 뚫고라도 시내로 가보자는 최용석의 요청을 지상우는 거절했다. 그는 너무 피곤했다. 최용석도 모든 것을 포기하고 방에서 뒹굴었다. 아쉬웠다. 비만 좀 덜 왔어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