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와의 재회, 그리고 만찬
워싱턴 힐튼 호텔에서 타이슨 슬로컴을 만나기로 한 것은 자신의 회의실이 공동연구단을 맞이하기에 좁다는 타이슨의 의견 때문이었다. 재미있는 일은 타이슨과 만나기로 했던 하이야트 호텔은 타이슨스 코너 센터라는 유명한 쇼핑센터 안에 있었다. 마치 타이슨이 그 동네 주인인 것 같은 묘한 우연이었다.
공동연구단 보다 먼저 기다리고 있던 타이슨은 한전이 미리 예약해 둔 호텔 내 회의장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의례적인 인사를 마치고 공동연구단은 타이슨을 앞에 두고 원탁 테이블에 둘러앉았다. 정부 측 위원들은 도대체 타이슨이라는 친구의 정체를 궁금해했으며 한편으로는 별 볼일 없는 시민단체의 일원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막장 면담이 시작되고 타이슨이 자신의 장기인 달변으로 퍼블릭 시티즌을 설명하고 자신이 미국 연방의회에서 벌이고 있는 각종 다양한 입법 로비를 설명하자 조금씩 고개를 끄떡이기 시작했다.
질의응답식으로 진행된 면담이 진행될수록 타이슨의 진가는 발휘됐다. 그는 미국의 전력산업 규제 역사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에디슨이 전기를 생산하면서 탄생했던 에디슨 컴퍼니에서부터 시작된 전력산업의 역사에서부터 독점 방지를 위해 에디슨의 회사를 전국 단위로 쪼갠 반독점법 시대의 이야기, 그리고 전력회사의 소유는 민간이 하되 요금을 비롯한 모든 사업 영역을 연방과 주정부의 규제 아래 포함시켰던 인슐 사건 등 미국 전력산업의 역사가 타이슨의 입을 통해서 나왔다. 그리고 1990년대의 자유화 시작과 그 문제점도 일장 연설처럼 진행됐다.
어차피 시민단체의 주장은 별반 다르지 않다는 반응을 보인 정부 측 위원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타이슨에 대한 관심이 떨어졌고, 노조 측 위원들은 신이 나서 질문을 이어갔다. 두 시간가량 진행된 면담을 끝으로 미국에서의 모든 일정이 마무리됐다. 연구단 일행은 조금씩 지쳐갔다. 뭔가 큰 숙제를 하나씩 해결한다는 마음으로 일정은 진행되고 있었다. 양측의 입장 차이는 분명했다.
면담을 마무리하는 이근석 단장의 마무리 발언이 끝난 후 최용석은 타이슨에게 다가갔다. 작년 봄에 한겨레 기자와 만난 후 두 번째 만남이었다.
“타이슨, 오늘 잘했어. 내가 듣고 싶은 말은 다 하던데?”
최용석은 익살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말을 건넸다.
“오, 괜찮았어? 사실 내가 준비한 말을 다 하지는 못했어. 근데 그거 알아? 엔론 재판이 재밌게 돼 간다는 거?”
타이슨의 대답에 최용석은 눈을 번뜩이며 물었다.
“어떻게? 뭐 새로운 사실이 있는 건가?”
“지금 재판이 막 시작됐는데, 엔론이 캘리포니아에서 고의로 발전량 감축을 다른 발전회사들과 담합했다는 증거와 증언들이 나오고 있어.”
“그래? 그거 재밌군. 소문이 사실이 돼 가는구먼.”
엔론은 당시 미국에서 제일 잘 나가던 에너지 기업이었다. 1985년에 생긴 이 회사는 텍사스 일부 지역에 도시가스를 공급하던 가스전문 회사였다.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전국적으로 전력을 비롯한 에너지 산업에 자유화 바람이 불자 공격적인 M&A를 벌여 한때 미국 7대 기업으로까지 불리며 급속하게 성장했다. 하지만 캘리포니아에서 전력부족 사태가 벌어지면서 그 배경에 엔론이 있다는 사실이 알려졌고, 연방정부는 대대적인 조사에 착수했다. 이 회사의 막대한 분식회계 정황이 발견되고 내부 고발이 이어지면서 경영진은 법정에 서게 됐고 지금도 감옥에 있다. 그들은 아마 200년 정도씩 형량을 선고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죽어서 백골이 돼서야 감옥을 나설 수 있다고 한다. 가석방 없는 조건이므로. 그리고 캘리포니아의 전기 부족 사태 역시 엔론을 필두로 하는 발전전문 회사들의 고의적인 발전량 감소라는 담합 때문에 벌어졌다는 사실도 밝혀졌다.
최용석과 타이슨은 잠깐 몇 마디 대화를 더 나눴지만, 연구단 일행을 놓칠 수가 없었기에 할 수 없이 아쉬운 이별을 했다. 타이슨과 최용석은 다음 해인 2004년 서울에서 다시 만나게 된다.
숙소로 돌아온 연구단 일행은 워싱턴 근교의 한식집에서 한식으로 저녁 식사를 했다. 서울을 떠나온 지 벌써 일주일이 지났다. 사람이 먹고 자는 것을 같이 하게 되면 없던 정도 생기는 것이 인지상정인가 보다. 이제 연구단은 입장의 차이를 떠나서 한 가족 같은 기분이 들 정도로 서로 익숙해졌다. 교수들 틈바구니 속에서 기가 좀 죽어 있던 최용석도 여러 교수들과 자연스럽게 어울리며 대화를 주고받기 시작했다.
식사를 마친 일행은 누군가의 제안에 따라 인근의 한국식 가라오케로 자리를 옮겼다. 술잔이 옮겨가고 조금씩 취기가 올랐다. 주로 밝은 표정이었던 김창석 교수는 그날따라 더 신이 나 보였다. 어차피 교수들 거의 전부 서울대에서 학부를 나온 사람들이다 보니 학번을 말하면 다 선후배 사이로 발전했다. 학창 시절 이야기가 나오자 김창석 교수를 필두로 여러 교수가 자신의 학창 시절 에피소드를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왁자지껄 박장대소도 터지기도 했다. 모처럼 서로의 긴장감을 내려놓고 어울리는 자리였다.
교수들의 대화를 지켜보던 최용석은 속으로 생각했다. 저들이 어느 곳이든 어느 방향이든 우리나라의 전문가 자리를 지키는 사람들이다. 공통점은 일단 서울대라는 학벌이다. 그리고 단순히 학벌만 좋은 것이 아니라 그에 맞는 행동을 보여준다. 물론 공부 잘한다고, 학벌 좋다고 모든 면에서 뛰어난 것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일단 저런 엘리트 그룹에 끼는 순간 스스로 그 집단에 맞는 행동을 하려고 의식을 하게 되는 것은 아닌가.
사실 그런 비슷한 말을 듣기는 했다. 우리나라 서울대 보다 훨씬 좋은 미국의 명문 사립대학 출신들은 자발적으로 자신이 다니는 학교가 규정하는 규범에 귀속된다고. 그런 것을 학풍이라고 하나? 남들과 다르다는 엘리트 의식이 옳은 것은 결코 아니다. 어느 사회나 그런 집단이 오히려 그 사회의 영속석을 망치기도 한다. 조선시대가 절망적이었던 이유는 주자학 이외의 다른 생각 자체를 허용하지 않았던 그 편협함 때문이었으리니.
물론 이를 그대로 서구식 대학의 학벌에 대입시킬 수는 없겠지만, 문벌(門閥), 군벌(軍閥), 재벌(財閥)에 쓰이는 그 단어 벌(閥)이 주는 느낌은 최용석을 토하게 만들었다. 그 이유는? 그에게는 그런 벌에 속하는 아무런 기득권이 없었기에. 부럽기도 했기에.
화목했던 밤을 지낸 공동연구단의 워싱턴에서의 마지막 일정은 오전 10시에 독립 전력연구자인 조 카사자를 만나는 일이었다. 조 카사자는 평생을 전력 엔지니어로 살아왔다. 워싱턴과 뉴욕 등 동부 일대의 여러 전력회사에서 배전 담당 기술자로 살다가 은퇴 후 아메리칸 에듀케이션 인스티튜트(AEI)라는 법인을 세우고 여기에서 전력회사의 기술적인 문제를 자문하거나 교육하는 그런 사업을 벌이고 있었다.
최용석이 카사자를 알게 된 것은 정말 우연이었다. 인터넷 검색 중에 미국의 LA 타임스에 실린 그의 투고를 읽게 됐다. 제목이 충격적이었다. The Indignation of Engineers, 최용석은 이 글을 엔지니어의 분노로 번역했다. 내용은 이랬다.
“지금 미국에서 말도 안 되는 폭거가 벌어진다. 돈 놀음도 제대로 못하는 경제학자라는 자들이 전력산업을 놓고 장난을 친다. 실패가 분명한 일이고 월 스트리트에서나 가능한 조작질 들이다. 그런데 실제로 이 산업을 떠받치고 있는 엔지니어들은 아무도 말을 하지 않는다. 이 비극을 당장 멈추라고 엔지니어들이 일어나야 한다.”
최용석 마음에 꼭 드는 내용이었고 전문을 번역해서 언론사로 뿌렸다. 물론 이를 기사화해 주는 언론사는 거의 없었다. 노동이나 전력 관련 전문지 몇 군데만 다뤄줬다.
박원빈 기자와의 취재에서 처음 만났는데, 그가 설립했던 AEI라는 기관의 주소를 찾아가니 버지니아주 페어팩스 카운티에 있던 그의 자택이었다. 워싱턴 DC와 바로 붙어 있던 그곳은 미국에서 카운티 단위에서는 소득 수준이 가장 높다는 전원도시였다. 당시 인터뷰는 그의 단골집 동네 중국집에서 점심을 먹으면서 진행했다.
연구단이 그의 집에 들어가는 것이 어려웠기에 이번에는 워싱턴 시내의 힐튼호텔의 회의장을 빌려서 면담을 했다. 1981년 힝클리가 레이건을 쏜 바로 그 유명한 힐튼호텔.
백발에 얇은 안경을 쓴 카사자는 단호한 어조로 전력산업 자유화의 맹점을 엔지니어의 입장에서 조목조목 짚었다. 일행 중 유일한 엔지니어였던 신중린 교수와의 가벼운 설전도 있었다. 카사자는 전기를 만들고 공급하는 이 메커니즘이 종합적인 조율과 부문별 유기적인 의사소통으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그러므로 전력산업의 각 부문을 쪼개서 각자 경쟁시킨다는 생각은 바보 같은 짓이라고까지 비판했다. 노조 측 위원들은 카사자의 이런 시원스러운 입장에 속으로 박수를 보냈다.
이것으로 미국에서의 모든 일정은 마무리됐다. 샌프란시스코와 새크라멘토를 거쳐 상파울루, 브라질리아, 리우데자네이루, 그리고 워싱턴 DC. 열하루 동안의 여정이었다. 여기서 무엇을 봤는지는 모두 각자의 인식으로 남을 것이다. 같은 현상을 보고도 해석은 달라질 수 있다. 과연 자유화가 만병통치약이었는지 아닌지 재앙이었는지는 각자의 잣대에 따라 다르다. 중요한 것은 벌어진 일은 벌어진 것이라는 것.
자유화의 근본적인 목표는 경쟁 자체가 아니다. 경쟁은 효율성을 높이기 위한 것이고, 효율성은 가격을 낮추기 위한 과정이다. 그런데 가끔 우리는 목표의 본질을 잊는다. 경쟁과 효율성 그 자체가 목표가 되는 착각. 그걸 피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