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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요아킴 Oct 28. 2024

전력산업 대한 짧은 생각

전력산업 구조개편 중단 20년, 그리고 새로운 도전에 대한 단상

   

벌써 25년이 지난 과거, 1998년 11월, 대한민국 국민은 청천벽력과도 같은 뉴스를 들었다. 국가부도사태 발생. 1970년대 이래 매년 두 자릿수 이상의 경제성장을 해 왔고, 1990년대 이후 그 속도가 조금 늦어졌다고 해도 세계에서 가장 빠른 속도로 매년 경제 규모가 커 가던 나라, 올림픽도 잘 치렀고 선진국 클럽이라던 OECD에도 가입했고 곧 세계 10위권에 경제 강국이 된다던 대한민국이 부도라니? 소위 말하는 IMF 사태, 이후 대한민국은 임진왜란 이전과 이후의 조선이 그랬듯이 완전히 다른 나라가 됐다.

     

IMF 시대의 시작과 함께 우리나라 전력산업도 급변하기 시작했다. 김대중 정부는 1999년 1월, 한국전력공사가 그동안 독점해 왔던 전기생산(발전), 수송(송배전), 공급(판매)을 잘라내고 이를 또 여러 개의 회사로 나눈 다음 최종적으로 모두 민영화(사유화)하겠다는 전력산업구조개편기본계획을 발표했다. 이런 방식의 구조개편은 이미 영국을 비롯한 유럽과 미국에서는 1990년대 초부터 시작되고 있던 일종의 유행이었다.

     

여기에서 사람들이 잠깐 잊어버린 것이 있었다. 바로 전기라는 서비스(또는 상품)의 물리적 특성이었다. 전기는 일단 저장이 불가능하다. 물론 에너지저장장치(ESS)라는 물건이 있지만 아직 초보 단계이다. 1GW짜리 원자력발전소가 생산하는 전기를 저장할 수 있는 저장장치는 아직 없다. 그리고 전기는 대체품이 없다. 우리 생활에서 전기가 없는 단 1초도 상상하기 어렵다. 이는 대체품이 없다는 말도 되고 경제학적으로 표현하자면 “수요탄력성이 매우 작다, 또는 비탄력적이다.”는 말이 된다. 결론적으로 발전소에서 만들어지는 전기는 말 그대로 빛의 속도로 소비자에게 전달되며 발전소가 정지하는 순간 전기사용도 불가능해지며, 이 순간 다른 어떤 것으로도 전기를 대체하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다. 비상발전기나 UPS 같은 일시적으로 이를 대신할 장치들은 있지만, 이들은 매우 제한적인 경우에 활용이 가능하다.

     

이와 같은 전기의 특성을 가장 빠르게 현실에 적용한 사람들이 미국 캘리포니아의 발전사업자들이었다. 미국에서 가장 진보적인 캘리포니아는 1998년부터 본격적으로 발전-송배전-판매를 분리한 양방향 자유경쟁체제를 도입했다. 영국에서의 성공 모델을 그대로 따라 했다. 처음에는 잘 돌아가는 것 같던 캘리포니아 전력시장은 2000년 말 겨울의 갑작스러운 이상 저온 현상에 따른 수요증가 국면에서 이상해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특정 발전소의 예상하지 못한 고장이었지만 이날 갑자기 급등한 전력도매가격을 보고 다른 발전회사들도 뭔가 깨달음을 얻었다. 그리고 이와 유사한 발전소 정지가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이미 시장을 “자유화”한 주 정부는 시장에 개입할 권한마저 없앴기 때문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이것이 그 유명한 “캘리포니아 사태(California Crisis)”였다. 시장 자유화의 마침표가 자본주의의 본류라는 미국, 그중 가장 진보적이고 또 개방적인 캘리포니아에서 찍게 된 것이다. 캘리포니아의 뒤를 이어 유사한 구조개편을 쫓던 주들은 이를 보고 자유화 조치를 중단했고 지금까지 더 이상의 급진적 자유화는 일어나지 않고 있다.      


우리나라의 전력산업구조개편은 김영삼 정부에서 먼저 검토하기 시작했다. 1990년대 초 영국에서 이미 전력시장 자유화와 민영화가 시작되는 것을 목격한 김영삼 정부는 이와 유사한 방식의 한전 민영화와 구조개편을 추진하기로 했지만, 결론적으로 “한전 독점에 따른 폐해보다는 독점에 의한 규모의 경제가 주는 편익이 더 크므로 전력산업구조개편을 규모의 경제가 사라지는 시점까지 유보한다”는 결정을 1997년에 내렸다. 그리고 앞에서 설명한 것과 같이 IMF 사태가 닥치면서 국가기간산업 해외매각을 통한 경제위기 극복의 차원에서 전력산업구조개편이 다시 수면 위로 떠 올랐다. 불과 2년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다.     


김대중 정부는 1999년 말 전력산업구조개편을 위한 특별법을 제정하고 2000년부터 본격적인 한전 분할과 민영화를 추진하려 했지만 2000년 초 총선을 앞두고 벌인 한전 노조인 전국전력노동조합을 비롯한 시민사회단체의 강력한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하지만 총선 이후 새로 구성된 국회에서 구조개편특별법은 2000년 12월 결국 국회를 통과했고, 2001년 4월, 한전의 발전부문은 6개 자회사로 분리됐다. 소위 말하는 도매시장경쟁의 시작이었다.     


김대중 정부의 뒤를 이은 노무현 정부 역시 한전의 배전부문을 6개 지역별로 분할, 이미 한전에서 독립한 6개 발전회사와 함께 완전한 경쟁체제를 구축하려고 했다. 하지만 전력노조는 다시 배전분할 반대를 위해 나섰고 험난한 협상 끝에 노조, 한전, 정부는 노사정 공동으로 배전분할과 관련한 공동위원회를 노사정위원회 산하에 설치, 이 위원회의 결정에 따라 배전부문 분할 여부를 결정하기로 대타협을 2003년에 이루었다. 그리고 2004년 5월, 노사정특별위원회는 캘리포니아 등의 구조개편 실패 사례 등을 근거로 배전부문 중단을 결의했고, 노무현 정부를 이를 수용함으로써 우리나라의 전력산업은 발전은 경쟁체제, 송배전 및 판매는 독점체제라는 기형적인 모습으로 남게 됐다.

     


그로부터 20년이 지나고 당시와는 다른 새로운 구조개편이 논의가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사실 1990년대 당시의 구조개편은 독점산업의 비효율성을 경쟁체제 도입으로 극복하자는 단순한 논리에서 출발했고, 이 과정에서 발전산업을 새로운 먹거리로 판단한 금융계의 입김으로 인해 전 세계적으로 급속히 퍼져 나갔다. 하지만 다른 산업과 다른 전기의 물리적 특성 등 시장화의 한계가 드러나면서 이와 같은 방식의 자유화는 그 추진 동력을 잃어버렸다. 이로부터 20년이 지난 이 시점 전력산업의 구조를 다시 고민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다.     

지금 세계적으로 전력산업이 당면하고 있는 두 개의 화두는 에너지전환과 전기화(Electrification)라는 두 단어로 요약할 수 있다. 각 나라는 지구의 기온 변화를 1.5℃ 안에 묶어두자는 공감대 속에서 나라별로 탄소중립을 약속하고 있는데, 우리나라 역시 2050년까지 탄소중립을 하겠다는 선언을 전 세계를 상대로 했다. 장차 무역장벽으로 변모해서 제2의 “사다리 걷어차기”가 될 수도 있는 RE100이라는 국제적 규범도 현실화하는 상황에서 우리의 치명적인 약점인 재생에너지 자원 부족 문제를 어떻게 풀어나갈 것인가는 국가적인 고민이 아닐 수 없다.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가장 큰 문제는 전체 발전설비 용량의 20%를 넘어섰지만, 실제 전력계통에는 6%밖에 흡수할 수밖에 없는 태양광과 풍력 등 재생에너지원들의 간헐성을 극복하는 현실적인 고민이다. 그리고 수도권에 집중이 계속되고 있는 전력수요를 감당하기 위한 송전망 확충은 이제 한계에 차올라서 특별한 대책이 필요하다. 전기 수요는 계속 수도권을 중심으로 늘어나는데 전기를 실어 나를 길이 부족하다. 그동안 우리는 매년 늘어나는 수요에 맞춰 발전소를 세우는 것에만 급급했다. 국민들의 보편적 전기사용을 보장하고 경제 발전을 뒷받침하기 위해 끊임없이 전력설비를 확충해 왔다. 이제 이 모든 것들이 한계상황으로 치닫고 있다.     


언론에 도배되는 한전의 재무위기는 가장 시급한 발등의 불이다.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치솟는 국제유가 때문에 지난 2년간 한전에 쌓인 부채는 200조 원이 넘었다. 유럽을 비롯한 다른 나라들은 유가 상승분을 전기요금에 반영하거나 전력회사에 정부 보조금을 주면서 흡수하고 있지만, 우리는 급격한 요금인상이 미치는 경제적 악영향 때문에 이를 전기요금에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 결과이다. 문제는 에너지전환 과정에서 석유 등 화석연료 산업에 대한 급격한 투자 감소로 인한 화석에너지 생산량 감소, 우크라이나 전쟁에 따른 대러시아 금수조치, 그리고 중동 산유국의 석유 무기화를 위한 생산량 감소 등의 문제가 한꺼번에 터져 나옴에 따라 앞으로도 국제유가는 더 올라갈 것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자, 이런 두통거리들을 어떻게 해결해야 하나? 우선 전력을 비롯한 에너지 문제를 순리대로 하나씩 풀어나갈 때 그 해법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첫발은 전기요금 현실화에서 시작해야 한다. 공기업 한전에게 모든 책임을 물어서 이 문제들이 풀리면 다행이겠지만 사실 이는 현실 도피에 불과하다. 자유경제체제 아래에서 적절한 전기를 생산하고 공급하는 기업들에게 적절한 투자보수율을 보장하지 않는다면 이는 산업 전체를 파국으로 몰아가게 될 것이다.     


전기요금 현실화는 당장에는 충격이겠지만 이를 통해 전기사용 합리화로 이어질 것이며 이는 지금까지 공급확충에만 집중되었던 전력산업의 정책을 수요조절 쪽으로도 자연스럽게 전환함으로써 궁극적으로 에너지사용 합리화는 물론 에너지전환 정책 추진에도 도움을 줄 것이다. 늘어나는 수요에 맞춰서 계속 전력설비를 건설하는 것보다 수요 자체를 적절히 조절함으로써 기후위기 대응은 물론이고 나라 전체의 자원 배분도 더 효과적으로 할 수 있다.      


이와 동시에 20년 동안 지속되고 있는 전력산업의 구조도 한 번 되돌아봐야 한다. 이는 지금과 같은 제한적인 발전경쟁과 한전의 송배전과 판매 독점이라는 산업구조에 대한 근본적인 고민에서 시작한다. 당초 계획했던 발전과 판매 사이의 완전한 양방향 경쟁체제 구축에 실패했으면 이에 대한 대안을 찾아야 한다. 사실 지구상에 우리가 꿈꾸었던 실시간 양방향 경쟁이 이루어지는 시장은 없다. 성공 사례로 유명한 북유럽의 노드풀과 미국의 PJM은 단일 전력산업을 쪼개서 억지로 경쟁시킨 것이 아니라 인근 지역의 전력산업을 통합해서 하나의 시장으로 묶은 것이다. 여름에는 수력발전량이 풍부한 노르웨이가 덴마크나 스웨덴으로 전기를 보내고, 갈수기인 겨울에는 덴마크의 풍력이나 화력, 그리고 스웨덴의 원자력으로 만든 전기가 노르웨이나 독일로 가는 그런 자연스러운 통합시장이다. 동북아슈퍼그리드가 하나의 망으로 묶으면 중국, 러시아, 북한, 한국, 일본이 이런 방식으로 전기를 서로 주고받을 수 있을 것이다.     


경쟁 자체가 별로 의미가 없는 발전공기업들의 발전원별 재그룹핑, 재무상태 악화로 더는 자본투자가 어려운 한전의 송전부문과 소매시장 개방, 그리고 전력거래소의 시장기능과 계통운영기능 분리 등등 20년 동안 모두가 논의를 회피했던 문제들도 같이 고민해야 하지 않을까?     


공공서비스인 전력산업의 맹목적인 자유화는 실패한다. 하지만 정치 논리에 지배받는 왜곡된 요금결정 구조 역시 파멸적인 결과를 불러올 것이다. 정부의 시장개입을 부르짖은 케인즈와 시장 자체의 자유를 강조한 하이에크, 지금 우리나라 전력산업의 위기는 케인즈식 방식이 맞는지 아니면 하이에크식 이론이 옳은지를 따질 때가 아니라 두 사람의 지혜를 함께 모아야만 하는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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