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듬이를 계속 열고....
미국에서의 첫 학기.
당시 처음 선택했던 전공은 Computer Science.
우리식으로 표현하자면 전산공학 정도?
내가 다니던 학교에는 컴퓨터 관련으로 전공이 두 개 있었다.
하나는 Computer Engineering, 다른 하나가 Computer Science.
앞의 것이 컴퓨터 하드웨어 디자인을 배우는 것이라면,
뒤의 것은 말 그대로 소프트웨어 프로그래밍.
일단 미국으로 간 이상 난 미국에 계속 살고 싶은 생각도 있었고,
소수민족 동양인, 한국인으로 일자리 찾기가 제일 쉬운 분야가
공학, 즉, Engineering이라고 들었다.
공학은 숫자와 로직으로 움직이고 이 분야가 동양인이 백인보다 조금 경쟁력을
더 가지는 분야임에는 틀림없었고,
무엇보다 보이거나 보이지 않는 차별, 인종에 대한 차별을 뚫는 유일한 방법이
전문직이 되는 것이라는 사실은 지금이나 그때나 변하지 않는 사실이다.
법, 경영, 경제, 행정 등등이 사회의 권력을 누리는 것은 당연하다.
우리나라나 미국이나 어디나 다 그렇다.
이 분야들은 실제로 사회를 운영하는 권력에 가깝다.
하지만 미국이 아무리 다인종 다문화 사회이고
1960년대 그 유명한 Civil Movement로
법적으로 모든 차별이 금지됐다고 하지만,
현실적으로 소수민족이 다수 민족인 백인, 그것도 앵글로 색슨 민족과 대등하게
경쟁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그래서 각자 자기 인종이나 민족이 잘하는 분야에서 유리천장을 뚫는다.
흑인들은 스포츠, 특히 농구를 해야 한다.
노예의 후손들인 미국 흑인들의 유연성, 탄력 등 신체적 우월성은
백인이 감히 이기지 못한다.
중남미 혼혈 민족인 메스티조 같은 사람들은 야구를 잘한다.
인도부터 중국, 일본, 한국까지 아시아인들은 수학과 논리력이 앞선다.
이 주제에 대해서는 나중에 내가 할 말이 많다.
기대하시라.
그래서 나도 컴퓨터를 전공으로 선택했다.
물론 결과적으로 실패했다. 나는.
첫 수업 시간, 교수의 강의를 한마디도 못 알아 들었다.
그다음 시간도, 그다음 주도, 그다음 달도 같았다.
가장 심각했던 사실은 숙제조차 못 알아 들었다는 사실이었다.
이래서는 안 되겠다는 절박감이 들었다.
내가 다니던 학교는 작은 사립대학이었고
교양과목 같은 경우 한 반의 인원이 20~30명,
전공과목은 10명 내외였다.
미국 대학 평가 기준에서 학생 대 교수 비율도 있다.
물론 그 비율이 낮을수록 좋은 평가를 받는다.
미국의 대학에 대한 이야기도 별도로 쓰고 싶다.
아무튼 수업 효과는 확실했다.
결석은 꿈도 못 꾸고 숙제도 엄청 많고
교수에 따라서는 매주 쪽지 시험을 봤다.
그게 다 성적에 포함됐다.
숙제를 이해 못 한다는 이 심각한 상황.
어느 날 내 옆에 앉은 백인 남학생에게 솔직히 말했다.
더듬거리는 영어로 내가 영어를 못해서 숙제를 모르겠다고.
그 친구, 놀란 눈을 뜨더니 설명을 시작했다.
교과서를 펴고 친절하게.
미국에는 워낙 다양한 인종과 민족들이 모였기에
영어를 못한다는 것이 별로 신기한 일이 아니다.
그 친구, 나중에 알게 된 이름이 Justin, 친절하게 다 가르쳐줬다.
그날 저녁 기숙사에서 숙제를 제대로 했다.
그리고 교과서를 읽기 시작하고 숙제를 하기 시작하니 뭔가 실마리가 잡혔다.
며칠 후 교수에게도 찾아가서 내 사정을 더듬더듬 이야기했다.
교수는 웃었다, 그게 무슨 큰 문제냐고.
그리고는 나를 특별히 신경 쓸 테니 열심히 하라고.
갑자기 힘이 솟았다.
신기하게 그 뒤부터 조금씩 좋아졌다.
미리 교과서를 읽고 수업에 들어가니 강의 내용이 어렴풋이 들리기 시작했다.
숙제하려고 복습을 하니 아리송했던 수업 내용이 이해되기 시작했다.
첫 학기 모두 세 과목을 신청했는데, 과목 하나하나씩 이렇게 극복이 됐다.
첫가을학기 성적은 전 과목 A.
나중에 알게 된 일이지만, 내가 제출하던 숙제나 중간, 기말 시험 모두
영어의 관점에서만 보면 별로 좋은 결과물들이 아니었다.
하지만 내용이 중요했다.
배운 내용을 어설픈 영어로 적어냈지만, 그 내용이 교수가 원했던 것들이라고 들었다.
교수한테서 직접 들은 말이었다.
한 학기가 지나자 자신감이 솟았다.
그리고 반년 정도를 살면서 당연히 영어 실력도 늘었다.
외국어 실력은 결국 그 외국어에 노출된 시간에 비례하고
또 얼마만큼 집중했는가에 달렸다.
나의 미국 생활 첫 학기는 마치 곤충이 더듬이로 주변을 파악하듯이
어설프게, 느리게, 더듬거리며 시작됐다.
귀가 조금씩 열렸기는 했지만 입은 열리지 않았다.
그 과정은 다음에 설명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