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시니 참 좋았다", 연휴 끝에 만난 뜻밖의 선물

깐깐한 문장 속에 숨겨진 다이아몬드 같은 다정함

by 홍반장

설 연휴를 앞두고 도서관에서 책을 여러 권 빌려왔다. 연휴 내내 책 속에 파묻혀 보리라 야심 찬 계획도 세웠다. 하지만 현실은 달랐다. 슬하의 자식들이 온다니 장도 보고 음식도 장만해야 했다. 아이들과 밀린 이야기를 나누고, 함께 드라마와 예능을 챙기다 보니 독서는 어느덧 '언감생심'이 되었다.


결국 연휴 마지막 날 아침, "그래도 한 권은 읽어야지" 하는 마음으로 집어 든 책이 바로 박완서 님의 <보시니 참 좋았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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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우고 싶었던 마음을 채워준 제목

우선 제목이 마음에 콕 박혔다. 어떤 이야기길래 보시니 참 좋았을까 하는 호기심도 있었지만, 어쩌면 나 자신이 무언가를 보며 "참 좋구나!" 하고 감탄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는지도 모르겠다.


처음엔 수필이나 소설인 줄 알았는데 펼쳐보니 동화집이었다. 예상과는 조금 달랐지만 오히려 반가웠다. 평소 흠모하던 박완서 작가의 글인 데다, 이제는 예쁜 손주가 있는 할머니가 되고 보니 아이에게 들려줄 이야기 몇 편을 미리 '쟁여둘' 심산으로 책장을 넘기기 시작했다.


박완서 작가 특유의 깐깐한 결이 동화에도 고스란히 살아있었다. 교훈적인 메시지가 적절히 버무려져 있으면서도 우리 전래 동화의 형식을 빌려온 점이 흥미로웠다. 작가는 서문에서 누락되었던 원고들을 찾아내어 다시 펴내며 "찌꺼기가 아닌 다이아몬드가 포함되어 있다"고 자신 있게 말했다. 그 당당한 애정이 읽는 이에게도 고스란히 전달되었다.


파격적인 그림과 따뜻한 이야기의 변주

김점선 화백의 삽화 또한 강렬했다. 날카로운 도구로 긁어낸 듯하면서도 뭉툭하고 부드러운 선이 공존하는 그림들. 처음엔 그 파격적인 화풍과 중간중간 등장하는 숫자의 의미가 낯설어 고개를 갸웃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야기를 다 읽고 나서 그림만 다시 넘겨보니 그 매력이 새로이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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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꽃 그림은 보기만 해도 화사한 봄기운이 느껴져 마음이 환해졌고, 새를 안은 여인의 모습은 쓸쓸하면서도 포근했다. 작가의 말처럼 '보는 즐거움'을 더해주는 파격적인 예술의 세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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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음속에 남은 이야기들

책 속의 짧은 이야기들은 1970년대 말, 답답했던 유신 시절에 쓰인 글들이라 한다. 그 어두운 시절에 이런 맑은 이야기들을 길어 올렸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찌랍디다」: 첫날밤 실수를 한 어린 신랑과 이를 지혜롭게 감싸준 신부의 이야기. 해학이 넘치는 이 이야기는 나중에 우리 손주 녀석에게 들려주려고 마음속에 꼭 저장해 두었다.


「보시니 참 좋았다」: 어린아이의 낙서 같은 성당 벽화가 최고의 성화로 선정되는 과정을 담았다. 소년의 꿈을 묵묵히 응원해 준 신부님의 모습에서 진정한 스승의 표상을 보았다. "평범한 그림을 예술로 만든 것은 오랜 세월과 사람들의 사랑"이라는 대목에서는 가슴이 뭉클했다.


「산과 나무를 위한 사랑법」: 자연을 위한다며 나무에 리본을 다는 행위가 오히려 자연을 해친다는 이야기에 얼굴이 화끈거렸다. 예전 제자들과 봉사활동을 하며 나무에 '자연보호' 리본을 달았던 기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조용히 쓰레기나 주울 것을, 참 부끄러운 열정이었다 싶다.


「아빠의 선생님이 오시는 날」: 아이들에게 비빔밥을 나누어 주던 선생님의 이야기는 나의 교직 생활을 돌아보게 했다. 매달 '비빔밥 데이', '떡볶이 데이'를 열며 아이들과 웃고 떠들던 그 시절. "이놈들, 다들 잘 살고 있느냐"고 마음속으로 안부를 물어본다.


할머니의 마음으로 덮는 책장

마지막 수록작 「참으로 놀랍고 아름다운 일은 아기를 맞이하는 가족의 준비를 그린다. 담 밖으로 사랑을 넓히는 엄마, 더 믿음직한 세상을 만들려는 아빠, 그리고 손주에게 들려줄 이야깃주머니를 준비하는 할머니. 그 모습이 지금 내 마음과 꼭 같아 한참을 머물렀다.


연휴의 분주함 속에 우연히 만난 이 책을 이제 보내주려 한다. 글을 써두고 바쁜 일상을 보내느라 이제야 마무리를 짓는다. 도서관에 반납하러 가는 길, 내 마음의 이야깃주머니는 박완서 작가가 남겨준 다이아몬드 같은 이야기들로 묵직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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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내 손주가 자라 이 이야기를 들려줄 때, 아이의 눈동자에 비친 세상도 이 벽화처럼 언제나 '보시니 참 좋은' 풍경이기를 소망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