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목 해변으로 가는 길

그 시절, 그리고 지금의 나에게 건네는 따뜻한 인사

by 홍반장

새벽 기차를 타고 강릉역에 내렸다. 낯선 공기 속에 발을 내디뎠는데, 이상하게도 이 도시가 낯설지 않다. 강릉역은 참 예뻤다. 길 건너 버스정류장에서 멀찍이 바라보는 역사의 모습조차 다정하게 다가온다.


314-1번 버스를 타고 그 유명한 안목 커피거리로 향했다. 소문은 무성했으나 한 번도 가지 못했던 곳. 그래서 이번 가족여행의 목적지로 기꺼이 제안했던 곳이다. 종점에서 내려 앱이 일러주는 대로 골목을 따라 걷다 보니, 뜻밖의 풍경이 펼쳐진다. 담벼락마다 예스럽게 그려진 벽화들. 아, 가난하고 궁색했으나 결코 부끄럽지 않았던 유년의 기억이 그곳에 머물고 있었다.

그림과 글이 어우러진 골목은 고요하다.

오직 벽화 속 시간만이 느릿하게 흐르는 듯한 정적을

홀로 마주하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진짜 자판기인 줄 알았네."

깜빡 속을 뻔했지만,

이런 기분 좋은 속임수라면 언제든 환영이다.


벽에 그려진 오징어는 금방이라도 바다 냄새를 풍길 듯 빛깔이 생생하다.


안목해변4.jpg

아이를 업은 뒷모습 앞에서 발길이 멈췄다.

'누나일까' 생각하다가 다시 보니, 엄마라 하기엔 너무 앳된 새댁이다.

바다 나간 남편을 기다리는 저 어린 새댁의 가슴엔,

등에 업힌 아이의 무게가 몽글몽글한 그리움으로 맺혀 있다.


안목해변5.jpg

벽화 속 길과 내가 걷는 사진 속 길이 어느새 하나로 연결된다.

저 골목 끝을 따라가면

푸른 바다가 마중 나와 나를 안아줄 것만 같다.


안목해변6.jpg

리어카에 대롱대롱 매달린 아이들의 장난기가 무겁다.

무게를 못 이긴 리어카가 뒤로 '뱅그르르' 자빠지려 하자,

당황한 어른이 리어카 손잡이에 온몸을 실어 매달린다.

리어카가 겨우 수평을 되찾은 뒤에야 아이들은 오종종하니 내려온다.

그 소란스러운 풍경에 나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안목해변7.jpg

소리 지르는 엄마의 목소리와

울고불고 매달리는 아이들 소리로 왁자지껄했을 골목.

이제 울던 아이도, 야단치던 젊은 엄마도 떠나고 없다.

남은 것은

시린 아랫목을 지키는 노인들의 옅은 숨결뿐이다.


안목해변8.jpg

골목 어귀에 선 단발머리 소녀의 촌스러움이 못내 정겹다.

어린 시절,

그곳에 서 있던 바로 나의 모습이다.


9.jpg

손톱 밑에 까만 흙이 물들 때까지 멈추지 않던 공기놀이.

손등이 트고 꽁꽁 어는 줄도 모른 채

해가 질 때까지 골목을 지키던 그날들이

벽화 위로 겹쳐 흐른다.


안목해변9.jpg

조용한 거리를 다 지나오니 탁 트인 안목 해변이 반긴다.

막 도착한 관광객 무리도 호기심 어린 눈으로 벽화 골목을 기웃거린다.

벽화 거리에서 나는,

잊고 지냈던 내 유년의 시간을 다시금 소환하고 있었다.


안목해변91.jpg

화려한 커피 향 가득한 거리보다,

나는 이 낡고 따스한 벽화 거리를 더 오래도록 기억할 것 같다.



벽화거리1 .jpg

20230130.

"그 시절의 나에게, 그리고 지금의 나에게 건네는 따뜻한 인사였다."


매거진의 이전글쑥버무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