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 모임의 마지막 시간을 보내며, 서로에게 좋은 책을 추천해 주는 시간을 가졌다. 그중 한 회원이 권한 책이 바로 예하·임홍순의 『할머니와 나의 사계절 요리 학교』였다. 처음엔 고개가 갸웃해졌다. "요리책?" 소설 읽기에 푹 빠져 있던 내게는 그다지 매력적이지 않아 보였다. 그러나 믿을만한 회원의 추천 도서라 가벼운 마음으로 책장을 넘겼다. 요리에 대한 진심이 나를 끌어당겼다. 요리 명상에 대한 막연한 꿈을 꾸었던 내게 이 책은 더없이 맑은 명상으로 다가왔다.
표지의 연둣빛은 봄기운을 닮았고, 책의 구성도 사계절을 따라 봄, 여름(여름방학), 가을, 겨울(겨울방학)으로 나뉘어 있었다. 나는 어느새 그들의 봄 속을 걷고 있었다.
그 봄의 두 번째 요리, 바로 "쑥 털털이". 우리 동네에서는 이를 "쑥버무리"라 불렀다.
책 속에는 할머니의 오랜 세월이 깃든 손길과 손녀의 감각적인 감성이 나란히 담긴 요리 사진들이 실려 있었다. 상상력이 샘처럼 솟았다. 대학 대신 할머니의 요리 학교에 입학한 손녀 예하, 그 열정에 기꺼이 손을 내미는 할머니. 서로의 시간을 나누고, 서로의 지혜를 이어가는 그들의 모습이 부러울 만큼 정겨웠다. 나 또한 언젠가 엄마의 시간 안에 함께 머물기를 바랐기에, 그들의 이야기는 내 마음 깊이 스며들었다.
어릴 적, 시골의 겨울은 유난히도 길고 추웠다. 배도 늘 고팠다. 봄이 오면 가장 먼저 길가에 얼굴을 내미는 건 어린 쑥이었다. 솜털이 반짝이는 여린 쑥은, 우리들에게 봄이 왔음을 가장 먼저 알려주는 전령이었다.
학교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 친구들과 나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길가에 쪼그려 앉아 쑥을 뜯었다. 봉지도 귀했던 그 시절, 손으로 뜯은 쑥을 책보자기 옆에 찔러 넣거나 점퍼 주머니에 넣고 돌아왔다.
그 쑥은 저녁이 되면 엄마 손에서 된장을 풀어 넣은 쑥국이 되었다. 밥상머리에 앉은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엄마의 칭찬을 기다렸다.
"우리 미야가 학교 갔다 오는 길에 쑥을 뜯어와서 이렇게 저녁을 맛있게 먹게 되었네. 아이고, 대견해라. 다 컸네, 우리 미야."
그 말에 나는 어른이라도 된 양 마음이 부풀었다.
동무들과 짝짜꿍이 맞는 날이면, 엄마 몰래 창고에서 밀가루를 들고 친구 집에 모이곤 했다. 어깨너머로 배운 엄마의 방식으로 쑥버무리를 만들었다. 쑥을 다듬고, 아직은 차가운 우물물에 맨 손으로 씻었다, 밀가루를 양푼이에 담고 쑥을 넣고 버물버물 한 후, 커다란 무쇠솥에 물을 한 그릇 정도를 넣고 그 위에 삼발이를 올리고 보자기 하나 펼친 후 버무린 쑥을 얹었다. 사카린(그때 우리 동네에는 설탕이 없었다. 이 사카린도 겁나 귀한 조미료였다. 물론 이것도 엄마 모르게 가져온 것이지만.)을 물에 풀어서, 그 물을 손으로 탁탁 튕기듯이 쑥버무리 위에 뿌려주었다. 이것도 어깨 너머로 어머니가 하시던 양을 보고 배운 것이다. 흉내 내는 정도였겠지만 우리들은 사뭇 진지했다.
불을 제대로 땔 줄 모르니 연기도 많이 났다.
눈물 콧물 다 빼면서도 누구 하나 부엌 앞을 떠나지 않았다.
그동안 저마다 보고 들은 것들은 있어서 이래야 한다 저래야 한다 말도 많고, 탈도 많았다. 그러다 말다툼이라도 일어나면, 토라져 집에 가기도 하고, 그 친구가 엄마들에게 꼬질러 모두 집에 불러가 혼쭐이 나기도 했다. 그런 경험을 몇 번 하고 나니 토라져 집에 가는 친구는 무조건 잡아서 달래 끝까지 같이 하게 되었다.
어떨 땐 물이 적어서, 불이 세어서 솥 바닥이 다 타고, 깔았던 면 보자기까지 태우기도 했다. 그럴 때 쑥버무리는 탄내가 진동을 했지만 누구 하나 탓하지 않고 맛있게 먹었다. 그만큼 배가 고팠고, 그만큼 소중했다.
요즘은 아무리 그때를 떠올리며 만들어도, 그 맛이 나질 않는다. 아마도 옆에 함께할 동무가 없어서일 것이다. 엄마 몰래 불을 지피던 긴장감도, 허기졌던 배도 이제는 없다.
보릿고개 같은 여린 봄날, 쑥버무리는 어린 우리들의 허기를 달래주던 귀한 음식이었다. 쑥버무리를 만들며 눈물 콧물을 훔치던 내 친구들, 그 이름만 불러도 봄비처럼 아련하다.
이쁜이, 옥이, 경이, 자야, 다들 잘 살고 있지?
그때 그날의 연기와 쑥내음이, 오늘따라 유난히 그립구나.
쑥버무리
보릿고개 같은 여린 봄날
책보 속에 꼭꼭 숨겨온
솜털 반짝이는 어린 쑥
엄마 몰래 훔친 밀가루와
귀하디 귀한 사카린 솔솔 뿌려
동무들과 눈물 콧물로 쪄낸 쑥버무리
탄내 가득해도 꿀맛 같던 그 시절
허기진 배를 채우며 함께 했던 우정
이제는 동무도, 허기도 사라지고
그리운 쑥내음만 아련하다.
"당신의 마음엔, 배고픈 줄도 모르고 함께 웃고 뛰놀던 어떤 봄날의 맛이 숨어 있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