콧등에 맺힌 땀방울의 유전
유전자의 힘보다 더 무서운 사랑의 힘
"어, 장모님도 콧등에 땀이 맺히네요. 솔이도 그런데.“
부부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모인 저녁 식탁. 평소 고기를 즐기지 않는 제가 닭구이를 열심히 먹고 있는 모습을 빤히 쳐다보던 사위가 한 말입니다. 사위가 정성껏 끓여낸 미역국과 노릇하게 구워진 닭구이가 오가는 따뜻한 자리였습니다. 종일 손주를 돌보고 집안을 정리하며 분주히 움직였던 탓인지, 저도 모르는 사이 콧잔등에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혔나 봅니다.
그때 옆에 앉아 있던 남편이 슬쩍 거들었습니다.
"이 사람, 우리 솔이 가졌을 때도 코끝에 땀이 참 자주 맺혔지. 그때 참 예뻤는데.“
평소 남들 앞에서 이런 다정한 소리를 한 번도 하지 않던 무덤덤한 남편이었기에, 순간 당황스러우면서도 묘한 설렘이 일었습니다.
"그때가 어제 같은데, 벌써 이 나이가 되어 버렸네.“
남편이 덧붙인 한마디와 함께 시간은 수십 년 전의 어느 봄밤으로 흘러갔습니다. 참 가난했던 시절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가난이 슬프지는 않았습니다. 누구나 그렇게 부족하게 시작하던 때였고, 결핍 속에서 하나씩 채워가는 소소한 즐거움이 오히려 삶을 지탱해 주던 시간이었습니다. 신혼 시절, 우리는 연애 때의 설렘이 가득한 우리들만의 비밀 아지트, 두류공원을 자주 찾았습니다.
지금도 눈을 감으면 선명합니다. 눈부신 벚꽃이 가로등 불빛 아래 환하게 빛나던 그 밤. 흐드러지게 핀 꽃잎이 눈송이처럼 휘날리던 그 길 위에서, 잔잔한 꽃무늬가 가득한 산모복을 입고 만삭의 배를 소중히 감싼 채 환하게 웃고 있던 사진 속의 나. 직장에 다니며 처음으로 큰맘 먹고 장만했던 그 예쁜 옷은 벚꽃만큼이나 제 마음을 설레게 했습니다. 그 사진을 볼 때면 가난했지만 찬란했던 그 시절이 무척이나 그립습니다.
그때도 제 콧등에는 땀이 자주 맺혔던 모양입니다. 남편은 투박한 손가락 끝으로 내 콧등을 가만히 닦아주며 말했었지요.
"어이구, 예뻐라.“
그땐 그저 으레 하는 말인 줄 알았는데, 수십 년이 지난 오늘 다시 꺼내는 남편의 고백을 들으니 그때의 말은 진심이었나 봅니다.
뱃속의 아이가 잘 자라고 있음을 매일 확인하며 행복해하던 그 시간들은 제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웠던 한 페이지였습니다. 그 아이가 어느덧 자라 자신의 아이 둘을 알뜰살뜰 키워내고 있으니 감회가 새롭습니다. 그런데 이 '땀방울'의 유전자는 딸을 지나 손자에게까지 닿았나 봅니다.
"그래서 승진이도 장모님 닮아, 솔이 닮아 콧등에 땀이 맺히나 봐요. 그 모습이 참 예쁩니다.“
장인의 말을 수줍게 따라 하는 사위의 얼굴에도 기분 좋은 미소가 번졌습니다. 꽃피는 봄밤의 정취 덕분이었을까요, 아니면 생일 축하 와인 한 잔에 담긴 온기 덕분이었을까요.
사랑은 대를 이어 흐르고, 콧등에 맺힌 작은 땀방울 하나가 그 깊은 내리사랑의 증거임을 깨닫는 밤. 유전자의 힘보다 더 무서운 사랑의 힘을 느끼며, 우리의 다정한 저녁 식탁도 기분 좋게 마무리되었습니다.
"가난했지만 슬프지 않았던 그 시절의 벚꽃 아래서, 우리는 이미 가장 풍요로운 유산을 나누고 있었는지 모릅니다. 대를 이어 흐르는 것은 비단 유전자뿐만이 아니라, 서로를 바라보던 다정한 시선일 테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