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상수 감독의 영화 <도망친 여자>를 보았다. 마침 OTT 서비스에 홍 감독의 영화들이 올라와 있다는 소식을 듣고, 대구 집에 머무는 동안 찬찬히 감상할 기회를 가졌다. 화면 속 김민희의 얼굴을 마주하는 것도 꽤 오랜만이다.
독립영화가 늘 그렇듯, 영화는 조금은 어색하고 투박한 호흡으로 시작된다. 장면과 장면 사이의 연결이 매끄럽지 않고 때로는 거친 느낌마저 주지만, 그 불연속적인 리듬이야말로 그의 영화가 가진 묘한 매력이다.
남편이 출장을 간 사이, 주인공 '감희'는 세 명의 지인을 만난다. 두 명은 그녀가 직접 그들의 집을 찾아가고, 세 번째 친구는 극장에서 우연히 마주친다는 설정이다. 우정의 대화가 이어지는 동안, 언제나처럼 바다 수면 위와 아래로 여러 물결들이 독립적으로 진행되고 있다.
흥미로운 점은 감희가 만나는 사람마다 마치 주문처럼 반복해서 내뱉는 대사다.
"우리는 매일 붙어 있죠. 뭐. 떨어져 본 적이 없어요. 진짜? 네, 지금이 처음이에요. 이번이. 며칠 아니니까 이렇게 떨어져 지내는 거지. 처음이에요, 5년 만에. 5년 동안 한 번도 단 하루도 떨어져 있어 본 적 없어요. 그 사람이 그냥 그렇게 살고 싶대요. 사랑하는 사람은 무조건 붙어 있어야 된다고 그렇게 말하더라고요."
이 대사를 집요하게 반복하는 그녀를 보며 문득 의문이 생겼다. 저 말은 과연 행복한 현실의 고백일까, 아니면 세상을 향해, 혹은 자기 자신을 향해 내뱉는 간절한 독백일까.
제목은 왜 하필 <도망친 여자>였을까?
그녀가 지금의 남편을 만나 과거의 삶으로부터 도망쳐온 상태를 의미하는 것일까. 아니면 남편이 집을 비운 며칠 사이, 익숙한 구속으로부터 잠시 이곳으로 도망쳐온 현재의 그녀를 말하는 것일까.
영화의 마지막 장면, 감희는 왜 다시 영화관 안으로 발걸음을 돌렸을까. 스크린 속에 펼쳐지던 무심한 파도는 무엇을 상징하는 것일까. 찾아보니 그 바다 장면은 홍 감독의 전작 <잘 알지도 못하면서>의 한 장면이라고 한다. (처음 보던 영화는 흑백이고, 나중 다시 들어가 본 영화는 칼라였다. 나는 미처 눈치채지 못했다.) 어쩌면 그녀는 스크린이라는 거울을 통해수면 아래 홀로 흐르는 자신의 내면을 응시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이 작품은 제70회(2020년) 베를린 국제 영화제에서 은곰상(감독상)을 수상하며 그 작품성을 인정받았다. 영화가 끝난 뒤에도 감희가 반복하던 "사랑하는 사람은 붙어 있어야 한다"는 말이 귓가에 맴돈다.
나태주 시인은 가장 잘하는 일이 ‘혼자서 노는 일’이라 말했습니다. 혼자서 책을 읽고, 생각하고, 길을 걷는 그 고요한 시간이 실은 누군가를 진정으로 사랑하기 위한 가장 정직한 준비일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감희가 반복하던 “사랑하는 사람은 무조건 붙어 있어야 한다”는 말은, 거꾸로 ‘혼자 있을 권리’를 잃어버린 이의 서글픈 주문이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남편이 비운 며칠의 틈을 타 친구들을 만나고, 마침내 홀로 스크린 앞의 파도를 마주한 그녀의 뒷모습에서 나는 비로소 안도감을 느낍니다.
화면 가득 밀려오던 그 무심한 파도처럼, 우리에게도 타인의 시선과 구속에서 잠시 도망쳐 나와 오롯이 나만의 수면 아래로 침잠할 시간이 필요합니다. 홀로 노는 법을 배운 사람만이, 다시 누군가의 곁으로 돌아갔을 때 비로소 건강하게 사랑할 수 있을 테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