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행복의 나라를 보고

이선균의 지조와 조정석의 뜨거운 변론, 그들이 꿈꾼 '행복의 나라'

by 홍반장

꼿꼿한 지조와 뜨거운 변론이 만난 그곳, <행복의 나라>

1979년, 대한민국을 뒤흔든 대통령 암살 사건. 그 거대한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단 한 번의 재판으로 생사가 갈려야 했던 인물들이 있습니다. 영화 <행복의 나라>는 승패만을 쫓던 생계형 변호사 정인후(조정석)와 상관의 명령에 복종한 죄로 죽음의 문턱에 선 강직한 군인 박태주(이선균)의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1. 법정은 승패를 가리는 곳인가, 정의를 찾는 곳인가


"법정은요, 옳은 놈 그른 놈 가리는 데가 아니에요. 이기는 놈 지는 놈 가리는 데라고요."


영화 초반, 정인후 변호사의 대사는 매우 현실적이고 냉정합니다. 가짜 깁스까지 동원하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그는 오직 '승리'만을 믿는 인물이었죠. 반면 박태주 대령은 다릅니다. "군인은 군법을 지켜야 한다"며 편법을 거부하고 군사 재판의 규칙을 따르려 합니다.


이 극과 극의 인물들이 만나며 영화는 팽팽한 긴장감을 자아냅니다. 이길 줄만 아는 변호사와 죽어도 꺾일 줄 모르는 군인. 이들의 만남은 처음에는 불협화음 같았으나, 시간이 흐를수록 서로의 진심을 확인하는 뜨거운 우정으로 변해갑니다.



2. 휘어지는 유연성인가, 부러지는 강직함인가

박태주 대령은 원칙주의자입니다. 육사를 졸업하고 전방 근무만을 고집했던 모범적인 무관이었죠. 그는 상관의 명령에 따라 총을 겨눴고, 그 결과로 내란의 주범이 되었습니다. 이번 사건에 연루된 8명 중 박태주 혼자 현역 군인입니다. 정인후는 그를 살리기 위해 "눈 한번 딱 감으면 세상이 달라진다"고 설득합니다. 가족을 위해, 아이들을 위해 한 번만 비겁해지자고 말이죠.


하지만 박태주는 말합니다.


"시간을 돌려도 저의 선택은 변하지 않을 겁니다."


그의 대답을 들으며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내렸습니다. 무엇이 옳은지는 자명하지만,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 같은 평범한 사람들이 그 지조를 지키기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요. 현실과 타협하며 유연하게 사는 것이 지혜인지, 아니면 끝까지 꼿꼿하게 서서 부러지는 것이 가치 있는 일인지에 대한 깊은 고민을 던져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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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두 배우가 남긴 찬란한 앙상블

믿고 보는 두 배우의 합은 역시나 훌륭했습니다. 특히 고인이 된 이선균 배우의 연기는 보는 내내 애틋함을 더했습니다. 그 특유의 저음과 툭툭 뱉는 듯한 말투, 표정 연기를 더 이상 볼 수 없다는 사실이 너무나 안타까웠습니다. 그가 보여준 박태주의 꼿꼿함은 스크린 너머로 경외심까지 느끼게 했습니다.


상대역인 조정석 배우는 배역을 위해 일부러 살을 찌운 듯한 모습으로 등장해, 생계형 변호사에서 진정한 변호인으로 거듭나는 인물의 감정 변화를 완벽하게 그려냈습니다. 후반부 그가 쏟아내는 '핵사이다' 변론은 관객들의 답답한 가슴을 뻥 뚫어주기에 충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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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우리 모두가 꿈꾸는 '행복의 나라'로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며 흐르는 이선희의 '행복의 나라로'는 영화가 남긴 여운을 배가시킵니다.


"장막을 걷어라,

나의 좁은 눈으로 이 세상을 떠보자...

다들 행복의 나라로 갑시다."


가사를 곱씹어 봅니다. 박태주가 꿈꿨던 나라는 아마도 아내의 밥 짓는 냄새와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가득한 그 소박한 일상이었을 겁니다. 비와 천둥의 소리를 이겨내고 춤을 추고 싶었던 그의 간절함이 노래에 실려 가슴을 울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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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며

나라면 어떻게 했을까요?

아마 설득당하기도 전에 먼저 실리를 취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두 주인공 사이에 흐르는 그 소리 없이 강한 신뢰와 우정이 더욱 귀하게 다가옵니다. 꼿꼿하게 서 있는 것이 주는 감동, 그리고 그 뒤에 숨겨진 인간적인 고뇌를 깊이 느끼게 해준 영화였습니다.




[영화 속 명대사]

"군인은 지켜야 할 규칙이 있어요. 난 군인이요. 군인은 군법을 지켜야 합니다." (박태주)

"재판엔 규칙 같은 거 없습니다. 이긴 놈이 장땡이지." (정인후)

"왕이 되고 싶으면 왕 해, 돈이 갖고 싶으면 대한민국 돈 다 가져, 대신 사람은 죽이지 마." (정인후)

"복잡하게 생각할 것 없어요. 양심이니 신념이니 눈 한번 딱 감으면 돼. 세상이 달라진다니까. 어짜피 대한민국은 김부장만 기억할 겁니다. 반역자든 혁명가든 박태주란 이름은 기억 못해요."(정인후)

"5년 만기 적금에 16평 슬라브 전세집 전부 400만원이면 안됩니다. 형님은 20년 째 탄광일을 하고 동생은 건설 현장을 돌며 용접공으로 살고 있습니다.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우수하게 육사를 졸업한 피고인은 전방 근무만을 고집할 만큼 모범적인 무관이었습니다. 6사단 시절 상관인 김용일로부터 정보부 차출을 명받고 10 여 차례 야전 복귀를 요청했습니다. 이 전출 요청서는 정치 군인이고 싶지 않았던 피고인을 증명하는 자료입니다. 피고인는 동료에게 총을 겨누고 목숨을 뺏었습니다. 어떤 이유로도 살인은 정당화 될 수 없으며 엄벌에 처해져야 마땅합니다. 하지만 박태주 행위가 내란 기도라는 주장에는 절대 동조할 수 없습니다. 명령에 따른 군인에게 죄를 물어서는 안 됩니다. 30분, 불과 30분 전에 명령이 주어졌습니다. 부하의 판단을 막기 위한 상관의 의도적 조치였습니다. 형법 제12조 강요된 행위에는 벌하지 않는다. 피고인은 권력의 요직에 있으면서 그 누구보다도 청렴했고 국가를 위해서는 언제나 앞장서서 적과 맞서 싸우데 참 군인이었습니다. 자랑스러운 무관을 꿈꾸며 국립 묘지에 묻히고 싶다던 이 이 어리석은 원칙주의자에게 극형만은 제발 면해 주시기를 간곡히 부탁드립니다."(정인후)

"시간을 돌릴 수 있다면 6사단 시절 낡은 군 관사로 돌아가고 싶습니다. 그곳은 아내의 밥 짓는 냄새가, 아이들 웃음소리가 있었습니다." (박태주)

"나는 대한민국 군인입니다. 군인은 명령에 복종해야 합니다. 그것은 내 아이들, 나의 가족, 나의 국가를 지켜준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10월 26일 그날, 저의 선택은 변하지 않을 겁니다."(박태주)

"그래, 내 하나는 알지. 자네 진짜 변호사야. 잘 있게." (박태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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