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손에 여전히 시가 머물고 있으니, 이 얼마나 다행한 일인지요. 닿지 못한 2년의 시간 동안 하루 한 편씩 써 내려갔다는 나태주 시인의 신작 시집을 덮으며 생각했습니다. '오늘도 이것으로 좋았다'라고 말이죠.
시집의 문을 여는 '오늘 하루'와 '안녕'이라는 시는 이미 필사하며 마음에 새겼습니다. 첫 두 편이 준 인상이 어찌나 강렬했는지, 그 시들의 시어들만으로도 시집 전체를 관통하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아마도 지금 내 나이가 주는 공명 때문이겠지요. 이들과 맥을 같이하는 '소망'이라는 시 또한 깊은 울림으로 다가왔습니다.
오늘도 하던 일 마치지
못하고 잠이 든다
아니다 오늘도 하고 싶었던 일
다하지 못하고 잠이 든다
이다음 나 세상 떠나는 그날에도
세상에서 하고 싶었던 일
다하지 못하는 섭섭함에
뒤돌아보며 뒤돌아보며
눈을 감게 될까?
— '소망' 중에서
'세상 속으로'라는 시를 읽을 때도 마음은 비슷했습니다. 매일매일을 마지막 같은 마음으로 살아가야 한다고 다짐하는 요즘이니까요. 언젠가 인생의 시동이 아주 걸리지 않을 때가 오겠지만, 그때까지는 부지런히 마음의 엔진을 돌리며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채송화' 속의 "미리 넘어져서 더는 넘어질 일 없는 꽃"이라는 구절을 읽을 때는, 어쩌면 이 말이 이제 우리 나이를 이르는 또 다른 이름이 아닐까 싶어 오래 입안에 공굴리며 읊조려 보았습니다.
가장 아프게 와닿았던 시는 '내상'이었습니다. 시인은 고백합니다. 졸렬한 인생을 산 자신에게도 아들딸에게 존경받고 아내에게 신뢰받는 일이 그 무엇보다 어려운 일이었다고요. 제게도 아들딸들에게 존경받는 것이 가장 어렵고 힘든 일이었습니다. 학교에서 제자들에게, 동료들에게 인정받는 것보다 훨씬. 지금도 아들딸들에게 존경받는 부모가 되려고 무던히도 애쓰고 있는 중입니다. 그 시간이 제게는 참으로 소중하고 고귀합니다. 더 늦기 전에 이런 노력을 할 시간을 가질 수 있었음에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겠습니다.
유전자의 신비로움을 노래한 '거울' 앞에서는 피식 웃음이 났습니다.
아침에 세수하다가
거울을 볼 때마다
아버지가 나를 보고 계신다
그것도 늙은 아버지.
— '거울' 전문
저 역시 거울을 볼 때마다 깜짝깜짝 놀라곤 합니다. 거울 속에 나이 든 엄마가, 늙어가는 언니가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거든요. 어떻게 이토록 꼭 닮으며 늙어가는지, 세월이 빚어낸 그 신통한 닮음 앞에 경외감마저 듭니다.
시인은 '더딘 인생'을 통해 인생의 순리를 말합니다. 꽃은 사람이 살라는 곳이 아니라 저 살고 싶은 곳에서 산다는 것. 사람의 일도 마찬가지라는 것을 깨닫기 위해 칠십 년 세월을 보냈다는 시인의 말에 고개를 끄덕입니다. 누구나 제 타고난 본성대로 살고 지고. 나 하란대로 살지 않는다는 걸, 이제사 저도 알아가는 중입니다.
딸이여, 용서하라, 이제 이 당연한 걸 알아가는 어미를.
시집의 표제이기도 한 '너무 잘하려고 애쓰지 마라'의 구절은, 지금 두 아들을 키우며 고군분투 중인 나의 대견하고도 안쓰러운 딸에게 꼭 들려주고 싶습니다. "오늘의 일은 오늘의 일로 충분하니, 너무 잘하려고 애쓰지 말라"는 그 다정한 위로를요.
시집 곳곳에는 BTS, 카톡, 손열음 피아니스트, 간호장교 김혜주 대위 등 동시대를 살아가는 존재들에 대한 시인의 따뜻한 시선이 가득했습니다. 덕분에 손열음의 연주를 찾아 들으며 귀 호강을 하기도 하고, 청년 세대인 BTS를 향한 시인의 애정 어린 찬사에 미소 짓기도 했습니다. 동명 스님과 나눈 깊이 있는 시담(詩談) 또한 삶의 결을 다듬는 데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80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시를 써온 시인의 뒷모습은 참으로 깊고도 아득합니다. 저는 언제쯤 그 발자취를 겨우 흉내라도 낼 수 있을까요. 읽은 지 좀 지난 시집인데 이제사 리뷰를 씁니다. 시인이 건넨 다정한 문장들이 오늘 밤 제 마음의 온도를 180°C쯤 따스하게 데워주는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