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한민, 아무튼 비건을 읽고

죄의식 없는 식탁을 위한 불편한 초대

by 홍반장

나는 왜 나물밥집을 선호하는 사람이 되었나

나는 평소 고기를 즐기지 않는다. 식탁 위에서 고기 요리와 나물밥 중 하나를 고르라면 주저 없이 나물밥을 선택하는 편이다. 여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섞여 있다. 절에 다니는 종교적인 영향도 있고, 채식을 즐기시는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식습관도 한몫한다.


결정적인 계기는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였다. 공포 영화 속 한 장면에서 시신을 닭 모이로 주는 모습을 본 후로, 한동안 계란조차 입에 대지 못했다. 그렇게 나는 ‘고기를 멀리하는 사람’으로 살아왔다. 하지만 마음 한구석에는 늘 궁금함이 있었다. ‘비건이란 정확히 무엇일까? 왜 사람들은 비건이 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걸까?’ 그 답을 제대로 알고 싶어 김한민 작가의 <아무튼 비건>을 집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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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는 것만으로도 고통스러운 진실들

책을 읽어 내려가는 과정은 솔직히 고역이었다. 고기뿐만 아니라 우유와 계란이라는 단어만 떠올려도 속이 울렁거릴 지경이었다. 작가가 펼쳐 놓은 페이지들 속에는 우리가 애써 외면해온 ‘악취 나는 진실’들이 가득했기 때문이다.


"도살장이 유리로 되어 있었다면 모든 사람들은 채식주의자가 되었을 것이다." (37p)


폴 매카트니의 이 말처럼, 책은 유리 너머의 풍경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우유 한 잔을 얻기 위해 암소에게 행해지는 강제 임신과 '강간대'라 불리는 장치, 태어나자마자 어미와 생이별하는 송아지의 울음소리. 그리고 암탉이 아니라는 이유만으로 산 채로 분쇄기에 던져지는 수천 마리의 수컷 병아리들. 인간의 식탁을 풍요롭게 하기 위해 생명을 '생체 기계'로 취급하는 공장식 축산의 민낯은 가히 악마적이었다.


평소 고기를 즐기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이토록 구체적인 폭력을 마주하는 일은 커다란 충격으로 다가왔다. 책을 제대로 읽은 대가로 나는 이제 이전과는 같은 마음으로 음식을 마주할 수 없게 되었다.



'내 것'이 아닌 '남의 것'을 아끼는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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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에서 특히 인상 깊었던 대목은 저자의 어린 시절 일화였다. 학급 물품을 "내 것처럼 아끼자"는 한국의 문구와 달리, 외국에서는 "남의 것처럼 아끼자"고 가르친다는 점이다. '내 것'은 소홀히 해도 될지 모르지만, 타자의 권리와 생명은 더 조심하고 귀하게 대해야 한다는 그 상식이 우리 사회에서는 왜 그토록 작동하지 않는 걸까.


우리는 동물을 철저히 '타자화'한다. 잘해줘 봤자 즉각적인 이득이 돌아오지 않는 존재들에게 무성의하고 잔인해지는 '이해관계 지향적'인 태도가 결국 비극적인 도살장을 만들어낸 것이다. 만약 우리가 '남의 새끼'도 내 자식만큼 귀하게 여겼다면, 지금의 축산 시스템은 존재할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비건, 죄의식 없는 식탁을 향한 첫걸음

저자는 비건이 되어 행복하다고 말한다. 그 행복은 단순히 건강해졌다는 신체적 차원을 넘어선다.


"진실을 보고 깨닫고 내가 추구하는 가치들과 나의 일상이 일치되어 거슬림 없이 살 수 있다는 것, 하루 세끼에 죄의식이나 찜찜함이 없다는 것." (59p)


이 문장을 읽으며 나는 안도했다. 내가 느낀 구역질은 단순한 거부감이 아니라, 내 안의 양심이 보내는 신호였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고기 문화가 만연하고 풍요가 넘쳐나는 세상에서 완벽한 비건으로 살아가기란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타자의 고통에 기여하고 있지 않다는 확신이 주는 보람과 기쁨을 나도 느껴보고 싶어졌다.


거창한 선언은 아닐지라도, 이제는 나의 식탁 위에서 작은 한 걸음을 보태려 한다. 진실을 목격한 이상, 이전의 무지로 돌아갈 수는 없으니까. 최소한 내가 먹는 음식을 향해 진심으로 감사하고, 생명의 무게를 고민하는 일부터 시작해보려 한다.



"당신과 나의 오늘이 타자의 고통에 빚지지 않는, 온전하고 깨끗한 응원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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