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혜윤의 아무튼 메모를 읽고

문장을 수집하다, 나를 살게 할 단어를 찾다

by 홍반장

평생을 '기록'과 함께 살았다. 학교 현장에서 연수를 받을 때면, 강사의 한마디라도 놓칠세라 손을 바삐 움직였다. 그런 나를 보고 동료들은 '기록의 여신'이라 부르기도 했다. 하지만 사실 그 별명 뒤에는 나의 약점이 숨어 있었다. 나는 소문난 악필인 데다, 가만히 앉아 강의를 들으면 금세 집중력이 흐트러지곤 했다. 무엇보다 분명 감동하며 고개를 끄덕였는데, 돌아서면 "무슨 이야기였더라?" 하며 허공을 더듬게 되는 망각의 속도가 무서웠다. 나에게 메모는 기억하기 위한 수단이자, 졸음을 쫓는 절박한 몸짓이었다.


책을 읽는 습관도 비슷하다. 나는 보통 한 권의 책을 두 번 읽는다. 1독은 전체적인 스토리의 흐름을 따라가고, 2독은 내 마음을 건드린 문장을 찾아 메모를 한다. 아니, 거의 '필사'에 가까운 수준으로 옮겨 적는다. 그렇게 모인 문장들은 내 안으로 들어와 비로소 '나'라는 사람의 일부가 되었다. 때로는 내가 그 문장이 되어, 그 문장이 지시하는 방향대로 생을 밀고 나가기도 했다. 나 역시 정혜윤 작가가 말하는 '문장 수집가'였던 셈이다.


최근에는 가현산을 오르내리며 『아무튼, 메모』를 오디오북으로 들었다. 종이책의 질감을 좋아하지만, 산행 중에는 '밀리의 서재'로 2독을 한다. 전체를 훑어보기 좋은 종이책과 달리 전자책은 가끔 독서의 방향을 잃기도 하지만, 귀로 들리는 문장들을 수집하며 걷는 산길은 그 자체로 명상과 같았다.




기록은 발을 땅에 딛게 하고, 다시 떼게 하는 힘


이 책은 총 2부로 나뉜다. 1부가 평범한 비메모주의자가 뜨거운 메모주의자로 거듭나는 과정을 담았다면, 2부는 저자의 내밀한 메모장을 그대로 옮겨 놓은 듯하다. 정혜윤 작가는 메모장이 '꿈의 공간'이길 바라고, 그 안에 자신이 살고 싶은 세상을 담는다.


"한 빼빼 마른 인간이 한 발은 땅에 딛고, 다른 한 발은 땅에서 뗀 그림이었다. 내가 발을 땅에 딛게 하는 힘, 그 땅에서 발을 떼게 하는 힘, 둘 다 바로 메모였다." (36면)


작가가 노트 맨 앞장에 그려 넣었다는 '이동 중인 인간'의 그림은 내게 큰 위로가 되었다. 퇴직 후, 나는 매일 산을 오르며 내 인생의 다음 발걸음을 고민하고 있다. 그때 나를 지탱해 준 것 역시 내가 수집한 문장들이었다. 과거의 나를 땅에 딛게 한 것도, 미래의 나를 향해 발을 떼게 한 것도 결국 기록의 힘이었다.




우리가 읽는 단어, 우리가 살아낼 인생


책 속에는 유독 마음을 머물게 하는 대목들이 많다. 특히 보르헤스의 문장을 인용한 부분에서 나는 한참을 머물렀다.


"우리는 단어를 읽지만 그 단어를 살아낸다." (38면)


내가 왜 그토록 지독하게 문장을 수집했는지 비로소 이해가 갔다. 나는 단순히 예쁜 말을 모은 것이 아니라, 내가 담기고 싶은 인생의 가치들을 모으고 있었던 것이다. '친구', '봄', '열정' 같은 단어를 적을 때, 내 마음은 이미 그 단어 속으로 여행을 떠난다. 빈 메모장의 여백은 아직 쓰이지 않은 나의 미래이자, 현실보다 더 중요한 현실이 된다.


정혜윤 작가는 말한다. 괴로움 속에서 말없이 메모하는 기분은 '얼음 밑을 흐르는 물소리를 듣는 것'과 같다고. 그 소리를 듣고 있으면 곧 봄이 올 것임을 알게 된다고 말이다. 나 역시 인생의 위기마다 책을 펼쳤고, 더 간절하게 메모했다. 그때 만난 문장들은 나에게 손을 들어주기도 했고, 나의 오류를 잡아주기도 했다. 세상 속에 홀로 던져진 기분일 때 만난 사소한 공감의 문장들은 결코 나를 속이지 않았고, 끝내 나를 다시 일으키는 힘이 되어주었다.




메모는 삶을 위한 예열 과정이다


작가는 자신의 노트를 복기하며 이렇게 적었다.


"휘갈겨 쓴 글씨들, 수없이 반복된 질문들, 물음표, 물음표……. 그 물음표 뒤에 수많은 대답들. 그러나 그 노트에는 발돋움을 하면서 돌파하려는 한 인간이 살아 있다."


이 대목에서 나는 가만히 나의 노트를 펼쳐보았다. 나의 메모장 역시 수많은 물음표와 정돈되지 않은 글씨들로 어지럽다. 하지만 그 무질서한 기록들이 실은 어떻게든 삶을 돌파해 보려는 나의 '발돋움'이었음을, 이 책을 통해 비로소 긍정하게 된다.


가현산의 붉은 버들을 바라보며 나는 오늘도 '내가 살고 싶은 단어'들을 수집한다. 정혜윤 작가의 말처럼 메모는 삶을 위한 예열 과정이며, 우리가 쓴 문장은 언젠가 우리의 현실로 부화할 것이기에.


"메모는 나를 속인 적이 없다. 결국은 힘이 된다."


작가의 말대로 조금 더 용감하게 나의 다음 페이지를 적어 내려가기로 한다. 그녀가 얼음 밑을 흐르는 물소리를 들으며 봄을 기다리듯 나의 기록들도 내 삶의 가장 따뜻한 계절을 데려오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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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내가 수집한 이 단어들이, 내일의 나를 가장 아름다운 곳으로 데려다줄 것을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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