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모퉁이에서 마주한 문장들

이다혜 에세이집, 《오래된 세계의 농담》을 읽고

by 홍반장

##산을 오르며 만난 '오래된 세계의 농담'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는 산행길, 밀리의 서재 오디오북에서 흘러나오는 이다혜 작가의 에세이《오래된 세계의 농담》은 삶을 관통하는 따뜻한 인사이트를 건네준다. 아는 고전은 반가웠고, 제목만 알던 고전은 설렜으며, 여러 번 읽은 고전은 잊혀가는 기억 한 자락을 데려왔다. '지금 다시 이 고전들을 읽는다면 저자와 나는 같은 느낌을 공유할까, 아니면 전혀 다른 길을 걷게 될까?' 상상하는 재미가 쏠쏠했다. 각 고전과 어울리는 음악과 영화를 곁들인 작가의 시선을 따라가며, 나 역시 그것들을 천천히 음미해보고 싶다는 갈증이 생겼다.


작가는 말한다. 삶에 지칠수록 우리에겐 깊은 문장이 필요하다고. 어수선한 감정이 가라앉지 않을 때, 앞으로 걸어갈 이유를 찾지 못할 때, 시간을 이겨낸 문장들은 늘 그 자리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고.


##낡은 책을 떠나보내며 느낀 청춘의 통증

작가는 자신의 독서가 '아버지'라는 프리즘을 통한 것이었다고 고백한다. 그 지점에서 나 역시 지나온 시간을 반추했다. 나의 20대부터 40대까지의 독서는 '아이들에게 물려주고 싶은 유산'이었다. 훗날 내 아이들이 내 나이가 되었을 때, 엄마의 손때와 메모가 가득한 페이지를 읽으며 그 시절의 엄마를 다시 만나주길 바랐다. 그래서 500원, 1000 원하던 삼성당 문고판부터 귀한 판본까지, 생활비를 아껴가며 책장을 채우고 페이지마다 나의 생각과 느낌을 마구 갈겨놓는 재미로 살았다.


얼마 전 이사를 하며 그 낡은 책들을 수십 권 버리고 팔았다. 요즘은 더 예쁘고 읽기 좋은 판본들이 쏟아져 나오니 아이들의 오래된 묵은 이 책들을 펼칠 것 같지도 않았고, 이사할 때마다 짐이 되는 책들을 보며 이제는 미니멀 라이프를 실천해야겠다는 다짐도 보탰다. 하지만 남편의 손을 빌려 책을 떠나보내며 나는 못내 아팠다. 그것은 단순히 종이 뭉치를 정리하는 것이 아니라, 치열하게 읽고 써 내려갔던 내 청춘의 한 조각을 떼어내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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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급/ 학교 경영과 고전의 지혜

책 속의 《손자병법》 이야기를 들으며 아직 이 고전을 완독 하지 못한 나 자신을 되돌아보았다. '이 책을 진작에 읽었더라면, 나의 학급 경영과 학교 경영이 훨씬 현명하고 지혜롭지 않았을까' 하는 뒤늦은 아쉬움이 밀려왔다. 전략은 전장의 장수에게만 필요한 것이 아니다. 삶이라는 파도를 넘는 모든 이에게 고전은 가장 날카롭고도 따뜻한 전략서가 된다. 더 늦기 전에, 이 고전의 지혜를 펼쳐보려 한다.


##삶보다 거대한 이야기, 그 안의 우리들

소설 속 인물들은 작가의 상상력이 빚어낸 허구일지 모르나, 때로 이야기는 실제 삶보다 거대하다. 우리는 삶의 거대한 국면을 이해하기 위해 기꺼이 고전을 소환한다. '죄와 죄의식'을 헤아리기 위해 맥베스와 라스콜니코프의 고뇌를 빌려오고, '욕망의 부질없음'과 그럼에도 빛나던 '찰나의 경이'를 말하기 위해 안나 카레니나와 제이 개츠비의 이름을 부른다. 그들은 종이 위에 갇힌 존재가 아니라, 우리 삶의 좌표를 일깨워주는 이정표다.


마음을 이쪽저쪽 두지 못해 부유하는 날이면, 작가는 생각을 묶어두기 위해 오래된 책을 읽는다. 십 년, 혹은 이천 년의 세월을 버텨온 책들. 수많은 승객이 스쳐 지나갔으나 내리지 않고 창밖으로 바라만 본, '오래된 기차역' 같은 책들 앞에서 작가는 여행자가 된다. 그 역에서만 허락된 독특한 전망에 마음을 빼앗기고, 이름 붙일 수 없던 공허함을 채운 후 다시 다음 기차에 오른다.


##머리맡의 응급처방, 마법이 되는 문장들

작가는 말한다. 독서가에게도 응급처방이 필요하다고. 소란스러운 생각을 잠재우면서도, 내면으로 깊숙이 침잠할 수 있는, 적당한 오솔길이 난 책 말이다. 협탁 위에 두고 자기 전 아껴 읽는 한두 페이지가 좋은 꿈의 밑그림이 되어준다면 그보다 더한 행운이 없다고.


천 년 전의 기록인 세이쇼나곤의 《베갯머리 서책》은 마치 '천 년 전의 인스타그램' 같다. 마음을 건드린 찰나의 장면들을 모아 '좋아요'를 눌러놓은 듯한 페이지들.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은 겉만 번지르르한 '매끈한 능숙함' 뒤의 공허함을 경계하게 한다. 자크 프레베르의 시 〈알리칸테〉 역시 마법을 부린다. 혀끝에서 터지는 오렌지 향과 따스한 체온의 온기를 단 몇 줄의 글귀로 재현해 낸다. 그것이 고전이 부리는 소박하고도 위대한 마법의 전부다.


알리칸테 (Alicante)


오렌지가 탁자 위에

당신의 옷은 바닥 위에

그리고 당신은 내 침대 속에


현재의 감미로운 선물

밤의 서늘함

내 삶의 따스함.

— 자크 프레베르(Jacques Prévert), 시집 《말들(Paroles)》 중


##작가가 추천하는 고전과 친해지는 방법

고전이 여전히 어렵게 느껴진다면 작가가 제안하는 소박한 방법들을 따라가 보자.

1. 100페이지까지만 꼼꼼하게 읽어보기: 일단 문턱을 넘으면 새로운 세상이 열린다.

2. 책을 함부로 다루며 읽기: 밑줄을 긋고 낙서를 하며 책과 대화하는 적극적인 독서가 필요하다.

3. 각색작 즐기기: 영화, 뮤지컬 등을 통해 입체적으로 고전을 만나보자.

산길을 내려오며 생각한다. 내 서재에서 사라진 낡은 책들은 아쉽지만, 내 안에 새겨진 고전의 문장들은 결코 낡아 없어지지 않을 것임을. 삶의 모퉁이를 돌 때마다 그 자리에서 나를 지탱해 주는 단단한 지팡이가 되어줄 것이다.



"오래된 기차역 같은 고전의 문장들은 결코 낡지 않는다. 그곳에서 나는 오늘도 어제보다 조금 더 선명해진 나를 만나며, 다음 생의 페이지를 넘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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