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에는 그림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그러다 어느 순간, 글이 그림처럼 마음속으로 스며들었다. 담백하게, 그리고 아주 담담하게.
대구 집에서 딸아이네 집으로 출발하기 전, 나에게 주어진 시간은 단 2시간이었다. 이동 전 짧은 시간에 읽기에는 글보다 그림이 많은 책이 제격이라는 생각에 책장에서 이 책을 꺼냈다. 후루룩 넘기면 30분 안에 금방 끝날 줄 알았다. 그런데 짧고 단순한 문장 하나하나가 주는 울림이 어찌나 큰지, 결국 한 페이지, 한 페이지를 곱씹어 들여다봐야만 했다. 가벼운 마음으로 집어 든 그림책에 그만 발목이 잡히고 만 것이다.
작가 찰리 맥커시는 어디서든 읽어도 좋을 책을 썼다고 말한다. 나는 언제나 첫 표지부터 차례대로 읽어야 직성이 풀리는 별난 결백이 있는데, 작가는 중간 어디쯤부터 읽어도 상관없단다. 그래서인지 이 책에는 페이지 표시가 없다. 어디를 펼쳐도 그곳이 곧 당신의 시작이라는 듯이.
표지에는 두더지를 두 손으로 감싸 안은 소년, 그 옆에 무심히 앉은 여우, 그리고 소년의 이마를 다정하게 핥는 말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손으로 꾹꾹 눌러쓴 듯한 캘리그래피는 글조차 그림의 일부처럼 보이게 하는 마법을 부린다. 표지를 지나 악보가 그려진 페이지를 넘기면, 그들이 길을 떠나는 장면이 나온다. 이제 이 길 위에서 수많은 이야기가 펼쳐질 것이다.
삶이라는 거친 들판을 걷는 우리들
소년은 외로웠고, 처음 땅 위로 나온 두더지를 만났다. 둘은 함께 거친 들판을 걷는다. 이 거친 들판은 우리의 삶을 꼭 닮았다. 때로는 두렵고 막막하지만, 동시에 눈이 시리게 아름답다는 점에서 말이다.
정처 없이 걷던 소년과 두더지는 여우를 만난다. 만약 우리가 두더지라면 여우를 마주하는 일이 그리 유쾌하진 않겠지만, 소년은 궁금한 것이 참 많다. 케이크에 집착하는 두더지는 먹을 것 앞에서는 정신을 못 차려도, 그 외의 순간에는 누구보다 깊은 지혜를 보여준다. 덫에 걸려 으르렁거리던 여우는 두더지의 도움으로 자유를 얻고 여행에 합류한다. 말은 이들 중 가장 크고 유순한 존재다.
이 넷은 우리와 마찬가지로 저마다 다르다. 이야기의 끝부분으로 가다 보면 그들이 왜 여기 함께 있는지를 깨닫게 된다. 사랑하기 위해, 그리고 사랑받기 위해서임을. 우리들의 인생 여정에서도 결국 본질은 이것이 아닐까. 아마 이 책을 읽는 당신도 그러할 것이다.
존재만으로 충분하다는 것
분명 가볍게 읽으려 시작했는데, 문장 하나하나가 자꾸 발걸음을 멈추게 한다. '아, 이 책 정말 뭐지? 미친 거 아냐?' 싶은 감탄이 절로 나온다. 도저히 그냥 덮을 수가 없어, 결국 나는 이 책을 통째로 필사하기로 마음먹었다.
특히 가슴에 남았던 대목은 말의 놀라운 고백이었다. 날 수 있는데 다른 말들이 질투하는 바람에 날기를 그만두었다는 말의 고백, 그리고 날 수 있든 없든 그냥 너를 사랑한다는 소년의 대화.
자신이 얼마나 평범한지 알게 될까 봐 때로는 걱정이 된다는 말도 깊이 공감되었다. 누군가에게 좋은 사람으로 보이고 싶을 때, 우리는 종종 그가 너무도 평범한 나에게 실망할까 봐 겁을 내곤 하지 않는가?
컵에 무엇이 담겼는지가 아니라, 컵이라는 존재가 있다는 자체만으로 좋다는 소년의 말도 좋았다. 우리는 살면서 존재만으로 충분하다는 걸, 굳이 무언가를 증명하려 애쓰지 않아도 괜찮다는 걸 너무 자주 잊고 산다.
마지막 페이지에 이르자 가슴이 마구 뛴다.
"때때로 네게 들려오는 모든 말들이 미움에 가득 찬 말들이겠지만, 세상에는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랑이 있어. "
사랑이 가득한 이 세상, 나 또한 누군가에게 사랑이 되어주며 행복하게 살아가야겠다고 다짐한다. 나의 사랑을 찾으며, 한 걸음씩 천천히.
이 아침, 이 책을 읽게 되어 너무나 행복하다. 심장이 쿵쾅거린다. 결국 나는 이 책을 평생 곁에 두기로 했다. 대구에서 딸아이 집으로 향하는 짐 속에도 이 책을 소중히 챙겨 넣었다. 이제 온 가족이 모여 한 페이지씩 함께 읽으며, 각자의 마음속에 담긴 이야기들을 나누고 싶다.
후기> 진이와 ‘아이야 용사’
딸아이네 도착해 손자 진이와 이 페이지를 같이 읽었다.
"이다음에 크면 어떤 사람이 되고 싶어?"
"친절한 사람. " 소년이 대답했다.
곁에 있는 진이에게 똑같이 물어보았다.
"진이는 나중에 커서 어떤 사람이 되고 싶어?"
진이가 씩씩하게 답한다.
"응, 나는 아이야 용사가 될 거야. 빨간 아이야 용사! "
그 대답에 웃음이 터져 나왔다.
4살 진이에게 '친절한 사람'을 기대하다니, 내가 너무 어려운 질문을 한 걸까?
"그렇구나, 진이는 빨간 아 용사가 되고 싶구나."
내 대답에 진이가 덧붙인다.
"응, 할머니는 파란색 야 용사 해."
"하하하, 그래. 할머니는 파란색 따뜻한 야 용사가 될게."
그러자 진이도 할머니를 따라 다시 말한다.
"어, 그럼, 나는 아이야 빨간 용감한 아 용사가 될게."
어쩌면 아이의 세계에서는 '친절한 사람'보다 '용감한 용사'가 더 멋진 꿈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녀석의 마음속에도 이미 따뜻함이 자리 잡고 있음을 느낀다.
(참고로 ‘아이야 용사’는 진이가 요즘 한창 관심을 가지고 보는 한글 공부 키즈 프로그램에 나오는 캐릭터 아, 이, 야 3명의 용사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