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할 수 없는 운명
어제 그저 회사 상사였던 사람이 하루아침에 제 세상 전부를 채우게 되는 게 연애의 시작이라고 할까요? 아니면 이것도 그저 썸 타는 거라고 해야 하나요? 썸이든 연애든 부사장은 제 인생에 갑자기 나타나서 주인공 자리를 떡하니 차고 눌러앉았답니다. 그리고 전 그걸 ‘운명'이라고 굳게 믿기 시작했죠.
다시 이 전 얘기로 돌아가서, 저는 별별 생각을 다 하면서 부사장이 앉아 있던 테이블에 앉았는데, 그 사람은 그저 저를 보며 웃기만 했어요. ‘내가 뭘 어쨌길래 저렇게 웃지?’하는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그는 제 속마음을 읽은 듯 숙취는 어떠냐고 묻더라고요. 전 이런 이상한 긴장감이 싫어서 바로 ‘어젯밤 일은 정말 미안하다. 기억은 안 나지만 내가 뭘 했든 그냥 다 잊고 앞으로 편하게 일할 수 있으면 좋겠다'라고 속사포처럼 말해버렸네요, 그리고 그 말이 끝나자마자 전 그의 폭탄선언을 들었습니다. ‘You kissed me. Don’t you remember? (네가 나한테 키스했잖아. 기억 안 나?)’... ‘오 마이 갓!!! 이건 도대체 무슨 전개지?’ 머릿속이 하얗게 비워졌어요. ‘내가 뭘 어쨌다고???’ 직장 사람들과 같이 회식하던 스토리에서 뜬금없이 상사와 ‘키스’라니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필름이 뚝 끊긴 저로선 상상조차 할 수가 없었네요.
전 황당한 표정을 지으며 제 앞에 있는 184cm의 키에 넓은 어깨를 가진 코와 입은 나름 잘생긴 그러나 머리는 짧게 밀어버린 스페인 남자를 쳐다보았죠. 전 그의 말이 진심인지 농담인지 분간을 할 수가 없었어요. 하지만 그 혼란스러운 와 중에도 ‘부사장님, 인도네시아에 결혼할 여자가 있다고 회사에 소문이 돌던데요?’라고 물었고 그는 ‘내가 이슬람교를 믿는 사람과 결혼을 한다고?’라고 하며 전혀 사실이 아니라는 듯한 뉘앙스를 강하게 풍겼습니다. 제가 그때 그 말을 믿었는지 아님 믿고 싶었던 건지 지금은 잘 모르겠네요. ‘결혼할 상대가 있는 사람이면 나랑 이렇게 말장난하고 있지는 않겠지’라고 순진하게 생각했던 것 같아요.
아무튼 우린 한 번의 식사 후에 급격히 친해졌고 그렇게 외줄 타기 같이 아슬아슬한 우리의 ‘사내연애’가 시작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