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는 미니멀하지만 물건은 맥시멀이었던 20대
어린시절 부모님은 농사일에 항상 바쁘셨다.
겨울철에만 쉴 수 있는 농사일로 우리 삼남매는 항상 뒷전이었다.
학교 다녀 오면 청소, 빨래정리, 밥하기는 기본 이었다. 안하는 날은 엄마가 엄청 짜증을 부리셨다.
그렇게 자라다보니 부모님께 정리정돈이라는 말은 들어보지도 못했다.
1남2녀중 둘째로 태어난 나는 항상 이리치이고 저리치이는 시절을 보냈다.
이렇게 어린시절을 보내니 난 물건에 집착을 하게 됐다. 물건 하나 하나가 소중 했고, 물건에 의미를 부여하며 버리지 못하는 사람으로 20대를 맞이했다.
꽃다운 20살이 되고, 대학교 기숙사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곳에서도 난 여전히 물건을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이었다. 내가 보기에는 버릴 수 있는 물건이 하나도 없었다. 다 쓸만하고 언젠가는 사용할 물건이었기에 버리는 것은 상상 할 수 가 없었다.
이렇게 내 물건은 하나 둘이아닌 하나에서 셋, 여섯, 아홉으로 늘어가고 있었고 누가 물건을 준다고 하며 그것이 고장난 것이라도 무조건 받았다.
고쳐사용하면 된다는 생각이 내 머리를 채웠기 때문이다.
취미는 왜이렇게 많은지 한가지에 쉽게 질리는 나였기에 취미용품이 몇박스인지 알수 없을 정도였다.
다른 사람들이 손재주가 좋다고 칭찬해주면 난 춤추듯 취미 생활을 늘려나갔다.
물건이 많아서 부자가 된것 처럼 기뻤다. 이렇게 한 남자를 만나 결혼을 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남자는 옷은 다섯벌도 없고, 책도 없고, 이불도 얇은 페드와 여름이불이 전부였다. 물건이 그냥 한박스에 들어가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게 미니멀인지도 모르고 이사람 참이상하다 이러면서 함께 결혼생활을 시작했다.
결혼 후 필요한 물건을 사고 박스를 뜯었다. 박스는 당연히 창고에 차곡차곡 테트리스 하듯 쌓았다.
높이 쌓은 박스를 보며 "브라보"를 외쳤다.
'역시 물건은 많이 있어야해'를 속으로 외치면서 말이다.
내 삶에 물건이 많은 것은 당연했고 아무도 터치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너무 신이 났다.
결혼한지 2년 후 첫째가 태어났다.
아이들의 물건은 또 신세계였다. 여러지인들에게 물려받은 아기용품으로 한방이 꽉 찰정도였지만 아이를 키우려면 이정도는 있어야 한다는 생각에 신이났다.
또 없는 물건은 인터넷 쇼핑을 하며 서서히 아이들 물건으로 집을 잠식 당했다.
그 때에도 난 여전히 물건이 많아서 좋았다.
어느 블로그를 보기 전 까지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