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이루는 조각들

Prologue, 최근 나의 혈관에 흐르는 책과 영화

by 독자

힘들게 일했다는 것을 자랑으로 여기는 사람들을 나는 좋아하지 않는다. 그게 힘들었다면 다른 일을 하는 편이 나았을 것이니 말이다. 일에서 발견하는 기쁨은 곧 그 일이 제게 어울리다는 표적이다. 내 쾌락의 솔직함이, 나타나엘이여, 나에게는 가장 중요한 길잡이다. - 앙드레 지드, 지상의 양식 중


눈부신 생명력과 다정함으로 가득한 이 책에서 인덱스 붙이기를 넘어 굳이 타이핑을 하고 싶다는 마음이 들게 한 부분이다. 어느 때보다 회사에서 이런저런 부침을 겪고 있는 터라 여기저기에서 퇴사의 이유를, 추진력을 찾아 헤매던 탓이다. 일을 지속하도록 하는 나의 길잡이는 뿌듯한 마음인데 전혀 느낄 수 없으니 이제 그만해도 되지 않을까. 나에게 어울리지 않다는 표적으로 삼아.


나흘 전에는 영화 오후 네시를 보았고, 스크린 속에서도 회사에서의 나의 모습을 투영해내고 있었다. 아픈(실을 꾀병에 가까웠지만) 아내를 뒤로 하고 같은 시간마다 찾아오는 불청객의 호령에 마지못해 계단을 따라내려가는 정인의 모습이 그러했다. 초대한 사실은 없지만 나의 집을 찾아와 준 손님에게 차마 어떠한 부정적인 한마디를 못하는 주인공 부부. 그저 답답하다고만 여길 수도 있으나 하고 싶은 말을 모두 할 수 있는 사람이 더 드물지 않을까? 사연 없는 사람은 없고, 저마다의 사정이 있으니 섣불리 멈추어달라고 하기도 참으로 망설여지는 일일 것이다. 거절 못 하는 정인과 현숙의 불편한 마음에 깊이 공감이 되어서 영화 내내 속이 답답했지만 처음부터 결말까지 이어지는 차분한 내레이션이 원작 소설을 읽어보고 싶게끔 했다.


"네시니까 틀림없이 오셨겠죠"


"그 사람은 거대한 벽이야. 벽하고 무슨 얘기를 해"


"어때? 침입자없이 네시를 보내는 기분이"

"꿈만 같아"


"인간의 존엄을 위해 실행했던 그의 거사를 내 알량한 양심이 훼방을 한 것일까"


"햇빛보다 공기에 더 눈이 부셨다."



영화 오후 네시를 보면서 올 하반기 들어 유일하게 세 번 본 영화 스픽 노 이블의 루이스와 벤 부부의 모습도 떠올랐다. 상대가 채식주의자라는 사실을 잊은 듯 맛있는 고기라며 한사코 권하는 그 손길을 뿌리치지 못해 이내 입에 고기를 머금고 말아 버리는. 스픽 노 이블을 관람할 당시에는 이번처럼 나의 모습을 겹쳐서 보지는 않았다. 장르는 스릴러지만 낭만이 도처에 널리게 보였는데, 두 가족의 식사 자리에서 패트릭 무릎 위에 키아라의 다리를 올려놓고 편안하게 대화하는 모습이 왜 그렇게 로맨틱해 보였는지... 악의 모습이 드러나며 둘의 사이도 한쪽이 피해자로서 억지로 엮였던 것인가 의심하게 된 순간도 있었지만 번갈아 한 대씩 치더니 도리어 들러붙는 모습과 키아라의 위험 신호에 울부짖는 패트릭을 보며 찐사랑이었구나 하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 또한 달콤해 보였고... 이래서 나는 연애를 못하는 걸까? 낭만을 희한한 데서 찾는 것 같기도 하다. 늦여름에 접어들며 일에서 치이니 문제를 내면에서 찾으려 침잠하는 날들이 늘어났고, 괜스레 지금껏 전혀 부족함을 느낀 적이 없었던 부분인 연애에까지 가 닿기도 했었다. 아니 나는 왜 남자친구도 없는 거야? 스스로 생각해도 난데없는 엉뚱한 자기 비하를 했는데 주변에서 돌아온 답은, 집 밖으로 나가세요 혹은 책부터 불태워 버리세요 등의 우문현답이었다.

제임스 맥어보이의 달라졌지만 여전히 멋있는 모습, 음악, 연기, 결말부의 시원함 등이 좋아서 재차 영화관을 찾았다고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제임스 맥어보이의 비중이 가장 컸던 것 같다. 원작인 덴마크 영화를 보고 있는데 진도가 잘 나가지지 않기 때문이다. 늦은 시간 퇴근으로 많이 피곤해도 상영 회차가 얼마 되지 않는 이 영화를 보기 위해서 굳이 택시를 타고 퇴근, 자정 이후 영화관에 도착해서 새벽 세시가 다 되어 귀가하기도 했다. OTT로도 다시 볼 생각인데 앞으로 이 영화를 볼 때면 정신없었던 추석 연휴의 분주함, 10월이 다 되도록 가을에게 자리를 내주지 않던 덩치 큰 여름이 함께 떠오를 테다.


현실 감각 없다는 잔소리를 듣기도 하고 스스로도 현실 도피를 일상 지속의 원동력으로 삼고 있기에 영화나 책의 곁에 자주 머문다. 다만 영화 자체에 푹 빠져 현재에서 발을 거의 뗄 수 있던 올 초 영화 도그맨 상영 시즌에 비하면 이후로 원하는 일상이 펼쳐지고 있지는 않다. 역시 일에서 오는 스트레스가 차곡히 쌓여가는 까닭이다. 도그맨 같은 영화가 제발 내 앞에 다시 나타나주기를 애타게 기다리면서, 다행히 영화에 대한 몰입이 어려운 이 시기에 책의 보다 높은 자유도에 안도감을 느끼고 있다. 현재 읽는 책은 앙드레 지드의 지상의 양식, 슈테판 츠바이크의 초조한 마음 등이다. 지상의 양식은 전에 차례대로 읽지 않고 펼쳐진 부분들만 보다가 반납했었는데 며칠 전에 생각이 나서 다시 빌려왔다. 제목이나 표지에서부터 찬란함이 뿜어 나오는 이 책을 보면 이상하게도 죄책감이 들기도 한다. 마음과 몸이 힘이 들 때일수록 더 아래로 아래로 내려가게 되는데 그런 때에 눈에 들어오는 것은,

죽음이 감히 우리에게 찾아오기 전에, 우리가 먼저 그 비밀스러운 죽음의 집으로 달려 들어간다면, 그것은 죄일까? - 윌리엄 셰익스피어

이런 격언이 표지에 새겨지거나 제목이 그러한 책들이다. 그런데 지상의 양식 속에는 '사랑'과 '욕망'으로 점철되어 있기에 확실히 결이 다르게 느껴진다. 아직 절반도 못 읽었지만 갈무리해 놓은 페이지가 몇 있는데 다음과 같다.


....... 우리의 나아갈 길들이 확실치 않아서 우리는 일생동안 괴로워했다. 그대에게 뭐라고 말해야 좋을까? 생각해 보면 선택이란 어떤 것이든 무서운 것이다.


'중요한 것'은 그대의 시선 속에 있을 뿐 바라보이는 사물 속에 있어서는 아니 될 것이다.


그대가 '확연한' 지식으로 머릿속에 간직하고 있는 모든 것은 여러 세기 동안 써먹힐 때까지 그대와는 확연히 분리된 채로 남아있을 것이다. 무엇 때문에 그것에 그리도 집착하는 것인가?


욕망하는 것은 득이 되고 또 욕망을 만족시키는 것도 득이 된다ㅡ왜냐하면 욕망은 그렇게 함으로써 증가되니까. 내 진실로 그대에게 말하나니, 나타나엘이여, 욕망의 대상의 늘 거짓될 뿐인 소유보다는 매번 욕망 그 자체가 나를 더욱 풍요롭게 해주었느니라.


공감이 아니라, 나타나엘이여, 사랑이어야 한다. 그대도 알겠지만 그것은 같은 것이 아니다. 이따금 내가 슬픔, 근심, 괴로움에 마음을 기울일 수 있었던 것은 아마도 사랑을 잃어버리게 되지 않을까 두려웠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나는 그런 것들을 좀처럼 견디지 못하였을 것이다. 인생의 걱정은 각자에게 맡겨두라.



한 페이지가 더 있는데 말 그대로 거의 한 페이지를 차지하는 모든 글들이 인상 깊기에 길어서 옮길 수가 없다. 사랑으로 꾹꾹 눌러쓴 책이기에 다 읽을 때쯤이면 플래그가 많이 붙을 것이라 예상되고 아무래도 이번 반납일이 다가오면 한 권 구매해야 할 듯싶다. 초조한 마음은 이미 대출하여 읽다가 구매했는데 표지부터 제목, 판형, 번역체 모든 것이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다. 지금 절반만큼 읽었는데 다 읽고 나면 헤어짐에 아쉬울 것 같아 천천히 아껴 읽으려고 숨 고르기에 들어갔다. 다양한 책을 만나는 계기 중에서 초조한 마음의 경우는 알맞은 판형 덕분이었다. 지난 초여름 도서전에서 정기구독을 신청한 은행나무 출판사의 문학잡지 Axt에서 오렌지주를 증류하는 사람들을 알게 되었고(역시 죽음에 관한...), 막상 읽고 나서는 내용보다도 표지와 판형에 빠져버렸다. 그렇게 같은 출판사의 책을 찾아보다 보니 마침 표지가 파란색이기까지 한 초조한 마음과 마주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 밖에도 같은 작가의 다른 책인 경우가 가장 많고, 같은 출판사 혹은 도서관에서 800번대 서가에서 서성이다가 발견하는 일이 흔하다.


이 글의 제목처럼 내용이 참으로 조각이 난 것 같다. 글을 읽는 것은 더없는 즐거움이고 쓰는 것도 때때로 해소감을 주기도 하기에 즐긴다고 여겨왔는데, 막상 인턴 작가로서 써내려니 글의 얼개를 생각하는 것조차 쉽지가 않음을 느낀다. 애초에 기획한 것은 책이나 영화 어느 하나의 평이나 추천사가 아니라 나의 생각과 일상에 버무린... 이런 사람도 살고 있습니다 그런 뉘앙스의 글을 쓰는 것이었는데 진심으로 퇴사를 꿈꾸는 지금, 그 소망이 이루어져야 무엇이라도 한 발자국 떨어진 곳에서 편하게 개진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아직은 속해있는 곳에서 무언가 이야기를 풀어내기는 부담스럽고, 그렇다고 일상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회사를 분리시키기도 어려우니 말이다. 결론은 나의 삶의 표적과 길잡이를 다시금 뚜렷이 설정해서, 퇴사하겠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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