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이 밥이 되던 시절이 있었다)
나는 살아남았다.
막내를 낳던 날 이후로, 나는 한동안 내가 살아 있는지 잘 알지 못했다. 출혈은 좀처럼 멈추지 않았고, 의식은 며칠씩 빠져나갔다 들어왔다. 중환자실에서 눈을 떴을 때, 세상은 이미 제 갈 길을 가고 있었다. 나만 잠시 빠져 있었을 뿐이다.
내 앞에 놓인 것은 한 잔의 차와 마른 토스트 두 조각.
살아 돌아온 사람에게 주어지는 영국식 환대였다.
그것은 위로라기보다, 이곳에서는 이것으로 충분하다는 조용한 통보처럼 보였다.
나는 그 토스트를 한참 바라보다 울었다.
배가 고파서가 아니었다. 살아 돌아온 사람에게 이 정도면 충분하다는 듯한 그 정중함이, 웃음이 나올 것 같아서였다.
아, 이게 내가 살아 있다는 증거구나.
미역국이 고팠다.
정확히 말하면 미역국보다, “산모는 미역국을 먹어야지”라고 말해 줄 사람이 고팠다. 출산 뒤에는 누군가가 곁에 있어야 한다고 믿으며 자라온 몸이, 그날 병실 한가운데서 길을 잃었다.
퇴원은 회복과는 다른 말이었다.
집으로 돌아온 뒤에도 나는 계속 무너지고 있었다. 아이들은 하루 종일 내 몸에 매달렸고, 밤은 성실하게 나를 깨웠다. 몸무게는 서른여덟 킬로그램. 거울 속의 나는 가벼웠지만, 삶은 여전히 무거웠다.
90년대 초, 한여름의 오후였다.
지역 간호사가 집을 방문했다. 그녀는 나를 한참 바라보다가 말했다.
“자살 위험 요주의” 대상입니다.
그 말은 뜻밖에도 담담하게 들렸다. 그 무렵의 나는, 그 표현이 꽤 정확하다고 느꼈다. 정확해서, 반박할 말도 없었다.
그녀는 곧바로 처방을 내렸다.
“집 밖으로 나가셔야 합니다. 무조건.”
집 밖.
아이들을 줄줄이 달고, 돈도, 차도 없이 갈 수 있는 곳을 잠시 떠올려 보았다.
슈퍼마켓의 형광등 아래? 동네 빈터?….
계산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길이 하나 있다고 했다.
풀타임 학생으로 학교에 등록하면, 아이들은 학교 탁아소에서 돌봐준다는 말이었다.
나는 거의 반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살다 보면, 생각보다 붙잡는 일이 먼저인 순간이 있다.
서른 후반, 나는 다시 학생이 되었다.
젖먹이 아들은 등에 업고, 한 손에는 4살짜리 딸아이를,
다른 손에는 책과 기저귀가 뒤섞인 가방 하나. 시골길을 뒤뚱뒤뚱 걸어 버스를 향했다.
전형적인 백인들만 모여사는 그 동네 사람들에게 나는 하나의 풍경이 되었다.
커튼 사이로 숨었다 드러나는 얼굴들, 말없이 이어지는 시선들.
그들은 알지 못했다.
그 길이 내게는 삶과 죽음의 갈림길이었다는 것을.
학교에 들어갔을 때 나는 영어 문장 하나도 제대로 쓰지 못했다.
하지만 괜찮았다. 이곳은 시험장이 아니라, 내가 숨을 쉬어도 되는 공간이었으니까.
그러던 어느 날, 너덜너덜한 청바지를 입은 배불뚝이 영국 역사 교사가 말했다.
“대영제국? 웃기고 있네. 우리 조상들요, 다 도둑이고 강도들이었다고요.”
”아프리카, 중동, 동남아, 수 백 년 걸쳐 우리가 다 털어 왔.잖.아! “
교실이 잠시 멎었다.
그 말은 내 안에서 오래 굳어 있던 무엇인가를 깨뜨렸다.
질문해도 되는 언어, 의심해도 되는 사고, 자기 나라를 비판해도 되는 자유.
내 세대가 다 그랬듯, 주입식 교육에만 익숙했던 나는 그 자유 앞에서 한동안 말을 잃었다.
그날 이후 나는 배움을 삼켰다.
허기진 사람처럼.
단어 하나를 이해하는 일이 숨을 쉬게 했고, 문장 하나를 끝까지 읽어내는 일이 하루를 버티게 했다. 그때 나는 알았다. 지식은 사치가 아니라 생존이라는 것을.
배움은 여전히 고단했다.
밤마다 울어대는 젖먹이 옆에서 인수분해를 풀었고, 점심시간이면 아이들에게 젖을 물리고 기저귀를 갈았다. 흔들의자를 발로 밀며 책장을 넘겼다. 몸은 늘 한계였지만, 지식이 밥이 되어 정신은 조금씩 깨어났다.
그 시절의 배움은 희열에 가까웠다.
나는 다시 생각하는 사람이 되어가고 있었다.
학교에 들어간 지 1년쯤 지났을 때, 우울은 조용히 물러났다. 싸울 필요도 없었다. 내가 바빠졌기 때문이다. 서른일곱의 나이에 나는 영국의 한 유명 대학 학생이 되어 있었고, 그 사실만으로도 하루를 견딜 충분한 이유가 생겼다.
지금도 나는 가끔 그 쟁반을 떠올린다.
한 잔의 차와 마른 토스트 두 조각.
그것은 내가 다시 살아나기 시작했다는, 다소 무심하지만 정확한 신호였다.
사람은 음식만으로 살지 않는다.
어쩌면, 다시 생각할 수 있게 되었을 때 비로소 살아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