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생활 3부 - 중3에서 멈춘 공부로 영국 명문대에 들어간 대가)
한국에서 내가 마친 정규 교육은
중학교 졸업장이 전부였다.
즉, 인수분해·영어 문법·장황한 문장 독해에 대한 내 지식은
“중3에서 영구 동결” 상태였다.
그 이후 나는
지금은 사라진 한국 교육제도의
부산물이 되었다.
“간호 고등 기술학교.”
나는 그 제도의 마지막 입학생이었다.
다음 해, 학교는 대학으로 승격됐다.
그때 입학한 학생들은
나보다 세 살이나 많았다.
문제는 그들이 1학년 신입생이었고,
나는 갑자기 2학년이 되었다는 점이었다.
고등학교 1학년에서 대학 2학년으로,
아무 경고 없이 순간이동한 셈이었다.
내 인생 어딘가에서
3년이 통째로 증발했다.
아마 아직도 어딘가의 분실물 센터에서
내 이름표를 달고
낑낑대며 누워 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내 공부 이력은 단순했다.
•인수분해: 중3에서 종료
•영어 문법: 중3에서 사망
•자신감: 그 이후 간헐적으로 혼절
그런 내가 서른일곱에
영국에서 대학입시 준비를 위해
다시 일반 고등학교 과정을 시작했다.
영어 한 줄도 제대로 못 쓰던 내가
젖먹이를 안고,
다른 사람들은 중학 과정 4년(GCSE)을 거쳐
대학 진학을 목표로 A-Level 과정을 마치는 동안,
나는 그 모든 것을 단 한 해에 몰아서 끝내야 했다.
압축 파일처럼 살았다.
풀면 오류가 났다.
그리고 내가 들어간 곳은 The University of Sheffield.
당시 이 대학은
유럽에서 손꼽히는 동양학 명문이었다.
다만 그 시절 ‘동양학’이란
이름만 복수였을 뿐,
내용은 거의 일본학 단독 콘서트였다.
소련은 막 무너졌고,
일본은 세계 경제를 씹어 먹듯
외국 대학의 일본어과에 엄청난 돈을 퍼붓고 있었다.
한국은 “이제 우리도 좀…” 하고 막 말을 꺼내려던 시절이었다.
한국어과는 있긴 했지만 학생은 단 세 명.
중국어과?
그건 아직 미래에서나 가능한 개념이었다.
약 5년 전, 은퇴를 앞두고
박사학위 가능성을 가늠하며
잠시 강의실로 돌아간 적이 있다.
내가 알던 동양학과는
일본어가 단독 콘서트를 하던 곳이었는데,
30년 사이 판도는 완전히 뒤집혀 있었다.
인기 순위는 한국어, 중국어, 일본어.
한때는 상상조차 어려웠던 장면이
영국 대학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K-pop의 물결과 함께.
세상은 참 빠르게 변한다.
그리고 나… 여전히 살아남았다.
그 시절 셰필드대 동양학과가
유럽 최고였다는 증거는 간단했다.
옥스퍼드대 일본어과 학생들조차
1학년 전 과정을 우리 대학에서 보내며
일본어 문법과 독해 등을 이수해야만
2학년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신입생 60명 중 20명은 옥스퍼드,
40명은 셰필드.
이름값은 달라도
여기서는 실력으로만 버텼다.
옥스퍼드는 브랜드였고,
우리는 실전 훈련장이었다.
한국의 수능이 단판 승부라면,
영국의 A-Level은
이미 전공을 정한 학생에게
“이 과목을 정말 할 수 있느냐?”를
시간을 두고 묻는 시험에 가깝다.
범위는 좁지만,
깊이는 집요하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 학교의 입학 조건이
A-level 세 과목, ABB였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A-level 하나 없고,
서른일곱의 동양 여자인 데다
젖먹이 아이까지 안고 있던 내가 도대체
무엇을 근거로 합격했느냐는 것이다.
나를 면접한 교수는
그날 컨디션이 나빴던 걸까.
아니면 “인생은 실험”이라는
교육 철학을 몸소 실천한 사람이었을까.
지금도 가끔 그분의 안위를 걱정한다.
내 덕분에 스트레스 많이 받았을 것 같아서.
어쨌든 나는 조금… 아니, 많이 어설프게
영국 명문대 학생이 되어
1학년 첫 학기 시험과 마주했다.
결과는 참담했다.
불합격, 39점.
더 설명할 필요는 없었다.
현실과의 정면충돌이었다.
그리고 그날 이후 나는
시험지와 인생의 경계에서
잠시 멘탈을 잃었다.
아직 시작도 아니었다는 걸
깨닫는 순간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