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생활 2부 - 계산된 선택, 순진한 판단)
영국에서, 서른일곱의 나이에 대학 전공을 선택해야 했을 때,
나는 철저히 계산했다.
영어가 부족하니 영어로만 공부해야 하는 학과는 피하고,
한국어와 어순이 비슷하고 한자어도 많은 일본어라면 조금은 수월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하지만 그 판단이 얼마나 순진했고, 얼마나 나를 시험할 오판이었는지는… 머지않아 분명해졌다.
곧 나는 한 문장을 이해하기 위해
“일본어 한국어 영어”
혹은
“영어 한국어 일본어”
로 머릿속에서 끝없는 왕복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머릿속은 일본어와 한국어, 영어가 뒤섞이며 마치 국제 우편 서비스라도 된 기분이었다.
특히 번역 시험 날이면 상황은 참혹했다. 시간은 늘 모자랐고, 나는 문제지를 붙잡고 중얼 거렸다.
“아, 내가 왜 이 길을 택했을까”.
이때쯤 되면 일본어 문법 설명은 아무 소용이 없고, 인생 상담사를 불러야 할 판이었다.
한 문장을 옮기고 있으면 어느새 다음 문장이 나를 앞서 있었다. 시험 내내 심장은 가라앉을 틈이 없었고, 숨 가쁘게 시험지를 채워나갔다. 그것은 번역이라기보다 버텨내는 일이었다.
“아, 진짜 오늘 내 뇌는 폭발 직전이다. 파업 선언이다. 복귀 일정은 미정.”
그때 시험지 위로 아이들 얼굴이 스쳤다. 내 통학길, Snake Pass의 구불구불한 길도 겹쳐졌다. 이미 그렇게 많은 굽이를 넘어왔는데, 여기서 돌아설 수는 없지. “이쯤 왔으면 최소한 끝까지 가보는 예의는 지켜야 한다”
1993년, 내 영국 대학의 1학년 일본어 학과는 일주일에 25시간 수업을 요구했다. 하지만 두 아이 때문에 나는 오후 수업을 거의 빠질 수밖에 없었다. 딸아이의 하교 시간에 맞춰 집으로 돌아와야 했기 때문이다. 일본어 문법보다 엄격한 시간표였다.
처음에는 걱정이 컸다. 출석과 학습에 문제가 생기면 어쩌지, 그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하지만 학과 친구들은 오후 수업 내용을 녹음해 매일 나에게 전달해 주었고, 선생님들 역시 나를 결석으로 처리하지 않았다. 덕분에 나는 공식적으로는 학생, 비공식적으로는, 지각자의 왕. 땡땡이 일인자였다.
때로는 친구가 녹음을 건네주며 **“다음엔 아들 이름으로 점수 좀 따오라”**고 농담했다.
그때 나는 웃으면서 깨달았다. 공부는 혼자 하는 것 같아도, 사실 공동체가 만든 작은 힘 덕분에 가능한 것이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서 알게 되었다. 그 힘은 단지 학업을 계속할 수 있게 해 준 도움만은 아니었다는 것도.
누군가의 사정이 ‘특이 케이스’나 ‘귀찮은 변수’가 아니라, 하나의 삶으로 존중받는 경험이었다. 뒤처지지 않도록 조용히 속도를 맞춰주는 손이 있었고, 혼자서 다 해내지 않아도 된다는 암묵적인 허락이 있었다.
그 경험은 나의 선택들 속으로 천천히 스며들었다.
누군가가 나에게 손을 내밀 때, 나는 이미 이 길 위에서 받았던 손길들을 떠올렸다. 그 배려는 길모퉁이마다 남겨진 작은 표시판 같았다.
알지 못했지만, 그 손길은 이미 다음 굽이를 향해 나를 부드럽게 밀어주고 있었다.
이번에는 시험의 길이 아니라 실제 삶의 길, Snake Pass가 아니라, 조금 덜 험한 길이기를 바라며 한걸음 더 나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