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생활 4부 – 39점과 25점 사이에서 인생이 흔들리기 시작한 날)
내 어설픈 대학 입학의 대가는
첫 학기 시험에서 바로 청구되었다.
할부도 없었다.
•번역·문법 시험: 39점, 불합격
•역사·문화 논술 시험: 25점
(사실상 “자리에 앉아 있었음” 포상)
돌이켜보면,
그 옛날 한국에서의 내 시험 경험은 전부 번호 맞추기였다.
문제를 읽는다기보다 운명을 찍는 행위에 가까웠다.
어떤 날은 사각 지우개를 돌려서 정답을 고르기도 했다.
지우개가 멈춘 면이 곧 진리였다.
논술 시험은… 아예 쳐본 적도 없었다.
생각해 보면, 논술은 나를 피해 다녔다.
그런 내가
영국 명문대 1학년 시험장에서
논술 시험지를 받아 들었다.
그 순간,
내 뇌는 조용히 전원을 껐다.
눈앞이 캄캄해졌고,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뇌 안에서 무언가가 말했다.
“우리는 이런 상황을 가정해 본 적이 없다.”
눈물이 고였다.
나는 시험지를 거의 항의서한처럼 제출하고 나왔다.
내용은 없었지만, 태도만은 정중했다.
백지로.
그나마 나를 살린 건 집에서 천천히 준비해도 되는 에세이였다. 60%.
기적이라기보다는,
“그래도 숨은 쉬고 있네” 정도의 점수였다.
덕분에
“1학기는 계속해도 됨”이라는
조건부 생존 판정을 받았다.
문법과 논술은
여름방학 재시험으로 밀렸다.
미뤄졌다는 말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그때 알았다.
이건 시험이 아니라 생존 게임이라는 걸.
시험지 위 문장들은
Snake Pass처럼 끝없이 구불거렸다.
한 문장을 이해하면
다음 문장은 이미 나를 추월해
저 멀리서 손을 흔들고 있었다.
머릿속에서는
일본어 한국어 영어 일본어가
순환로처럼 돌고 있었고,
뇌는 중간중간 파업을 선언했다.
“여기까지 하자.
나는 여기까지만 번역 가능하다.
이 이상은 유료다.”
세 달이나 되는 긴 여름방학 앞에 서 있었다.
재시험 준비도 중요했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사실을
나는 너무 또렷하게 알고 있었다.
•여름 동안 다른 공부법을 찾지 못하면, 2학기는 없다.
•의욕도 없다.
•체력도 없다.
•점수는 이미 말할 것도 없다.
그리고 하나 더.
이 시험에 떨어지면
나는 단순히 낙제생이 되는 게 아니라,
서른일곱에 젖먹이를 안고
“무모한 선택을 한 사람”으로만 남게 된다.
1993년 여름,
시험지 위에서 Snake Pass를 헤매던
이 늦깎이 학생은
공부를 하고 있었던 걸까,
아니면
자기 인생의 변명을 준비하고 있었던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