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급 기능이 제거된 인간의 기록)
배 위에서는 밤과 낮의 경계가 천천히 풀린다.
시간도 느슨해지고, 사람들의 표정도 흐려진다.
그날 내 손에 남은 건 작은 휴대전화 하나였다.
바다는 끝없이 이어지는데, 나는 그 안에서 잠시 멈춰 있었다.
연결이 끊긴 상태는 생각보다 조용했다.
모든 게 둔해졌다.
일상과 업무를 떠받치던 외부 장기들 -
iPad, 업무용 전화기, 은행 앱, 신용카드,
세면도구, 화장품, 약통 속의 알약들.
요약하면 ‘나’의 70%.
그것들이 다 사라졌다.
거울 속 나는 멀쩡했다.
다친 곳도 없고, 피도 나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디지털 중환자처럼 맥이 빠졌다
그리고 깨닫는다.
내가 얼마나 많은 행동을
몸이 아니라 물건을 통해 수행해 왔는지.
내 장기의 집합체였던 캐빈백은
Barcelona 공항에서 Uber를 부르던 짧은 순간 사라졌다.
기술을 담고 있던 가방이 사라지자
나는 곧바로 “구석기”인이 되었다.
처음엔 여권까지 잃어버린 줄 알았다.
순간 숨이 막혔다.
오늘부터 시작하는 크루즈를 포기하고 영국으로 돌아가야 하나.
그 와중에도 저녁 7시 출항하는 배를 탈 수 있을까 하고 나는 계산하고 있었다.
인간은 절망 속에서도 일정을 먼저 계산한다.
오전 10시.
아홉 시간 후, 배는 떠난다.
임시 여권이라도 없으면,
모든 것이 공항에서 끝난다.
스페인어를 전공한 막내에게
나는 구조 요청을 보냈다.
대사관과 영사관, 외교적 루트가 차례로 가동되었다.
문제는 개인적이었고 대응은 국제적이었다.
움직임은 생각보다 커졌다.
시간은 무심히 흘렀다.
갑자기 가슴속에서
딱딱한 무엇인가가 느껴졌다.
여권이었다. 그동안 윗도리 안 포켓에서 조용히 숨어
나의 황당한 아침을 지켜보고 있던 녀석.
천천히 숨이 돌아왔다.
몸 전체가 조금씩 살아나는 느낌이었다.
나를 확장해 주던 외부 장기들은 돌아오지 않았지만
국적만은 여전히 내 것이었다.
그리고 깨달았다.
국제적인 소동을 벌이고 나서야
나는 비로소
자기 주머니를 확인하는,
참으로 한심한 인간이 되어 있다는 것을.
여권은 이제 내 손에 있다.
배는 저녁 7시에 떠날 예정이다.
광장을 몇 바퀴 더 돌았다.
도망친 캐빈백, 내 사라진 장기들을 찾아서.
혹시나 하는 마음에 바닥을 살피고,
사람들에게도 물었다.
허리의 굽히는 점점 낮아졌다.
인간의 희망은, 허리 각도와 비례한다는 사실도 배웠다.
휴대전화가 진동했다.
누군가는 내 카드로 McDonald’s를 먹고 있었고,
바르셀로나의 백화점에서는 결제가 줄줄이 이어졌다.
나는 씹고 있지 않았다.
그런데 누군가는 내 이름으로 씹고 있었다.
내 위(胃)는 텅 비어 있었지만,
내 신용카드의 배는 불러 있었다.
카드를 정지시켰다.
숫자는 멈췄다.
하지만 감각은 남아 있었다.
내가 없는 곳에서,
내 이름은 여전히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배는 예정대로 출항했다.
항구가 멀어졌다.
도시의 윤곽이 흐려질수록
잃어버린 것들은 더 선명해졌다.
iPad가 없으면 업무는 불가능했다.
작은 화면은 나를 감당하지 못했다.
배 안에서 인터넷은 하루 35달러였다.
한동안 망설이다가 결국 결제하지 않았다.
알림이 오지 않았다.
업무도 멈췄다.
증명할 것도, 답할 것도 없었다.
내 정체성은 하루 35달러였다.
앉고, 일어서고, 걷고, 씹는 일만 남았다.
식당에서 천천히 음식을 씹었다.
잃어버린 것들은 많았지만
씹는 감각만은 내 것이었다.
몸은 생각보다 단순했다.
숨 쉬고, 걷고, 배고파하고, 잠들면 된다.
기본 모델로서, 나는 여전히 살아 있었다.
그날 밤 불을 끄기 전 생각했다.
오늘 내가 잃은 것은 가방일까,
아니면 몸 밖에 맡겨둔 나의 일부일까.
기억은 기기에,
신뢰는 카드에,
일정은 앱에?
배는 계속 움직였다.
70%를 잃고도 살아 있는 나를 싣고,
나는 숨 쉬고 있었다.
고급 기능이 제거된
기본 모델로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