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비로소 지워진 내 편견의 선)
약 20년 전, 나는 시리아와 이스라엘 국경 근처의 한 유대인 마을에서 하룻밤을 보냈다.
그때는 블랙베리(BlackBerry)가 세상을 막 장악하려 하던 시절이었다. 사람들은 작은 키보드를 두드리며 언제든 서로와 연결될 수 있었다. 누르면 즉시 답이 오던 시대였다.
그런데 나는 그 흐름과는 정반대 방향으로 가고 있었다. 어딘가 단단히 ‘닫힌’ 곳으로.
항구 도시 하이파(Haifa)의 선착장에서 국제 평화 네트워크인 '서바스(Servas International)'를 통해 연결된 호스트 부부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첫인상은 특별할 것 없었고 인사도 짧았다. 차에 오르자마자 우리는 곧장 도시를 벗어났다.
차는 산길을 따라 계속 올라갔다. 가로등이 하나씩 사라졌고, 휴대폰 신호도 그 뒤를 따라 조용히 끊어졌다. 나는 그때 처음으로 생각했다.
“이거… 정말 괜찮은 거 맞아?”
그 질문은 답을 기다리지도 못한 채 어둠 속으로 흩어졌다. 차는 결국 거대한 철제 대문 앞에 멈춰 섰다. 리모컨 버튼을 누르자 문은 낮은 소리를 내며 천천히 열렸다.
윙 -
그 짧은소리 사이로 나는 이미 그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지금이라도 돌아갈까.’
그렇게 생각했지만 돌아갈 길도, 방향도 보이지 않았다. 주변에는 오직 어둠뿐이었다.
문 안쪽은 예상과 달리 넓고 고요했다. 달빛 아래, 검은 옷자락들이 천천히 움직이고 있었다.
남자아이와 어른 할 것 없이 모두 검은 옷에 큰 모자를 쓰고 있었고, 귀 옆으로 길게 늘어진 곱슬머리가 조용히 흔들리고 있었다.
영화 속에서나 보던 모습이 설명 없이 현실을 걷고 있었다.
낮은 히브리어가 오갔다. 뜻은 알 수 없었지만 말소리는 평온했다. 그들은 그저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고, 괜히 긴장하고 있는 쪽은 나였다.
나는 이곳이 외부와 경계를 두고 살아가는 공동체라고 생각했다. 아무나 드나들 수 없는, 닫힌 세계라고.
집 안으로 들어가자 모든 것은 오히려 더 단순해졌다. 신발을 벗고, 손을 씻고, 식탁에 앉았다.
빵과 수프, 따뜻한 음식이 놓였다. 누군가는 아이의 접시를 챙기고, 누군가는 내 잔에 물을 채워주었다.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저녁 풍경이었다.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뭔가 특별한 의식 같은 게 있을 줄 알았는데.’ 하지만 그런 건 없었다.
대신, 아이 하나가 다가와 내 발을 툭 치며 물었다.
“Where are you from?”
그 한마디에 철문도, 검은 옷도, 내 안의 긴장도 조금씩 풀리기 시작했다.
나는 내가 살던 도시 이야기를 했고, 그들은 학교 이야기와 형제 이야기, 그리고 오늘 있었던 사소한 일들을 들려주었다.
아이들은 여느 집 아이들처럼 웃고 떠들었고, 어른들은 하루를 나누고 있었다.
그제야 나는 알게 되었다. 이곳은 ‘닫힌 세계’가 아니었다. 단지 내가 알지 못했던 방식으로 살아가고 있는 세계였다.
서울의 어느 집과도, 런던의 어느 집과도 크게 다르지 않은. 다만 그곳에는 철문이 있었을 뿐이다.
돌아보면 그날 내가 넘어선 것은 철문이 아니었다. 내가 미리 그어두었던 선이었다.
나는 공포영화 속으로 들어간 줄 알았지만, 결국 한 편의 가족 이야기를 보고 나온 셈이었다.
다음 날, 그 거대한 철문을 다시 지나며 나는 세상을 조금 다르게 보기 시작했다.
그것이 Servas가 아니었다면 결코 만날 수 없었을 세계로 들어가는 첫걸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