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식 예의의 정치학

by 류정uk

(한국 할매, 영국신사들 총대 메주기 - The Mechanics of British Politeness)


영국에서 임대업을 시작한 지 20년 됐다. 처음에는 단순한 투자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한 아파트가 내게 부동산보다 훨씬 값진 교훈을 줬다. 바로 영국식 “예의”의 힘이다.


모든 것은 아주 평범한 질문에서 시작됐다. 천정부지로 올라가는 관리비 때문에;


- 내가 낸 돈이 어디에 쓰이는가?

- 재무 장부는 왜 공개되지 않는가?

- 계약은 누가 어떻게 결정하는가?


대부분 조직이라면 엑셀 파일 하나면 끝날 질문들이다.


영국에서는 조금 다르다. 질문이 길어질수록 이메일은 더 정중해지고, 답장은 더 늦어진다. 정중함과 무력함이 정비례로 달린다.


예를 들어 이런 문장이 있다.

“Thank you for raising this important point.” (이 중요한 점을 제기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실제 의미는 간단하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회의에서도 비슷하다. 누군가

“That is a very good question” (아주 좋은 질문 입니다)

이라고 말하면, 그 번역은 이렇게 된다.

“이 질문은 여기까지 하는 것이 가장 좋겠습니다.”



아무도 화를 내지 않는다. 아무도 거절하지 않는다. 공기는 잠깐 어색해지고, 몇 초 뒤 누군가는 다른 안건을 꺼낸다. 영국식 갈등 해결법은 명료하다.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다른 곳으로 옮기는 것.


작년 여름, 나는 임시총회(EGM)를 요청했다. 관리비와 재정 투명성을 논의하기 위한 단순한 제안이었다. 놀랍게도 많은 사람들이 참석했고, 건물 역사상 최대 참석률을 기록했다. 잠시동안 이나마, 관리비와 재무 장부, 의사 결정권을 두고 논의하며 방 안에는 희망이 떠돌았다.


한 입주민이 추가로 director 로 선출됐다. 사람들은 변화를 기대했다. 하지만 6개월 뒤, 그 director는 조용히 사임했다. 시스템 안으로 들어간 사람들은 곧 깨닫는다. 이 시스템은 벽돌로 쌓인 성보다 단단하다.


연말 총회에서는 더 흥미로운 장면이 있었다. 재무 장부가 아직 준비되지 않았다. 세부 지출도 없고, 예산도 없었다. “몇 주 안에 보내겠습니다”라는 아주 정중한 약속이 있었고, 그 약속은 아주 정중하게 사라졌다. 그 사이 관리비 청구서는 도착했다. 6개월에 1006파운드. 내가 본 최고 금액이었고, 근처 아파트의 거의 두 배였다.


문제는 시스템이 아니다. 미꾸라지 같은 director 한 명쯤은 어디에나 있다. 진짜 문제는 뒤에 앉아 조용히 고개만 끄덕이는 영국 신사들이다.


그들은 회의 내내 고개만 끄덕일 뿐, 절대 소파에서 일어나지 않는다. 혁명은커녕 작은 파동조차 만들지 않는다. 관리비는 조용히 결제하고, 자동이체 금액은 슬쩍 올린다.


나는 이런 사람들을 ‘Sofa Majority(소파 다수파)’라 명명하기로 했다. 영국식 표현으로는 Fence-sitter가 적절하다. 그들은 그저 담장에 앉아 상황을 관망하며, 어느 쪽으로 튈지만을 가늠한다.


가끔 개인적으로 메시지가 온다.


“맞는 말씀입니다.”

“당신 이메일 덕분에 속이 다 시원해졌습니다.”

“누군가는 이런 질문을 해야죠.”


하지만 그 누군가는 항상 나였다.


한마디로 말하면, “총대는 대신 메워주니 고맙지만, 난 엮이기 싫어”라며 커튼 뒤로 숨는 것이다. 문제는 명확히 보인다. 하지만 해결하려다 저녁 분위기를 망치는 것은 더 큰 문제다.


영국의 예의는 아름답다. 서로에게 무례하지 않으려는 노력, 감정을 절제하는 태도, 하루에도 수십 번 쓰는 “sorry”와 “thank you.” 하지만 가끔은 이 예의가 너무 훌륭해서 책임까지 정중하게 사라진다.


재미있는 영국인의 표현이지만,

실제 의미 (Subtext)는…


"I hear what you say."

(당신 말을 들었으나, 내 의견을 바꿀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습니다.)


"Perhaps we could look at other options."

(당신 제안은 정말 형편없군요.)


“With the greatest respect”……

(이제부터 네 말이 얼마나 헛소리인지 우아하게 까발려주마)



누가 딱히 거짓말을 하는 것도 아니고, 누가 거절하는 것도 아니다. 모든 것이 아주 공손하게 흐려진다. 결국 나도 1년 정도 혼자 싸우다 Sofa Majority가 되고 말았다. 체념처럼 들릴 수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나는 가장 영국적인 방식으로 ‘현지화’에 성공한 셈이기도 하다.


한국인의 “빨리빨리”와 “시시비비를 가리자”는 정서가, 영국의 “정중하게 뭉개기” 전략과 만나 완전히 KO승 당한 셈이다.


아마도 뱀 대가리씨 - 영국식 예의 뒤에 숨은 고수 - 를 이기거나 아저씨를 갈아치울 유일한 방법은 혁명이 아니라, 더 정중하고 끈질긴 전략이 필요한지도.


매일 아침 “I was just wondering if…”(만약 이렇게 하면 어떻게 될까요?…)로 시작하는 이메일, 일종의 정중한 괴롭힘(Patiently Polite Harassment)을 한번 시도해 볼까?


그래서 오늘 아침, 살짝 배배 꼬는 글 하나를 보내보았다.

결과는? 음… Let’s wait and see what happens! (뭔일이 일어날찌 한번 기다려 볼까요?)


물론, 소파에 앉아 고개만 끄덕이는 ‘Sofa Majority’들이 아무 일 없던 척할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이건 백인들 사이에 끼여 쪼그라진 한국 할매에게 남은 유일한 무기다.


관리비는 자동이체로 빠져나가고, 나는 여전히 그 건물 관리비를 다른 아파트의 두 배를 낸다. 이메일은 더 이상 길어지지 않는다. 가끔 이것이 체념인지, 적응인지, 잘 모르겠다.


다만 한 가지는 확실하다. 영국에서는 말이 마구간을 떠나도 걱정할 필요가 없다. 누군가가 미소를 지으며 말할 것이다.

“Interesting point.”

그리고 그 도망간 말(horse) 과 구멍난 마구간은 아주 정중하게 없던 일이 된다.


영국 정치의 축소판을 보고 싶다면 웨스트민스터에 갈 필요가 없다. 임대 아파트 연말 총회에 가면 된다.

웃으며 끝내고, 아무 일도 없었던 척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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