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에서 부산까지, 전쟁이 바꿔버린 하늘길 이야기)
요즘 한국 가는 비행기 표를 살 때 나는 항공사보다 먼저 세계지도를 펼친다.
런던에서 내 고향 부산까지, 아니 정확히 말하면 밀양까지 가는 길은 생각보다 세계정치에 크게 흔들린다. 요즘처럼 한국 가는 길이 이렇게 불안해 보였던 적이 있었나 싶다.
나는 소련이 무너지기 전 시절을 기억하는 세대다. 그때 영국에서 한국에 한 번 가려면 비행기만 타는 게 아니라 거의 지구를 공손하게 한 바퀴 인사하며 가야 했다. 냉전 시절에는 서방 항공사들이 소련 상공을 자유롭게 지나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알래스카의 앵커리지 같은 곳에 들러 연료를 채우고 다시 날아가는 일이 흔했다. 비행시간은 기본이 20시간. 일이 좀 꼬이면 30시간도 거뜬했다. 그야말로 “여행”이 아니라 “원정”이었다.
그러다가 소련이 무너지자 세상이 갑자기 편해졌다. 러시아 하늘이 열리면서 유럽과 아시아 사이의 항로가 단숨에 짧아졌다. 한국행 비행시간도 크게 줄었고, 항공료도 눈에 띄게 내려갔다. 체감으로는 거의 반값이었다. 마치 누가 하늘 위에 고속도로 톨게이트를 하나 더 뚫어 준 느낌이었다.
그 시절 나는 러시아 국적 항공사 Aeroflot를 타고 모스크바를 거쳐 다녔다. 표 값이 400파운드쯤 했던 걸로 기억한다. 지금 생각하면 참 낭만적인(?) 가격이다. 12시간쯤이면 한국에 닿을 수 있었으니 말이다. 러시아와 사이가 나쁘지 않은 나라들은 그 하늘길을 아무 문제 없이 나눠 썼다.
모스크바 공항 환승 구역은 늘 약간 어두웠다. 창밖에는 눈 덮인 활주로와 Aeroflot 비행기들이 줄지어 서 있었고, 사람들은 두꺼운 코트를 입은 채 조용히 다음 비행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디선가 진한 커피 냄새와 함께 러시아어 방송이 울려 퍼졌다. 그때마다 “아, 정말 지구 반대편으로 가고 있구나” 하는 느낌이 들곤 했다.
그런데 세상일이 늘 그렇듯, 평화는 오래가지 않는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시작되면서 그 지름길이 다시 막혀 버렸다. 유럽 국가들이 대부분 우크라이나 편에 서면서 러시아 상공을 통과하던 항로는 순식간에 ‘그림의 떡’이 됐다. 이제는 빙빙 돌아가야 한다. 비행시간이 최소 두 시간 이상 늘어난 노선도 많고, 비행기 값도 덩달아 올라갔다.
장거리 여행에서 10시간과 12~14시간의 차이는 생각보다 크다.
10시간까지는 그래도 인간답게 버틸 수 있다. 밥 두 번 받아먹고, 영화 한 편 보고, 꾸벅꾸벅 졸다 보면 어찌어찌 간다. 그런데 12시간을 넘어가면 몸이 슬슬 철학적인 질문을 던지기 시작한다.
“나는 왜 여기 앉아 있는가?”
“이 의자는 왜 이렇게 작은가?”
“인류는 왜 아직 순간이동을 발명하지 못했는가?”
비행기 의자는 더더욱 인간을 겸손하게 만든다. 펼 곳도 없다. 나는 워낙 작은 편이라 그나마 조금은 꼬물거리며 자세를 바꿀 여유가 있다. 하지만 옆자리에 키 크고 덩치 좋은 아저씨나 아주머니가 앉으면 상황이 달라진다. 그 순간 나는 인간이 아니라 좌석 번호에 포함된 부속품이 된다.
그런데 아직 남아 있는 길이 하나 있다. 의외로 싸고, 짧고, 꽤 현실적인 루트다. 바로 중국을 경유하는 길이다. 요즘은 부산 왕복이 500파운드 이하로도 가능하다. 세 개의 중국 항공사가 치열하게 경쟁하는 덕분이다. 부산이 목적지인 나로서는 상하이나 베이징에서 바로 직행이다. 서울에 내려 다시 갈아탈 필요도 없다.
게다가 중국 항공사들은 아직도 러시아 하늘을 비교적 자유롭게 날아다닌다. 유럽 항공사들이 러시아 상공을 피하면서 돌아가는 사이, 중국 항공사들은 여전히 모스크바 하늘길을 이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덕분에 비행시간도 짧고 가격 경쟁력도 생긴다.
더구나 요즘은 Iran과 United States 사이의 긴장이 계속되면서 Persian Gulf 위의 하늘도 예전만큼 단순하지 않다. 많은 유럽 항공사들이 노선을 취소하거나 항로를 크게 우회하기 시작했다.
한국인들이 즐겨 이용하던 도하나 두바이 경유 노선은 아직 남아 있지만, 중동 정세가 흔들리면서 항로는 자주 바뀌고 운항도 들쭉날쭉하다. 한때 아무 생각 없이 지나가던 그 하늘길도 이제는 더 이상 그런 길이 아니다.
이런 상황에서 가장 마음 편한 길이 결국 중국 경유라니, 세상 참 아이러니하다. 지금 나는 상하이에서 부산으로 가는 비행기에 앉아 이 글을 쓰고 있다.
어제 오후 런던 Gatwick 공항에서 탄 중국 항공기 내에서는 기내 스크린에 지도를 켜 놓고 한참을 구경했다. 비행기가 모스크바 상공을 딱 가로질러 날아가는 걸 보니 괜히 신기했다. 그리고 정확히 10시간 만에 상하이에 도착하는 것도. 환승하면서 한 시간쯤 헤매다 보니 어느새 부산행 게이트 앞이었다.
그리고 이 글을 마무리하는 지금, 나는 이미 부산에 도착해 있다. 공항에서 나오자마자 제일 먼저 한 일은 거창한 것도 아니었다. 뜨끈뜨근, 얼큰한 소머리국밥 한 그릇을 앞에 놓고 정신없이 숟가락을 움직이는 일이었다. 10시간이나 비행기 의자에 접혀 있던 몸이 그제야 조금씩 펴지는 느낌이었다. 세계정세가 아무리 복잡해도 국밥 한 그릇 앞에서는 인간이 단순해진다.
덕분에 아직은, 나이 일흔에도 봄과 가을에 한 번씩 한국을 다녀오는 일이 가능하다. 싸고, 짧고, 그럭저럭 안전한 길이 아직 남아 있으니까.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이 든다.
정치와 이념, 그리고 끝없는 갈등이 사람들의 삶과 하늘길까지 좌우하는 이 시대는 도대체 언제쯤 끝이 날까.
언젠가는 다시,
비행기 표를 살 때
세계정세 대신 날씨만 걱정하는 날이 오기를 바라면서 말이다.
물론 그날이 오더라도 나는 아마 공항에서 나오자마자 또 따끈따끈한 국밥집부터 먼저 찾고 있을 것이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