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짐보다 먼저 푸는 게 있다. 병원 예약이다.)
삼주일 전 한국에 도착했다.
부산 김해공항 문을 딱 나서는 순간, 공기가 다르다. 코끝에 스치는 냄새가 어디선가 오래 묵혀둔 묵은 김치 냄새다. 아주 오랜 기억을 슬쩍 꺼내는 기분이다.
근데 내가 고국 땅 밟고 제일 먼저 한 게 뭐였는지 아나?
관광? 친구 만나기?
아이고… 아니다.
비 보험자, 외국인 신분으로 병원 예약부터 하는 거다.
사람들이 들으면 웃는다. 부산 왔으면 회 한 접시 묵고 온천장 가서 몸부터 지져야지, 서면 한복판에서 병원부터 찾는다 카니.
근데 내 사정 알면, 웃다가도 고개 끄덕일 기다.
영국에서는 말이다, GP라고 부르는 동네 주치의 한 번 보려면 진짜 하늘의 별 따기다.
“내일 오세요” 한마디에 마음이 놓이던 시절도 있었다.
근데 요즘은 다 디지털이라 카이… 온라인 예약, 비밀번호, 로그인, 인증번호…
나는 70이다. 기계는 점점 똑똑해지는데, 나는 점점 뒤처지는 기분이다. 화면을 들여다보면서,
“이게 나를 위한 세상 맞나…” 싶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겨우 예약을 잡았다 치자. 이제 좀 숨 돌리나 싶으면 돌아오는 말은 이거다.
“내원하실 필요는 없고요, 전화상담 이면 충분합니다.”
“How can I help you, today?”
유선상의 그 목소리는 너무 멀어 공중에서만 뱅글뱅글 돈다.
예전에는 그랬다. 30년을 봐온 주치의가 있었다. 문 열고 들어가면 얼굴 한 번 쓱 보더니 “오늘 좀 안 좋아 보이시네.” 그 말 한마디에 괜히 마음이 먼저 풀리곤 했다.
지금은 유선으로 묻는다.
“How are you today?”
나는 속으로 중얼거린다.
“니가 나를 아나…”
그래서 어느 순간 나는 영국 의료 시스템에 대한 기대를 접었다. 막대한 세금을 내면서도 정작 몸 하나 맡기기 어려운 현실이 서글펐다.
“됐다. 너희는 너희 방식대로 해라.”
대신 내가 선택한 건 한국의 건강검진이다. 부산 오자마자 돼지국밥 한 그릇 뚝딱하고, 병원부터 간다.
접수하고 앉아있는데,
이상할 정도로 뭐든지 빠르다.
내가 당황하는 시간이 차라리 더 길다.
“어르신, 들어오세요”
순간 뒤를 돌아봤다. 혹시 다른 사람 부르는 거 아이가 싶어서.
진료실 문을 열고 들어가는 순간, 그제야 ‘아차, 나 환자였지’ 싶다.
사람 대 사람으로 마주 앉는다. 의사는 내 눈을 보고, 나는 그 눈을 본다. 그 짧은 마주침 속에 이상하게 마음이 놓인다.
검사는 더 놀랍다. 피 뽑고, 사진 찍고, 초음파 보고… 몸속을 하나씩 훑어 내려가는데, 마치 오래된 집을 손보듯이 조심스럽고도 빠르다.
“내가 나를 이렇게 들여다본 적이 있었나…”
그리고 계산서. 이 대목에선 더더욱 놀란다.
이 정도 대접이면 영국에서는 Private Clinic, 그러니까 돈 내고 가는 사설 병원 문을 두드려야 된다. 들어가는 순간부터 지갑이 먼저 긴장한다.
근데 여기서는 계산서를 받아 들고 내가 더 당황한다.
“이게 다 맞습니까?”
“예, 맞습니다 어르신.”
속으로 중얼거린다. ‘뭐 하나 빼먹은 거 아이가…’
보험도 없는 외국인 신분으로 전부 자비 부담이었는데, 이 정도라니…
이러니 여기 사람들은 병원을 마실 가듯 다니지. 오래 사는 데는 다 이유가 있는기라.
안과도 가봤다.
영국서는 예약 기다리다가 눈 빠질 수도 있다.
여기서는 다르다.
의사가 화면을 가리키며 “여기 보이시죠, 어르신?” 하는데,
나는 속으로 중얼거린다.
‘이게… 내 눈 안이가?’
평생 눈으로 밖에만 보며 살았지,
눈 안을 들여다본 건 처음이다.
생각보다 멀쩡하다. 70년을 혹사시켰는데도, 아직 날 원망하지 않는 눈치다.
그래도 눈은 양반이다.
치과는 더하다.
진료 의자에 누웠다.
눈앞에 모니터가 있다.
내 입속이 전부 거기 있다.
더러운 잇똥까지, 숨김없이.
70년을 같이 살았는데,
이제야 제대로 들여다본다.
치료를 마치고 나왔다.
혀로 슬쩍 훑어본다.
깔끔하다.
아이고,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평생을 살아온것 같은 나라 영국에서는,
의사 얼굴 한 번 보기도 힘든데
여기서는,
자동차도 아닌데,
하루 만에 ‘풀 점검’을 받고 나면,
기름칠 막 끝낸 클래식카 같다. 한 일 년은 쌩쌩, 고장 없이 굴러갈 기세다.
이제 남은 건,
한국을 즐기는 일이다.
그래서 이제는 한국 오면 순서가 정해져 있다.
짐 풀고, 돼지국밥 한 사발 마시고, 병원 간다.
그게 내 연례행사다.
누가 물어본다.
“한국 왜 그렇게 자주 가세요?”
나는 잠깐 생각하다가, 조용히 한마디 한다.
“살려고 온다 아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