협곡의 복수자
"고귀함? 강직함? 그따위 것들로 내 과거를 더럽히려는 거냐? 이단자 주제에 나를 재단하겠다고 감히 입을 놀려!?"
갈라진 목소리 끝에는 오래도록 눌러왔던 치욕이 뒤섞여 있었다. 단숨에 달아오른 열기는 또 한 번 홀의 공기를 뒤흔들었다. 뇌격이 손끝에서 또렷이 피어오르고, 가르바는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비디아를 향해 몸을 틀었다. 당장이라도 벼락을 내리꽂을 듯한 기세였다.
그러나 비디아는 동요하지 않았다. 여유로운 태도에는 흐트러짐 하나 없었다.
"그렇게까지 화를 내실 줄은 몰랐군요. 저는 단지 과거의 아름다운 모습을 아쉬워했을 뿐인데 말입니다."
"끝까지 잘도 나를——"
차분한 말끝에 드리운 조롱은 결국 팽팽한 긴장에 기름을 들이붓는 격이었고, 결국 참지 못한 가르바는 비디아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나 어둠 너머에서 황금빛 눈동자가 날카롭게 일렁였다. 그 찰나의 눈빛은 들끓던 분노를 한순간에 무릎 꿇게 만들었고, 가르바는 손끝을 내린 채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손을 타고 흐르던 기운과 섬광만이 식었을 뿐 표정에는 여전히 날 선 분노가 박혀 있었다.
비디아는 그 모습에 개의치 않은 채 몸을 틀어 어둠 속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판단을 기다리겠습니다. 제안이 받아들여지지 않더라도, 그 결과를 감수할 준비는 되어 있습니다."
황금빛 눈동자가 다시 한번 어둠을 꿰뚫고 비디아의 가면을 오래도록 응시했다. 스스로를 신이라고 지칭하는 이방인들이 남긴 상처와 타락의 기억은 여전히 사브라트의 살 속에 각인된 고통처럼 살아 숨 쉬었고, 그 형상을 본뜬 가면은 그때의 잔영을 어렴풋이 떠오르게 만들었다.
그러나 곧 사브라트는 과거의 잔상을 억누르고 다시 시선을 고정했다. 눈앞의 남자는 오만한 신들과는 달랐다. 이질적이지만 두려움을 보이지 않았고, 자신을 시험하려는 얄팍한 도발조차 없다. 그 태도에서 느껴지는 건 확신과 균형, 그리고 자만이 아닌 목적이었다. 사브라트는 그것을 흥미롭게 받아들였다.
긴 침묵 끝에, 그의 의식이 다시금 협곡을 울렸다.
「네 목적은 분명하다. 협박도, 시험하려 든 것도 아니지. 미심쩍은 구석이 있지만 생각보다 흥미롭군. 제안을 받아들이겠다. 하지만... 이것만큼은 기억하라. 이 협곡은 나의 것이며, 나의 판단 아래 존재한다. 나를 기만하거나 농락하는 순간, 네놈은 흔적조차 남기지 못할 것이다.」
비디아는 고개를 깊이 숙이며 응답했다.
"현명한 판단에 감사드립니다, 협곡의 지배자시여. 다만 지금은 양쪽 모두가 어수선한 상황이니, 조만간 다시 찾아뵙도록 하겠습니다."
타리안에서 아우로라로 향했던 길과 달리, 중앙대륙으로 들어서는 길목은 처음부터 생명을 거부하는 듯한 풍경으로 가득했다. 대지는 곳곳이 짙은 보랏빛으로 물들어 있었고, 틈 사이로 피어오른 희미한 증기는 숨을 들이마시는 것만으로도 폐부를 찌르는 고통을 남겼다.
길이라 부를 만한 흔적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뿌리째 뽑힌 바위와 나무는 썩어 문드러진 채 흩어져 있었고, 그 사이를 파고든 기형의 덩굴들은 살아 있는 것처럼 꿈틀댔다. 덩굴 끝마다 돋아난 뒤틀린 가시들은 바람이 스칠 때마다 날카로운 소리를 냈고, 그 음산한 울림은 마치 살아 있는 생명체의 경고처럼 울려 퍼졌다.
고개를 들어 바라본 하늘은 희뿌연 안개에 잠식되어 있었다. 햇빛은 어둠에 막혀 내려앉지 못한 채 흐릿하게 일렁였으며, 멀리서 어렴풋이 모습을 드러낸 협곡 깊은 틈새에서 울려오는 희미한 소리는 마치 더 이상 안전하지 않다는 것을 경고하는 듯했다.
"카노라스로 향하는 길은... 타리안에서 아우로라로 가던 길과는 전혀 다르네요."
시즈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그 안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긴장이 얇은 실처럼 감돌고 있었다.
"여신의 결계도, 검은 늑대들도... 이 땅에는 발길을 들이지 않았던 걸까요. 부패가 모든 걸 삼켜버렸어요."
옆에서 천천히 말을 몰던 아로스가 낮은 목소리로 말을 덧붙였다.
"지금부터는 사소한 실수라도 매우 위험할 수 있습니다."
아로스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발밑의 길이 순식간에 끊겨버렸다. 두 말 아래의 대지는 깊게 갈라져 절벽처럼 가라앉았고, 그 틈 사이로 뿜어져 나온 검은 안개는 숨결마저 잠식할 듯 피어올랐다. 시즈가 고삐를 당겨 다리아를 멈춰 세운 뒤 아래를 내려다보자, 바람에 휘말려 뭉개지는 독기가 안개처럼 번지고 있었다.
"이쪽은 더 이상 길이 없군요. 돌아서 가야겠습니다."
아로스의 말에 고개를 든 시즈의 시선 끝에서, 저 멀리 낯익은 지형이 어렴풋이 눈에 들어왔다.
"에리스 협곡이네요. 저곳도 안전하다는 보장은 없지만... 우회할 수 있는 길이 있을지도 몰라요."
협곡에 발을 들이자, 순식간에 공기의 흐름이 바뀌었다. 차가운 기운이 깊이 스며든 바위틈으로부터 불규칙하게 빠져나오는 바람소리가 메아리처럼 울려 퍼졌다. 거대한 발톱으로 깊게 파인 자국들이 가득한 절벽의 벽면은 이곳에 비룡들이 날아다녔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었다.
시즈는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갔다가 멈췄다. 바닥에는 부서진 뼈들이 흩어져 있었다. 날개뼈, 갈비뼈, 두개골... 모두 비룡의 것이었지만 자세히 보니, 그 사이로 비룡보다 훨씬 큰 짐승이 부러진 창과 엮여 있었다.
"......"
숨이 멎는 듯한 정적. 그것은 과거에서 밀려온 그림자였다. 잿빛 하늘 아래, 타오르던 불길과 사방에 뿌려져 있던 핏자국, 사람들의 비명이 어린 시절의 기억을 깨워냈다. 등에 굵은 상처가 난 채 쓰러져 있는 용의 형상을 한 짐승의 시체는 깃털이 아닌 비늘을 가지고 있었다.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았는지, 눈은 부패하지 않은 채 벌어져 굳어 있었다. 차갑게 식은 그 눈빛에 시즈의 손끝이 떨렸다. 목 뒤에서부터 쭉 타고 내려오는 싸늘한 감각이 그녀의 몸을 서서히 얼어붙게 만들었다.
"무녀님?"
뒤에서 따라오던 아로스가 조심스레 물었다. 그의 시선은 시즈가 바라보는 방향을 따라가며 시체에 닿았다.
"괜찮으십니까?"
하지만 시즈는 대답하지 못했고, 눈동자만이 불안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 순간, 바람의 결이 어긋났다.
쉬익———
날카로운 기류가 공기를 가르며 찢자, 그와 동시에 아로스는 검을 뽑아 들었다. 칼날이 공중에서 날아오는 볼트를 정확히 쳐내면서 금속의 마찰음이 날카롭게 울려 퍼졌다. 튕겨나간 볼트가 바위에 박히며 파편이 튀었고, 협곡 전체에 긴장감이 서렸다.
아로스는 시즈 앞으로 한 걸음 다가서며 검을 낮추지 않았다. 눈빛은 어둠 너머를 꿰뚫고 있었고, 그곳으로부터 느껴지는 살기는 단순한 위협 이상의 무언가였다. 공기를 가르는 소리는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아로스는 쐐기처럼 연이어 날아오는 볼트들을 번개 같은 칼놀림으로 튕겨냈으나 숨 돌릴 틈도 없이 네 번째, 다섯 번째 공격이 잇따랐다. 그것은 전부 시즈를 향해 겨눈 사격이었다.
"무녀님, 숨으십시오!"
아로스는 목소리를 낮췄지만, 그 울림에는 분노에 가까운 긴박함이 실려 있었다. 마지막 한 발까지 모두 쳐낸 그는 검 끝을 들고 시즈 쪽으로 돌아섰다.
"정신을 차리셔야 합니다. 누군가 무녀님을 노리고 있습니다!"
그 말에 시즈의 눈동자가 조금 흔들렸다. 아직도 발치에 널브러진 짐승의 시체가 그녀의 시선을 붙잡고 있었지만, 아로스의 목소리에 이끌리듯 고개를 들었다.
"...절벽 위, 누군가 숨어 있어요."
시즈의 시선이 협곡 너머의 높은 바위턱을 가리켰다. 조용히 그곳을 응시하던 아로스는 미세한 돌가루가 흩어지는 것을 포착했고, 즉시 검을 들고 자세를 고쳤다. 그러자 잔해 너머로 그림자 하나가 일어서더니 밧줄과 함께 두 사람의 앞으로 순식간에 뛰어내렸다.
낡디 낡은 갑옷을 입은 남자였다. 녹슨 갑옷의 틈새를 비룡의 가죽과 천 조각으로 덧댄 조악한 무장을 한 괴한은 높은 절벽 위에서 뛰어내렸음에도 균형을 잃지 않았다. 반쯤 망가진 투구 아래로 드리운 그림자 속 눈동자만이 분노로 불타오르고 있었고, 그 살기 어린 모습에 아로스는 검을 겨눈 채 낮게 외쳤다.
"너는 누구냐. 왜 우리를 공격하는 거지?"
그러나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남자는 조용히 한 번 숨을 내쉬더니 그다음 순간 곧바로 시즈를 향해 달려들었다. 그 걸음에는 망설임도, 경고도 없었다. 오로지 죽이겠다는 의지만이 실려 있는 모습에 아로스는 남자를 저지하기 위해 말에서 뛰어내렸다.
남자의 칼날은 공기를 베듯 움직였고, 그 궤적은 날카롭고 정밀했다. 격정에 휩싸여 보였음에도 동작은 흐트러지지 않았다. 상대를 베기 위한 최적의 거리와 각도를 계산한 채, 돌격과 동시에 연속 타격을 준비한 걸음이었다. 흔들리지 않는 발의 축, 날을 든 손에는 무게의 분산이 없었다. 빠르고 정교했으며, 무너진 바위틈을 딛는 동작조차 정교하게 훈련된 자의 솜씨였다.
극도로 단련된 전사와도 같은 그 모습에 아로스는 이 남자가 무녀를 납치하려는 공허의 신도가 아니라는 것은 확신했다. 하지만 점점 동작이 격렬해지던 남자는, 마치 상처 입은 짐승처럼 숨을 몰아쉬며 외쳤다.
"왜... 왜 저년을 감싸는 거냐! 저 위선자가 대체 뭘 했는지 알고서 그러는 것이냐!"
분노가 날것 그대로 튀어나왔다. 칼을 쥔 손이 떨렸고, 그 떨림이 그대로 검끝에 전해졌다.
"저년이 내 아내와 딸을 잡아갔단 말이다——!!"
순간 남자의 눈이 흔들렸고, 동작이 일순간 커졌다. 검이 허공을 가르는 동시에 빈틈을 발견한 아로스는 그 찰나의 순간에 몸을 틀어 남자의 겨드랑이 아래를 파고들었다. 남자는 간신히 반사적으로 칼을 내려쳐 막았으나, 힘의 중심이 틀어지며 균형이 무너졌다.
아로스는 바닥에 널브러진 비룡의 뼈 하나를 쥐어 들었다. 커다란 대퇴골의 뼈끝은 마치 망치처럼 보였다.
퍼어억———
뼈가 정확히 관자놀이를 가격하자, 남자는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 아로스는 곧바로 검을 들어 망설임 없이 그의 목을 겨누었다.
"멈추세요!"
시즈의 외침에 아로스는 칼을 거두었다. 무언가를 본 듯 달려온 그녀는 쓰러진 남자의 갑옷을 주의 깊게 살폈다. 손끝으로 천천히 낡은 흉갑을 덮은 가죽 끄트머리를 들춰낸 그곳에는 거의 지워질 듯 닳은 문양 하나가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청록빛 광석이 박힌 카노라스의 첨탑 문양. 다이크의 갑옷에 새겨져 있던 문양과 완벽히 일치한 그 모습에 시즈는 눈을 떨구며 조용히 말했다.
"...이 사람, 카노라스 출신의 기사 같아요. 무언가... 이유가 있을지도 몰라요. 깨어났을 때 이야기를 들어봐야 해요."
아로스는 한동안 입을 다물고 시체처럼 침묵을 지켰으나, 이내 숨을 내쉬며 검을 거두었다. 그리고 왼손에 들린 비룡의 뼈를 내려놓은 뒤 쓰러진 남자의 손목과 발목을 단단히 묶으며 조용히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하지만 이유가 마땅치 않다면, 그때는 제가 판단하겠습니다."
시간이 흐르고, 협곡 위를 덮고 있던 짙은 구름이 구멍을 메우듯 모여들었다. 그 틈 사이로 스며들던 흐릿한 태양빛마저 완전히 사라지면서 협곡은 한층 더 짙은 어둠 속으로 가라앉았다. 차가운 기류가 바위틈을 따라 내려앉으면서 시즈와 아로스는 바위 그늘 아래 적당한 공간을 찾아 야영을 준비했다. 작은 불길이 바위 틈새에서 흔들리며 어둠을 약간 걷어냈다. 두 사람의 그림자를 벽에 길게 드리운 모닥불의 타닥타닥 타들어가는 불소리만이 긴장된 침묵 속에서 유일한 위안처럼 들렸다.
아로스는 장작을 덧붙이며 조용히 시선을 옮겼다. 몇 시간 전, 용의 형상을 한 시체를 보고 한동안 움직이지 못했던 시즈의 모습이 떠올랐다. 혼이 빠져나간 듯 공허했던 그 표정과 함께 율리아가 했던 말이 문득 귓가를 스쳤다.
잿더미가 된 폐허 속에는 시즈와 그 아이의 어머니를 발견했죠. 시즈의 어머니는 화마에 휩쓸려 검게 타버린 몸으로 마지막까지 딸을 품에 안고 있었습니다. 이불로 아이를 감싸고, 가진 모든 이능을 쏟아부은 흔적이 역력했어요. 덕분에 시즈는 상처 하나 없이 살아남았지만 모든 것을 잃고... 마음이 완전히 무너졌습니다.
아로스는 그 말을 쉽게 흘릴 수 없었다. 잿더미 속에 남겨졌던 그날의 응어리진 감정이 눈앞의 시즈의 눈빛에 비치고 있었다.
"...무녀님."
조심스레 묻는 아로스의 목소리는 낮고 조용했다. 그 안에 담긴 것은 걱정이나 의무가 아닌, 이해하려는 조심스러운 기색이었다. 시즈는 그저 말없이 모닥불을 바라보았다. 마치 대답 대신 불꽃의 움직임에 마음을 기대는 듯했다.
모닥불 빛에 반사된 시즈의 오른쪽 눈동자가 천천히 흔들렸다. 입술을 다문 채 한동안 뜸을 들이던 그녀는 조용히 속삭이듯 말문을 열었다.
"...아까 저 사람이 말했죠. 무녀가 아내와 딸을 잡아갔다고......"
시즈는 말끝을 흐리면서 기절한 남자의 모습을 다시금 바라보았다.